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129)
첩자의 마교생활-129화(129/350)
129.
#삼공녀의 분노 (1)
– 월하촌 대나무 숲.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저녁.
두 사람은 높게 뻗은 나무 끝에 올라서서 월하촌을 내려다봤다.
커다란 호수 바깥엔 집들이 가득하고, 중심엔 홍예교 너머 취선루가 눈에 들어선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뒤쪽 산 위로 떨어지는 붉은 노을이 따뜻이 감싸주니 그야말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이다.
“어때. 볼만하지?”
장이서가 제 보물을 꺼내 보여주는 사람처럼 환히 웃는다. 이에 구유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괜찮은 곳이다.”
“맞아. 모르고 보면 설마 여기가 마교일 거라곤 상상하기 힘든 곳이지.”
구유의 표정이 어색하게 비틀린다.
“그렇게 마교라고 막 불러도 괜찮은 건가?”
“둘뿐이잖아. 편하게 하자고.”
“역시 이상한 녀석이군.”
“괜찮다는 의미로 듣지.”
역시 이상한 놈. 구유가 인상을 찌푸리자 장이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묻는다.
“참, 혹시 구룡성 인근에선 뭐 본 거 없었나?”
본 것이라……. 구체적 단어가 생략된 물음. 하지만 구유는 무슨 말인지 대번에 알아챘다. 동요 없던 두 눈에 분노까지 서렸다.
“광의를 말하는 거군.”
광의 공손절.
흉노족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 그 자체.
“맞아.”
당연히 구유 역시 그의 시체를 찾았다. 부관참시하려고. 한데.
“폭풍이 쓸고 가면 모든 게 사라지곤 하지. 어떻게든 찾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랬군.”
구유에게서 진한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 말을 하려고 날 따로 불러낸 건 아닐 테고. 할 말이 무엇인가.”
구유가 이젠 용건을 얘기해 보라는 듯 물었다.
장이서도 웃음기를 거두곤 사뭇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칠소궁이 어떤 상황인지는 들었나?”
“대충.”
표정을 보니 어디까지 들었는지 짐작이 갔다.
마오가 지지 세력 하나 없는 망나니 칠공자라는 것. 그래서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은 처지라는 것.
“소교주로 오해했을 텐데. 실망이 컸겠어.”
“……너흰 우리를 구했고, 이제 우리는 너희를 구한다. 그 외에 다른 건 필요치 않다.”
“든든하네.”
어찌 보면 투박한 말. 하지만 그래서 더욱 구유의 진심이 느껴진다. 한 번 주인으로 정한 이상 다른 조건은 아무 필요 없다는 얘기. 설령 가진 거라곤 허명뿐인 칠공자라고 해도 말이다.
“근데 난…….”
장이서가 노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연다.
“어떻게든 소교주로 만들어 볼 생각이야.”
“……!”
구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몰랐을 때라면 모를까,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사정을 뻔히 봐왔다.
몇몇을 제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궁(宮).
경외라고는 보이지 않는 마교도들의 시선.
한데 그런 칠공자를 소교주로 만들겠다고?
“진심인가?”
구유는 묻고 난 뒤, 장이서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과평을 구하겠다고 뛰어들었을 때와 같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진심이군…….”
“물론 쉽지는 않아. 날고 기는 자들이 수두룩하고, 온갖 위험이 뒤따르겠지. 반면 칠공자님은 배워야 할 게 아직 많아. 철딱서니도 없고, 성질머리도 고약한데, 고집도 세지. 실력도 엉망이야. 그때 널 상대한 건 우연이고. 그냥 죽기 딱 좋은 팔자지.”
그 정도면…… 그냥 답이 없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음?”
“누굴 쉽게 해하지는 않아.”
“……!”
“그래서 가장 사람답다고 생각해. 사람이 그런 거잖아. 화도 내고, 고집도 부리고. 부족한 부분도 드러내고. 하지만 쉽게 남을 해치지 않는 거. 걱정하고, 미안해하며, 고마워하는 거. 그게 사람인 거잖아.”
