Life after coin jackpot RAW novel - Chapter (99)
99화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지서현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정.말 우.연.이.네.요. 하.하.하.”
로봇처럼 딱딱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
……저건 누가 봐도 연기잖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려다가 그냥 그녀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아, 그럼 서현 씨도 신성호텔에 약속 있었던 거야?”
“네…… 그런데 대표님, 이분은……?”
지서현의 시선이 진주희를 향했다.
정우의 옆에 딱 붙어 있는 진주희를 보는 그녀의 시선엔 묘한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걸 눈치챈 건지 아닌 건지, 진주희가 방긋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진주희라고 합니다.”
“아, 네…….”
월드스타이지만, 대놓고 본인을 스타라 소개할 수 없기에 이름만 말한 건데, 지서현은 진주희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결국, 정우가 나섰다.
“그, 가수 알지? [오늘 밤 너에게> 부른 가수.”
“……노래를 잘 안 들어서…….”
“서현 씨 어디 화성에 있다가 온 거 아니지?”
“……대표님?”
“하하하, 농담이야. 아무튼, 이쪽은 유명한 연예인이셔. 가히 월드스타라고 할 수 있지.”
“월드스타는요. 호호호. 그런데 서현 씨라고 했나요? 엄청 예쁘세요.”
정우의 치켜세움에 진주희가 호들갑을 떨지만 지서현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연예인이랑 대표님이 왜……?”
“어? 뭐…… 친목 도모지. 그런데 서현 씨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
“그게 사실은 누굴 보기로 했거든요.”
“누구?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건…… 혹시 괜찮으시면 술 한잔하실래요? 술 한잔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서현이 진주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술 한잔 먼저 하자고 하다니, 굉장히 귀한 상황.
하지만 정우는 진주희와 이미 선약이 잡힌 상태였다.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 여기 주희 씨랑 저녁 먹기로 했거든. 다음에 얘기하…….”
“괜찮아요. 두 분 얘기 나누세요.”
“네? 주희 씨, 그게 무슨…….”
“정말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저도 약속이 있어서.”
“아…….”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아 참, 대표님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저녁 꼭 사 주세요!”
“네, 알겠어요. 주희 씨, 조심히 가요.”
진주희가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준 덕분에 지서현과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했다.
“……무슨 얘긴진 모르겠지만, 가자. 술 한잔하자고.”
“……예.”
과연, 지서현이 말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일까.
그리고 최근 그녀가 왜 자신을 피한 것일까.
그 이유는 곧 알게 될 터였다.
* * *
두 사람이 찾은 곳은 작은 삼겹살집이었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 불판을 사이에 두고 정우가 투덜거렸다.
“그냥 호텔 펍 가도 되는데.”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근데 그건 나도 그래. 하하하, 소주에 삼겹살이 진리긴 하지? 자, 짠 한잔하자고.”
소주잔을 부딪치는 두 사람.
그때까지 지서현에게서 별말이 없었다. 먼저 술 한잔하자고 해 놓고 얘기를 안 하는 상황에 답답할 법도 하지만, 정우 역시 대화를 재촉하지 않고 여유롭게 식사를 즐겼다.
때가 되면 이야기하겠지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한잔 두잔 술이 들어가자 단단히 닫혀 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 열린 듯,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대표님, 제가 오늘 누구 만났는지 아십니까?”
“누구 봤는데? 친구?”
정우는 친구라도 만난 건가 지레짐작하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뜻밖이었다.
“한광표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한광표 회장님?”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정우도 놀라고 말았다.
“아니,, 서현 씨가 한광표 회장님을 왜 만나? 아, 물론 내가 서현 씨의 클라스에 대해서 무시하려는 건 아니긴 한데…… 너무 의외라서. 뭐 스카웃 제안이라도 하신 건가?”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묻자, 지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회장님이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봤습니다.”
“한 회장님이? 허…… 지금 상황을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할 수 있어?”
그 말에 지서현이 우물쭈물하다가 소주 한잔을 입에 탁 털어 넣었다.
살짝 취기가 오른 듯 그녀의 볼이 달아올랐다.
“……사실 한광표 회장님은 제 할아버지입니다.”
“뭐?”
충격적인 얘기에 정우는 순간 얼어 버렸다.
아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한 회장님이 할아버지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한광표 회장님이 제 친할아버지세요.”
“……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는 얘기는 지서현의 아버지가 한광표 회장의 아들 중 하나란 얘기가 아닌가?
“그럼, 서현 씨 아버지가……?”
