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01)
첩자의 마교생활-201화(201/350)
201.
#부름에 응하라
뒤통수에 비수가 꽂힌 것처럼 골이 띵했다.
그거였구나.
내면의 세계에서 천마귀가 탐욕을 부리고 달려 나갔던 붉은빛. 그것이 바로 혈옥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에선 내기가 분탕을 쳤다. 천마귀도 어이가 없는데 혈마귀라니.
도대체 이 몸뚱이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제는 짐작도 되지 않는다.
눈을 질끈 감자 사숙이 달려와 부축한다.
“괜찮은 것이냐. 일단 더 쉬거라.”
“아뇨. 계속 듣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는 겁니까.”
4갑자의 공력을 가진 천마귀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한데 이제 10갑자에 육박하는 괴물이 되었다면, 이리 멀쩡한 게 더 이상한 일.
사숙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시원섭섭하게 답하였다.
“……그래서 천마인 것이다.”
정신이 멍해질 만큼 명쾌한 답이다.
천마이니까. 그가 살려준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다시 물음은 남는다.
어째서.
죽이려고 했다지 않은가. 하나 그에 대해선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제 앞에 저리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위대한 존재가 서 있었으니.
“그런 천마에게서 사숙이 절 구해주신 거군요.”
감사했다. 우연히 맺게 된 연이었으나, 아무 조건도 없이 전해지는 희생에 울컥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오래전 천마와 했던 약속이 유효했을 뿐이다.”
“……감사합니다. 사숙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침상에서 내려와 진심을 담아 절을 올렸다. 사숙이 말리려 했으나 고집을 피웠다. 허례는 없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게 도리어 죄송스러울 뿐.
“녀석…….”
사숙은 웃으며 일으켜 세워주었다. 별거 아니었지만 서로의 사이가 더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마주 웃고는 창가에 놓인 작은 협탁에 앉아 대화를 이었다. 서두는 간단했다.
“혈마귀를 보셨습니까?”
솔직히 체감이 잘 안되었다. 본래의 천마귀를 마주할 때도 압도적인 위압감에 주눅이 들었다. 그런데 이젠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니.
“보았다.”
“어떠하였습니까.”
“떨리더구나. 감히 나설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독마는 천마와 혈마귀가 경천동지할 접전을 벌일 때부터 이미 인근에 도달해 있었다.
단지 하늘이 찢기고, 땅이 터져나가는 신의 분노에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었던 것.
물론 장이서 입장에선 더더욱 상상되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어땠길래 천하의 독마가 떤단 말인가.
하나 이어진 말에 곧장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가 피를 흘리더구나.”
“……!”
“이해되느냐? 육신이 금강보다도 단단하고, 천잠사(天蠶絲)보다 촘촘해 신검으로도 베어낼 수 없는 자가 바로 천마다. 한데 그가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설마…… 제가 한 짓입니까?”
“혈마귀가 한 짓이지.”
“대체 무슨 약속을 했길래, 제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거죠?”
사숙은 농이라 생각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름 진지했다.
이 정도면 부관참시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 아닌가. 감히 천마의 몸에 손을 대다니.
“중요한 건 네 안의 혈마귀다. 지금은 잠시 봉해두었지만, 언제고 너를 비롯해 천하를 집어삼킬 수도 있다.”
들뜬 마음이 눌러지고, 걱정 어린 한숨이 삼켜졌다.
이제야 조금은 실감이 났다. 지금 가슴에 뭘 품고 있는지. 차라리 고독이 나았다. 그건 죽어도 혼자 죽지. 이건…….
“하지만 반드시 방법을 찾을 겁니다.”
“그래. 그리하면 되는 거다.”
사숙이 흡족한 듯 웃는다. 그러곤 본격적으로 해답을 논했다.
“방법은 두 가지다. 구규지체를 칠공(七孔)까지 막아 입신의 경지에 오르거나, 혈마귀에 현혹되지 않을 정도(正道)의 상승 심법을 익히는 거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가깝게 느껴지진 않는다. 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물 없이 걷는 것처럼.
그리고 방법은 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가 더 있다. 그것도 가장 가깝고 쉬운 방법.
‘천마, 진우광. 그를 찾아가는 거다. 누구보다 천마귀를 잘 알고, 또 이미 혈마귀로부터 구원해 준 그를.’
심장이 다시 들뜨기 시작한다.
그를 생각하면 늘 그러했다.
경이로웠고, 신기했으며, 떨렸다.
명실상부 당대의 천하제일인.
그를 만나면 날 죽이려고 할까. 아니면, 첫 만남에 그러했듯 또다시 길을 제시해 줄까.
예견되지 않는 결말에 감춰지지 않는 흥분이 얼굴을 상기시킨다.
“걱정되느냐.”
괜한 오해를 준 모양. 다정한 질문에 상념을 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선 심법부터 찾아봐야죠.”
“당분간은 마음을 비우고 휴식에 전념하거라.”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러다 혈마귀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바로 문제가 생길 거였다면, 진우광이 그리 쉬이 돌아서지 않았을 거다.”