“마인이…… 아니라는 건가?”
구유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이에 장이서는 웃으며 부언했다.
“마인이라고 다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소교주의 자리에 누군가 올라야 한다면. 그럼 난 칠공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이거였구나. 부른 이유가. 구유는 장이서의 뜻을 이해했다.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니라 같은 목표를 두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동지가 되어달라는 뜻이리라.
“……힘든 길이 되겠군.”
“도와주겠나?”
이에 구유는 어느덧 거의 다 저물고, 두둥실 떠올라가는 달을 보며 말했다.
“너의 뒤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것이다.”
충분한 대답. 장이서의 얼굴이 환히 갠다.
“조만간 잠시 다녀올 곳이 생겼어. 없던 일정이라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고.”
“광의 때문인가……?”
맞다. 광의에게 당한 불사독. 숨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상태라고 들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네.”
“……괜찮은 것이냐. 아니, 괜찮지 않겠지.”
“일리일해(一利一害). 이로움이 있으면 해로움도 감수해야지. 네가 왔으니 이 정도는 괜찮아.”
하. 구유는 끝내 고개를 절절 저었다.
정말 별거 아닌 듯 말하는 저 말이 묘하게 자꾸 사람을 긁는다. 미안하면서 고맙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든 이 녀석 장이서를 한번 따라보기로. 그렇게 결심을 굳혔다.
“내가 뭘 하면 되겠나.”
구유의 진심이 담긴 물음에 장이서는 씨익 웃곤 답했다.
“우선…… 좀 쉬자.”
*
며칠 뒤.
장이서가 위중하다는 소식은 아무도 관심 없던 예전과 달리, 굵직한 인사들을 향해 빠르게 번져나갔다.
“대체 어쩌다 그런 일이…….”
호룡당주 지대호는 분통을 터트리며 죄인들을 더 세게 때려눕혔고.
“오호호호! 사필귀정이니라! 이제야 발 뻗고 자겠구나. 천박한 놈. 그리 까불더니 잘되었다!”
반면 비룡당주 묘채경은 제 집무실에서 환호를 내질렀다.
맹가의 가주 맹철용은 다행이라는 생각과 아쉽다는 생각이 묘하게 교차했다.
불신하는 이도 있었다.
“거짓말. 장이서는 악귀야. 절대 그렇게 안 죽을걸?”
맹원원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진짜 죽을병이든, 아니든.
이젠 예전과 다르게 확실히 마교의 중추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의 소식을 듣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이도 있었다.
*
– 월광호 취선루.
가장 높은 층에 자리한 홍란의 방.
“제법 손님이 늘었군.”
본래라면 잘했다며 좋아했을 장이서가 앉아 있겠지만, 오늘 들려온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매혹적인 여인의 음성이었다.
“과찬이십니다.”
홍란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무뚝뚝한 어투에 매서운 눈매. 넙데데한 용모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인피면구를 쓴 지금의 이름은 진산. 바로 삼공녀 사해령이다.
“장 보좌님께서 곧 오신다고 하셨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위독하다더니. 언제 깨어난 거지?”
“저도 잘…….”
장이서가 처음 깨어난 건 며칠이 흘렀지만, 그녀도 제대로 그를 보진 못했다.
깨어나고 얼마 안 가 또다시 기절하듯 잠들었기 때문.
그래서 그녀의 얼굴에도 심란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진산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볼수록 묘했다.
주루의 여인이라고 보기엔 몸가짐에 기품이 있었고, 목소리엔 학식이 느껴졌다.
물론 기녀들도 사내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다양한 예와 기를 배운다. 하지만 아무리 배워도 기본적인 기질이란 게 있었다.
반사적으로 윗사람의 말에 반응한다든가, 저도 모르게 나오는 저잣거리의 말투라든가.
한데 취홍란은 뭔가가 좀 달랐다.