“네. 대한전자 한성준 사장입니다.”
“와…….”
충격의 연속이었다.
결국, 지서현은 대한그룹 사람이자 재벌가 3세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서현 씨 엄청 부자였구나? 하긴 이상하긴 했어. 나한테 비트코인 100개씩 척척 빌려줄 때도 그렇고. 부자라니까 설명이 되네.”
정우의 추측에 지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혀요. 아, 물론 지금은 부자인 것 같지만…… 예전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비트코인도 제 스스로 벌어들인 거지, 집안의 도움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뭐?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전 혼외자거든요.”
“……헙!”
혼외자라는 말에 정우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지서현의 성은 한 씨가 아닌 ‘지’인데 이걸 눈치 못 채다니.
“……서현 씨, 미안해. 민감한 부분인데 나도 모르게…….”
“아닙니다. 언제고 얘기해야지 했었어요. 그게 지금이 되었을 뿐…….”
“……한번 자세히 얘기해 줄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어떻게 살아온 거야?”
“그건…….”
지서현이 멍하니 불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한광표 회장의 첫째 아들인 한성준 사장과 그녀의 엄마가 대학 시절 커플이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일과, 강제로 유학길에 오른 한성준 사장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녀의 엄마는 헤어진 이후에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더랬다.
“……엄마는 저를 혼자 키우셨어요. 전형적인 워킹맘이셨죠. 낮에는 할머니 손에 저를 맡기고 개발일을 하러 다니셨고, 저녁에는 오셔서 저한테 공부를 알려 주셨어요.”
“……대단하신 분이셨네.”
“그런데 과로 때문에 결국 병이 생기셔서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였죠…… 그리고 그 장례식 때 아저씨를 처음 봤어요.”
“아저씨라면……?”
“……한성준 사장이요.”
“음…….”
“아저씨는 저를 보자마자 한눈에 제가 자기 딸인 걸 알아보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놀라고 후회하셨죠. 그런데…… 저는 그게 싫었어요. 어차피 남인데, 아니 남이나 마찬가지로 살았는데, 왜 이제 와서 아빠 노릇을 하려고 하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하던가. 지서현의 말대로 한성준 사장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다시 보니 꽤 닮은 구석이 많았다. 특히 그녀의 갸름한 얼굴형은 한성준 사장의 외모를 쏙 빼다 닮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온 거야?”
“그냥 가끔 연락하는 정도예요. 아저씨는 저를 돕고 싶어 하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럼, 대학부터 지금까지 혼자서 해낸 거야?”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프로그래머가 된 건 엄마 영향이 커요. 엄마도 프로그래머셨거든요.”
“아아…… 어쩐지. 엄마한테 배운 실력이라 개발 실력이 그렇게 대단했던 거구나.”
“아마도요.”
“가만. 그럼 성운이노베이션 붙기 전에 대한그룹 개발 쪽도 붙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 안 간 이유가……?”
“예. 아저씨가 있는 회사에서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안 갔습니다. 다른 대기업도 붙었는데 안 간 이유도 왠지 입김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아아…….”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지서현의 가정사가 꽤나 다사다난하다.
그러고 보니 오다가다 지서현을 대동한 채로 한성준 사장과 본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의 어색한 기류는 그것 때문이었나.
“……잠깐. 근데 그때 서현 씨가 대한병원에 연락했던 건 어떻게 된 거야?”
“……그건 급해서…… 아저씨한테 부탁했어요.”
“아…… 그랬구나.”
자신을 위해서 싫어하는 사람한테 부탁해 주다니.
지서현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졌다.
“이거 큰 은혜를 입었네.”
“……아셨으면 몸 관리 제대로 하십쇼.”
“하하하, 안 그래도 매일 아침 운동 조금씩 하고 있어. 자, 이거 봐. 나 알통도 생겼다?”
이두근에 힘을 줘 보이자 지서현이 살폿 미소 지었다.
“어, 웃었다.”
“흠흠…… 안 웃었습니다.”
“자존심은…… 아무튼 그래서 한광표 회장님은 서현 씨를 왜 불렀대? 손녀 보고 싶대?”
“처음엔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지서현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저 보고 호적에 들어오라고 얘기하셨습니다.”
“뭐? 그럼 잘된 거 아니야?”
“아니요. 제가 왜 들어가야 합니까? 이미 남인데요.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한성준 사장님이 아버진데…….”
“대한그룹은…… 아니 한씨일가는 그리 깨끗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저를 왜 다시 가문으로 편입시키려는지 대표님은 정말 모르시겠어요?”
