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171)
첩자의 마교생활-171화(171/350)
171.
#능구렁이들
마의는 차분해진 어조로 일언했다.
“오랜 지기로서 부탁하겠소. 부디 장로께선 실수를 범하지 마시오.”
“자네…….”
독산각 하나라면 모를까, 독마가 복수에 나선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전대의 원로.
‘그가 돌아온다는 건 본교가 발칵 뒤집힐 사안이다. 그리고 그의 성향을 미루어보건대 절대 미리 알리고 싶진 않았을 거다. 한데도 내게 이를 알렸다는 건…….’
그만큼 장이서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얘기.
다시금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생긴 건 지극히 평범하다. 하나 그래서 더 종잡을 수가 없다.
분명 교외자에 들개 출신이며 방첩대에서 썩어가던 자. 한데 칠소궁을 이만큼 일궈놓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북명신공을 견뎌냈다.
어디 그뿐인가. 대뜸 마의가 나타나 제 아우라 말하며 목숨 걸고 지키고 있다.
‘도대체 네 정체는 무엇이란 말이냐.’
돌고 돌아 결국은 제자리.
바로 그때 마의가 뒷짐을 진 채 마일성의 의문을 종결지었다.
“이 아이가 곧 그분의 화신이자 모든 것. 딱 거기까지만 알고 계시오.”
“……!”
마일성의 입이 슬쩍 벌어졌다.
‘그 말인즉슨…… 저 아이가 독마의 후계라는 말인가……?!’
이것보다 더 명확한 신분이 또 있을까. 아니, 찾으래도 없다.
그렇다면…….
그는 노련한 정치의 고수. 장고 끝에 심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식사는. 하셨나?”
이들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시점이었다.
*
마가는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겨, 경천채가 무너졌다!’
별안간 가주가 머무는 안채가 폭삭 무너졌는데 안 놀라고 배기랴.
불도 안 났는데 물 한 동이씩 퍼 나르고, 울고불고.
다행인 건 마일성이 장이서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여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렇게 소동이 끝이 나고, 장이서와 마의는 안내를 따라 조용한 곳에 홀로 떨어진 별채로 자리를 옮겼다.
“가주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풍스레 꾸며진 넓은 공간에 화초가 가득하고, 가운데 마주 앉을 협탁이 우아하게 마련되어 있다.
마일성이 사색에 잠길 때 주로 쓰는 곳이었다.
“형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변을 살필 틈도 없이 감사의 인사부터 꺼냈다.
“가족끼린 그딴 인사하는 거 아니다. 가면 간다고 말하는 게 인사지. 하라는 건 안 하고 별 쓸데없는 걸…… 쯧!”
옆에 앉은 마의는 독산각에서 말없이 떠나온 게 영 서운했는지 이마에 심통이 가득했다.
그 모습이 참 새삼 왜 이렇게 정겹고 웃음이 나는지.
저도 모르게 큭큭 웃음을 터트리자, 마의는 더 성난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였다.
“우습냐? 우스워? 내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경천채랑 같이 잔재가 되었을 놈이!”
“인사도 없이 온 게 그리 서운하셨습니까?”
“시끄럽다!”
고맙고 반가운 마음에 마의의 손을 툭 잡고 말했다.
“다음엔 꼭 제일 먼저 인사하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몸도 사리고요.”
“돼, 됐다. 이놈아. 손 치워라! 징그럽게.”
“예.”
“하여튼, 이 능구렁이 같은 놈. 에휴, 늘그막에 어쩌다 이런 놈하고 연을 맺어서는.”
괜스레 먼 산 보며 헛기침을 뱉는다. 별거 아닌데 속이 따뜻해지는 기분. 그래도 같이 지낸 한 달이 꽤 크긴 했나 보다. 이리 반가운 걸 보면.
그렇게 위험한 우애가 한층 더 깊어졌다.
그제야 장이서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데 마가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어지간히 귀한 이가 아니라면 구경도 시켜주지 않는 그런 곳이다. 나도 와본 게 채 세 번이 안 되니 말 다 했지. 어지간히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게 어디 저 때문이겠습니까. 모두 독산각 덕분이지요.”
“네놈은 아직 일장로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비단 신분 하나에 누굴 대우해줄 양반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전부 마음에 드는데 딱 하나. 신분 하나가 마음이 쓰였던 거다. 하여 널 죽이려 했던 것이고, 그게 해결이 되어 이리 데려온 게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근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일장로의 마음에 든다는 건 둘 중 하나니까. 죽이든가, 챙기든가. 원래 그런 양반이다.”
참, 누가 마교 아니랄까 봐. 성미 한번 악독하다.
드르륵!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사이. 이윽고 앞쪽 문이 열리고, 마침내 그가 들어섰다.
일장로 마일성.
어느새 옷까지 갈아입은 그다.
“사이가 꽤 좋아 보이는군.”
그는 위엄 있게 걸어와 맞은편에 자리했다. 조금 전 경천채를 가루로 만들었던 그가 맞나 싶을 만큼 편안한 얼굴이었다.
장이서 역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갑게 맞았다.
“마가에 이리 고즈넉한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후후, 방해 없이 조용히 대화에 집중하고 싶을 때가 있지.”
“저희에게 잘 맞는 장소 같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두 사람이 오랜 지기처럼 대화를 나누자 옆에 있던 마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여튼 이 능구렁이들. 방금까지 죽네 사네 할 땐 언제고…….’
마일성이야 군림하는 정치꾼이니 그럴 수 있다지만, 장이서는 참 볼수록 기가 찬 놈이었다.
북명신공에 가루가 될 뻔했던 주제에 저리 태연히 대화를 나누다니. 웬만한 놈들은 웃기는커녕 마주하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거다.