뒤늦게 누굴 홀리고자 배운 게 아니라 날 때부터 배운 듯한. 그런 태생적인 고귀함이 보였다.
“장이서와는 무슨 관계지?”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홍란이 다소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장이서를 좋아하나.”
“그, 그건…….”
그야말로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비수.
하나 상대가 놀라거나 말거나 진산은 창밖으로 오가는 손님들을 살피며 제 말만을 뱉었다.
“……할 일 없는 놈들이 짝이나 찾던 곳이 이제는 정치판이 다 되었어. 오룡당은 물론이고 대주들까지 드나드는 걸 보면. 이것도 장이서가 노린 건가?”
주저 없는 직언. 홍란은 긴장감에 술잔을 또르르 채워주었다. 진산은 술잔을 받아 들곤 고저 없이 타일렀다.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그 녀석이 해놓은 짓들이 궁금할 뿐인 거지.”
“장 보좌님께서 취선루를 좋게 봐주신 건 맞으나, 주루의 일과는 아무 관계 없으십니다.”
“루주와도 아무 관계가 아닌가?”
또다시 찌르는 비수. 따라가기 버겁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라면 다행이고.”
탁. 진산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장이서를 높게 보는 사람이야. 그것도 아주 많이.”
홍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남들은 칠공자가 백인장의 인을 받았을 때, 그게 삼소궁을 위해 쓰일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건 시선을 돌리기 위한 허수. 애초에 장이서는 내부에서 식솔을 찾을 마음이 없었어. 누굴 들이든 그게 진짜 칠공자의 사람이 되진 않을 테니.”
정답이다. 홍란은 진산의 명확한 추론에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래서 교외로 눈을 돌린 거다. 남들은 도적 떼를 들여왔다고 말하지만, 천만에. 나락이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 돌아와 말했다. 이젠 누구든 칠소궁을 얕보면 당할 거라고.”
홍란은 모르는 일이지만, 나락은 구유와 직접 싸우고 패한 뒤 자취를 감췄다.
그가 삼소궁에 돌아가 보고를 올리는 건 당연한 일.
또르르.
직접 술잔을 채운 진산이 잔을 들어 올리며 마저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게 장이서다. 자신도 모르게 상대를 판에 끌어들이고, 흔들고, 뒤엎고. 그래서 제가 원하는 값을 반드시 도출해내는 그런 녀석.”
“…….”
“그리고 그 판에 휘말려 이용당한 건 삼소궁 역시 마찬가지. 보통 그럴 때 내겐 두 가지뿐이다. 더 가까이 두든가. 땅에 묻든가.”
쿵! 내려놓은 빈 잔이 아까보다 더 거센 소음을 울린다.
이내 삽시간에 방 안에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휘몰아쳤다.
“……!”
홍란은 갑작스러운 위압감에 일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이 사람…… 진심이야……!’
당장 자신의 목을 그어도 이상할 게 없는 눈빛.
게다가 이 빙열(氷熱)의 기운은 그녀의 성명절기인 빙화무극심결(氷火無極心訣).
이는 아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겠다는 것과도 마찬가지.
“그러니까 다시 묻지. 거짓을 고하면 죽는다.”
휘몰아치는 빙열풍(氷熱風)에 홍란은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느끼며 고통에 휩싸였다.
“장이서와는 무슨 관계지?”
솨아아아-!
더 강해지는 빙열풍.
어느새 사방엔 불꽃의 씨가 흩날리다가 이내 서리로 변모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빙화무극심결을 7성 이상 깨우친 자에게만 나타나는 봉화빙설(鳳火氷雪)이다.
보고도 믿기 힘든 기이한 광경.
홍란의 솜털도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다가 뜨겁게 녹아내리기를 반복했다.
이건 뭔가가 잘못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불타 죽거나 얼어 죽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거다.
하지만.
‘주인님에 대해선 죽어도 말할 수 없어.’
그는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은인.
그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어도 진작 죽었을 터.
홍란은 이를 꽉 문 채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