“……전혀. 이유가 뭔데?”
“……저를 이용해서 대표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입니다.”
“뭐? 그게 무슨…….”
“대표님은 지금 독신이시죠. 네뷸라 코퍼레이션이라는 거대 기업을 일구고 있는 독신의 사업가…… 결혼으로 엮을 수 있으면 엄청난 이권을 손에 쥘 수 있는 최고의 신랑감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한씨일가는 여자가 귀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성준 사장의 사생아죠.”
“……미쳤네. 나를 끌어들이려고 그런 짓까지 한다는 게…….”
거기까지는 생각조차 못 해 봤기에 지서현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대한그룹이 그토록 간절하게 원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점이 뿌듯하기도 했지만, 필요에 의해서라면 인륜마저도 마음대로 움직여 버리는 대기업의 차가운 행보에 거부감이 들었다.
“잠깐, 설마 그럼 서현 씨가 나를 피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부담 주기 싫어서?”
“…….”
우울해 보이는 지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시울이 슬쩍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정황만으로도 정우는 이 모든 게 대한그룹 때문이었음을 직감했다.
“와…… 한광표 회장은 그렇다 쳐도 한성준 사장님이 그럴 줄이야……. 진짜 인자하시고 성격도 좋으셨는데 상상도 못 했네. 그런데 서현 씨, 좀 실망이야?”
“예? 뭐가…….”
“아니, 그까짓 일 가지고 나를 그렇게 피하면 내가 뭐가 돼. 나 요새 서현 씨한테 무슨 죄지었나 싶어서 전전긍긍했단 말이야.”
“아…… 죄송합니다. 괜히 대표님께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부담은 무슨. 진즉에 이렇게 얘기했으면 편하고 얼마나 좋아. 안 그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거듭 사과하는 지서현을 보며 정우가 짐짓 화난 척했던 표정을 풀며 웃었다.
“그래도 이제라도 얘기해 줘서 고마워. 그럼 우리 사이에 문제없는 거지?”
“……우리 사이요?”
“어. 이지 크로스…… 몰라?”
“……풉!”
이지 크로스는 작년에 산업스파이로 감옥에 간 양규철과 지서현이 말다툼했을 때 정우가 옥상에서 했던 드립이었다.
정우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게 팔을 교차시키려는 흉내를 내보이자 지서현이 풉 웃었다.
“어, 또 웃었다.”
“……안 웃었습니다.”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털 난다던데…….”
“……변태. 그리고 저 운 적 없습니다만.”
“아니, 서현 씨 그냥 드립이야, 드립. 알잖아? 나 변태 아니야!”
“……그게 드립이라면, 유머 감각은 정말 꽝이시네요.”
“윽…… 팩트로 후려치네.”
정우가 상처 입었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죽는 시늉을 하는 사이.
그를 놀리는 지서현의 얼굴엔 어느새 우울함은 가시고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
* * *
술 한잔하며 지서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그녀가 갖고 있던 호의와 부담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동시에 그녀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현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모르겠습니다.”
“대한그룹에 복수하고 싶다거나, 한 방 먹이고 싶다거나, 뭐 그런 거 없어?”
“예전에는 아저씨가 죽을 만큼 미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게 별로 없습니다. 아저씨도 결혼하긴 하셨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는 걸 보면 정말 우리 엄마를 많이 사랑하셨구나…… 싶기도 하고요.”
“음…… 그럼 용서하겠다는 거야?”
“용서할 것도 말 것도 없이 가족이 되진 못했지만, 피해를 입은 건 없으니까요. 물론 요새 자꾸 선을 넘지만…… 대표님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네요.”
“나?”
“솔리드스타와 이클립스.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못할까요.”
“아…… 충분히 그럴 수도.”
상용화 전고체배터리를 보유한 기업이다. 그런 기업의 대표가 독신인데 혈연으로 엮을 수 있으면 베스트일 터.
대한그룹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혼외자라서 버려 두었던 지서현을, 이제 와서 정략적인 카드로 활용하기 위해 접근한다는 건 괘씸하게 느껴졌다.
“……만약 대한그룹에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어떡할래?”
“네?”
“뭐, 그런 거 있잖아. 우리가 대한그룹을 인수해 버린다든지, 그런 거 말이야.”
“아…….”
지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시원한 복수가 되겠네요. 아저씨한테도 한 방 먹일 수 있구요.”
“그렇지?”
“그런데 상대는 대한그룹입니다. 대표님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상대가 될까요?”