한데 장이서는 당당한 걸 넘어서서 대화를 주도했다.
“장 보좌가 독산각과 연이 있는 줄은 몰랐군.”
“본교의 인연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밝혀야 하는 것보다 숨겨야 하는 게 더 많은 법이지요.”
지금도 일장로가 어째서 여태 자신이 몰랐냐는 추궁을 교묘하게 틀어 대답한 것.
게다가 말도 된다.
원한 쌓는 게 워낙 비일비재한 곳이니, 아끼는 인연일수록 숨겨야 살리는 게 마교의 생리.
특히 전설이자 원수지간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널린 독마 정도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
“그럼 교외자였던 이유는…….”
질문 같은 추궁이 이어지자 마의가 얕게 숨을 뱉고는 툭 말을 잘랐다.
“일장로. 어디까지 물을 참이오. 아직도 의심이 남은 것이라면 이만 우린 일어나리다.”
저 둘 만큼 철면피는 아니나, 마의 역시 마교의 장로. 이런 대우에 속 좋게 있을 위인은 아니다.
‘훌륭하십니다, 형님.’
장이서는 시기적절한 개입에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갈무리했다.
신분 확인은 여기서 끝.
마일성 역시 이에 동조하듯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가를 원한다고.”
“예.”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인가.”
“적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기엔 오늘 마가가 입은 피해가 너무 크네. 마가칠객이 무너졌고, 장자가 패했으니. 그 책임을 아무에게도 묻지 않는다면 세상은 마가를 비웃고 우습게 보겠지.”
“하지만 얻은 것도 있지요.”
“무얼 말인가.”
“두 자식을 얻지 않았습니까.”
“……!”
마일성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자식이라니.
“언젠 아니었던 것처럼 말을 하는군.”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어땠습니까. 호부 밑에 견자가 둘이나 태어났다.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마가의 천하도 여기까지다. 이게 바로 세간이 바라보는 마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촌철살인. 너무 심한 언사에 오히려 육장로 마의가 크흠! 헛기침을 터트리며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마일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되레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한데 오늘 둘의 대결을 통해 그 모든 게 낭설임을 만천하에 밝힌 겁니다. 사람들은 얘기할 겁니다. 아, 두 사람이 마가의 자식이 맞구나. 저무는 줄 알았는데 역시 태양은 다시 떠오르는구나. 그것도 두 개나. 이제부터 마가의 시대구나. 뭐 그렇게 말이죠.”
청산유수다. 마일성은 흡족한 듯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했다.
‘누구보다 위상과 명예를 신경 쓰는 자가 바로 일장로 당신이니까.’
장이서는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물론 오늘의 대결 결과는 분명히 모두에게 알려질 겁니다. 하지만 칠소궁과 마가가 서로 침묵한다면 결과는 묻히고 마가에 대한 칭송만이 남게 될 겁니다. 양측 모두가 승자가 되는 것이죠.”
“흐음…….”
마일성의 입에서 진하게 침음성이 새어 나온다. 이는 이미 다 넘어왔다는 얘기.
“칠소궁을 소마전(小魔殿)으로 만들겠다고.”
드디어 본론이다. 이제부터는 머리가 아닌 자신감 싸움.
“예. 칠공자님이 소교주가 되실 겁니다.”
장이서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자신이 넘치는군.”
“그러려고 목숨 걸고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니까요.”
“마가 하나를 더 얻는다고 상황이 바뀌리라 생각하는가.”
“왜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마가가 시작입니다.”
마일성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장로들과 대주들은 대공자의 그늘에 깊숙이 스며 있지. 오룡당 당원들이 이공자를 환호하는 것처럼. 겉으로 드러난 관계가 없으니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거미줄로 얽힌 오랜 시간의 결과물이지.”
“아무리 공과 성이 들어가도 소교주가 되기 전까진 모두 모래성일 뿐이지요.”
“비바람 불지 않는 처마 밑에 세워진 모래성은 꽤 오래가고 튼튼하다네.”
“경천채도 허물어진 마당에 한낱 처마쯤이야 뭐 어렵겠습니까. 도와주신다면 해일이 되어보겠습니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 할까.”
“오늘 이룬 결과에 비하면, 오히려 말은 조금 부족한 편입니다.”
하, 마일성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발칙하면서도 맹랑하다. 오늘 이룬 결과가 뭐겠는가. 칠소궁이 마가를 쓰러트린 일이다.
패자가 승자에게 뭘 더 가르치려 들겠는가.
“과거 독마께서도 입을 한 번 열면 말릴 수 있는 자가 없었다지.”
그랬나. 하긴 보통 고집이 아니긴 하지. 장이서가 별다른 답 없이 웃음을 짓자 마일성은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그러곤 장고 끝에 나지막이 말했다.
“마가에서 먼저 칠소궁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걸세.”
됐다. 큰 고개 하나는 넘었다.
“하나, 그렇다고 같은 편이 되었다고 생각진 말게. 앞서 말했다시피 칠소궁이 보여준 건 가능성뿐이니.”
가만히는 있겠으나, 도와주진 않겠다는 얘기인가. 한마디로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겠다는 뜻.
이해도 갔다.
교내의 지지를 얻는다는 건 단순히 힘과 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의 신망을 얻을 만한 업적을 쌓아야 했다.
‘역시 쉽게 넘어오는 법이 없구나.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마가를 묶어놓은 것만으로 충분하다. 만일 적이 된다면 가장 큰 암초가 될 곳이었으니.’
장이서는 아쉬움은 금세 털어내고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오래 걸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지.”
두 사람의 진득한 눈빛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장이서에게 일장로라는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결말에 마의 역시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사는. 아직인 게요?”
독대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