“대한그룹 전체로 보면 택도 없지. 그런데…… 일부라면 승산이 있어. 특히 한성준 사장이 맡고 있는 대한전자 쪽이라면.”
“대한전자요?”
회귀하기 전 기억에 따르면 추후 대한그룹은 한동준 사장이 회장 자리를 이어받게 되고, 그 과정에서 수익성 개선을 위해 대한전자는 핸드폰 사업을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핸드폰 사업 종사들과 인재들을 대거 감축하게 되는데, 정우는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한전자를 직접적으로 인수하지 못하더라도 기술력 있는 인재들을 빼 와서 스마트폰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면?
마침 그래핀 사업으로 반도체와 스마트폰 시장 진출도 고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귀가 딱딱 맞았다.
문제는 최근 미래가 많이 바뀌면서 원래 예정된 미래대로 한동준 사장이 회장이 될지는 100%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한전자가 계속 스마트폰 시장에서 죽을 쑤고 있는 이상 철수할 가능성이 훨씬 크긴 하지만.
그런 정우의 생각을 모르는 지서현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대한전자를 인수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냥 떠올린 것뿐이야.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어. 다만…… 가능성이 보인다면 추진해 봐야지.”
대한전자를 먹겠다니.
누가 들으면 헛소리라고 치부했겠지만, 그 말을 내뱉은 게 다름 아닌 정우다.
지서현은 정우의 재산이 40조 원을 돌파한 것을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대한전자 시총이 13조 원 정도죠. 총알은 충분한 것 같네요.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당연하지. 이래 봬도 나 사업가야.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서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한국에서 수십 년간 대기업으로 군림해온 대한그룹…… 그들도 사업가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들도 절대 만만하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경고에 정우는 미소 지었다.
“걱정 말라고.”
* * *
“서현 씨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여기 보고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오케이.”
지서현과의 사이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고, 왠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던 그녀의 얼굴도 다시 밝아졌다.
정우 역시 마음의 부담을 덜어 낸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가 왜 서현 씨를 왜 그렇게 신경 썼지?’
알 수 없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달까.
그저 지금의 그녀와 자신의 관계에 정우는 만족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대한전자에 대해 알아보세요.”
“대한전자요?”
지시를 받은 김 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한전자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전부 찾아서 보고해 주세요.”
“음…… 혹시 어떤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인수를 고려 중입니다.”
“인수를요?”
김 비서가 놀란 듯 눈을 끔뻑였다.
“대표님, 상대는 대한전자입니다만……?”
“뭐 어때요. 인수할 만하면 하는 거지. 그러니 현재 대한전자 상태는 어떤지, 지분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빠짐없이 보고해 주세요. 아, 그리고 제가 인수하려는 건 대한전자 전체이긴 한데, 가능하면 스마트폰 사업부가 핵심입니다. 스마트폰 사업부의 인재가 몇 명인지, 누가 핵심 인재인지 인사 조직도도 빠짐없이 파악 부탁드립니다.”
“……한번 확인해 보겠지만, 그런 건 대외비라 쉽게 알아내긴 어려울 겁니다.”
“음…… 그 부분은 크게 기대하면 안 되겠네요. 알겠어요. 나머지라도 조사 부탁드립니다.”
“넵, 관련 부서에 내용 하달하겠습니다.”
이후 김 비서를 통해 대한전자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현재 최대 지분 보유자이자 경영권을 가진 이는 한성준 사장이었고, 그 다음은 한광표 회장 순서였는데, 지분 관계가 꽤나 복잡했다.
“……이거 내가 끼어들 여지가 있나?”
시장에 풀린 대한전자 주식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인수하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결국, 기다렸다가 스마트폰 사업부가 정리되면 인재들을 스카웃해 오는 게 유일한 길인가 싶을 때.
강철준 팀장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대표님, 차량 대기시켜 놨습니다.”
“예? 무슨…….”
“오늘 정명섬유 대표와 미팅 잡혀 있지 않습니까?”
“아, 맞다. 깜빡했네요. 몇 시죠?”
“1시간 30분 이후에 정명섬유 남양주 본사에서 보기로 해서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얼마 안 남았네요. 알겠어요. 지금 가요.”
정명섬유 인수 건으로 미팅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정우가 옷가지를 챙겨서 일어나던 그때였다.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대표님?”
“지난번에 강 팀장님이 정보에 밝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막 CIA도 통할 수 있다고…….”
“예. 맞습니다. CIA도 정보책이 여러 군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강철준 팀장의 의아해하는 얼굴을 보며 정우가 미소 지었다.
“혹시 대한전자에 대해서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 * *
“팀원들 통해서 지시 내려놨으니, 곧 며칠 내에 결과가 나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인센티브로 보답해 주시면 됩니다.”
“하하하, 물론이죠.”
정우는 강철준 팀장을 통해 대한전자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 조사를 의뢰했다.
아마도 특수작전을 수행했던 요원들인 만큼 대한전자 경영자들의 일거수일투족과 지분관계에 얽힌 역학구도에 관한 조금 더 세밀하고 은밀한 정보를 캐올 수 있을 터.
‘빈틈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일말의 기대를 안고 일단 눈앞에 당면한 문제인 정명섬유 인수 건을 해결하기 위해 남양주로 향했다.
시골에 가까운 느낌의 남양주는 최근 개발이 많이 진행되어서인지 계획형으로 멀끔하게 지어진 도시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정명섬유가 위치한 본사와 공장은 남양주 외곽이라 도시를 지나 한참 더 들어가야 했고, 거의 산골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이 대표님!”
정우가 도착하자 정명섬유를 경영하고 있는 정명훈 대표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반갑습니다. 이정우입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직접 본사로 찾아가 뵈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인수하는 입장에서 회사랑 공장을 둘러봐야죠. 그런데 좀 오래된 것 같습니다?”
정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살짝 무례한 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좋은 회사라고 포장을 하기에는 확실히 사무실도 그렇고 공장도 외관이 굉장히 낙후된 느낌이 가득했다.
이런 회사가 정말 그런 첨단 탄소섬유 기술을 보유한 게 맞나 싶을 정도다.
정우의 지적에 정명훈 대표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가 남양주에 터를 잡은 지 거의 40년은 넘었거든요. 정명섬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사옥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해합니다. 어차피 건물이야 새로 지으면 되는 거고, 알맹이가 중요하죠. 탄소섬유 기술을 보유 중이라고 들었는데, 특허 좀 볼 수 있을까요?”
“여기 특허권리증서입니다.”
한쪽에 비치된 비밀금고를 열어 특허증서들을 보여 주었다.
그 뭉치가 어찌나 두꺼운지 수백 장은 훌쩍 넘어 보였다.
모두 세세하게 확인은 어려웠지만, 따로 준비된 자료를 통해 정말로 보유한 특허가 수백 가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이후 진행된 연구소 견학 역시 만족스러웠다.
건물 외관은 허름했지만 내부 연구실은 깔끔했고, 연구원들도 분주히 연구에 매진 중이었다.
사내 분위기가 확립되어 있다는 점이 정우는 흡족했다.
특히, 당장 제품 생산에만 집중하는 다른 섬유 기업들과 달리 연구 개발에 상당히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은 감탄스러웠다.
“굉장한데요?”
“섬유 업계에서 종사한 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 하하하.”
“그래도 일반 직물만 생산하면 이렇게 많은 특허를 보유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제 모토가 그거였습니다. 더 좋고 튼튼한 섬유를 개발하자는 거였죠. 그래서 폴리에스테르뿐만 아니라 탄소섬유 사업에도 손을 댔는데…… 결과가 그리 신통치는 않았네요.”
“확실히 매출에 비해 EV가 높은 감이 있긴 하죠.”
정명섬유는 현재 비상장 상태였는데, 정명훈 대표가 주장하는 EV(Enterprise Value: 기업가치)는 무려 1,000억 원.
그에 반해 현재 매출은 30~40억 원대 정도였다.
기업의 평가정도를 따지는 매출배수(EV/SALES: EV를 매출로 나눈 값. 낮을수록 저평가 기업)가 무려 30배에 달하는 것이다.
정우가 EV를 언급하자 정명훈 대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연구에 투자를 계속하다 보니, 최근에 부채가 좀 많이 늘어서…….”
“압니다. EV 중 시총을 제외하면 부채가 상당하다는 걸요. 그것도 감안하고 왔습니다.”
“그럼…… 인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반색하는 정명훈 대표.
하지만 마음이 급한 그는 정우가 지금 정명섬유를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 섬유 공장을 인수하려는 게 아니라 그래핀 섬유 사업을 위해 ‘섬유기술’을 흡수하는 게 목적인 정우의 입장에서 정명섬유는 가장 값싸게 기술을 이전받을 수 있는 최고의 기업이었던 것.
그런 정 대표를 보며 정우가 짐짓 선심 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명섬유, 제가 인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