하긴. 그도 그렇다. 머릿속이 정리되자 한결 후련하다. 한데…….
“아까부터 천마의 존함을 그리 막 부르셔도 되는 겁니까?”
“널 죽이려 하였다. 그런 자에게 공대를 하라는 것이냐?”
“아니, 저기 사숙. 천마신교 아닙니까. 천마에 대한 불경은 곧 죽음인 곳.”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사숙이 몸을 휙 돌리곤 걸어 나가며 말했다.
“……천마에 등극하기 전까지는 내가 위였다.”
푸하! 웃음이 터졌다. 하여튼 사숙도 참. 간신히 웃음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다녀올 곳이 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사숙은 곧장 문가로 향했다. 한데 내심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는 나지막이 불렀다.
“이서야.”
“예.”
“천마는 제힘을 확인하기 위해 사는 자다. 본교에 있는 네가 어찌 그를 멀리할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최대한 멀리하거라. 또한 네 사부에 대해서도 반드시 함구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
섣불리 답을 하지 못했다. 진심 어린 저 목소리 너머에 다른 사연이 느껴졌기 때문.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겠다.
사숙은 단순히 천마를 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오랜 벗에 대한 경계에 가까워 보였다.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독마와 천마의 사이를 이리 갈라놓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그사이에는 사부가 있을 것이다.
궁금했다. 이들의 관계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왜 답을 하지 않는 것이냐. 약조하거라.”
사숙이 돌아선다. 흔들리는 눈빛. 무엇이 그리 불안하신 겁니까.
“사숙.”
“왜 그러느냐.”
“죄송하지만, 약속은 어렵겠습니다.”
“어째서……!”
“대신 무슨 일이건 천마전과 연루된 일은 두 번, 아니 세 번은 생각하겠습니다. 그거면 안 되겠습니까?”
독마의 주름이 깊어진다. 하나 오래지 않아 얕은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이서가 누구인가.
구규지체를 지닌 천재이자 천마신공에 불사독마공까지 통달한 괴물 중의 괴물이다.
그런 존재를 자신의 잣대로 묶어두는 것은 오히려 독.
“알겠다. 하나 명심하거라. 천마는 네가 겪어온 그 어떤 자보다도 가장 위험하고 정점에 선 포식자라는 것을. 그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강해져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그가 떠나간다.
“다녀오십시오, 사숙.”
포권을 취한 채 그를 배웅했다.
*
독마가 떠나가고, 장이서는 한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몸에 이상이 있음을 알고도 무작정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
‘대주천부터 시작하자.’
호흡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했다.
본래 대부분의 심법은 호흡을 통한 토납법(吐納法)에 근간을 둔다. 하지만 장이서의 기(氣)는 의념으로 다루는 천마기와 불사독. 부차적인 건 필요치 않다.
잠들기 전 수를 세어보듯, 차근차근 단전을 연상했다.
두 종류의 물이 흐르는 고요한 호수.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하나뿐이다.’
우우웅!
공명음과 함께 짙은 흑색의 천마기가 유영하듯 첫 번째 구멍을 통과해 용이 승천하듯 복부를 지나 머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슴 사이 전중혈에 이르자 비경, 신경, 소장경, 삼초경으로 기운이 퍼진다.
이윽고 십사경맥을 거쳐 전신에 스르륵 녹아내리는 천마의 기운.
온몸에 거력이 가득 채워진다. 배부른 것만큼 익숙한 기분.
그런데 이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확실히 뭐가 있긴 있구나.’
천마기가 유독 심장 부근에 이르면 사라져 버리는 것.
하지만 명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기로 체내를 확인하는 건 눈을 가린 채 손끝으로 상상하며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
‘자세히 알려면 다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뿐인데…….’
말이 쉽지, 실로 허황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외면이야 눈으로 보면 끝이지만, 내면을 어떻게 들어가 확인한단 말인가.
“후…….”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예상은 했지만 막연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한다니.
만일 천마귀의 부름에 직접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면, 망상이나 허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생각하면 할수록 뜬구름같은 일.
“역시 천마를 만나는 것뿐인가.”
아무래도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대체 진우광이 사숙과 사부와는 어떤 관계였는지. 대체 뭘 약속한 것이길래 혈마귀까지 품은 저를 살려둔 것인지 말이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칠소궁은 조용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풀벌레와 새소리가 전부.
창가로 걸어가 내려다보자 마오가 머무는 안채도 문이 닫혀 있다.
구유가 머무는 옆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인기척이 없다.
“다들 어디 간 거야?”
텅 빈 칠소궁에 의아함을 느끼던 때였다.
“음?”
몸을 돌려 우연히 맞은편을 살피자 문틀에 미세하게 파인 자국이 보였다.
너무 작고 흔한 일이니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장이서는 암각 최고의 요원.
최소한 별관 안에선 작은 흠집마저도 그가 모르는 건 없어야 했다. 게다가 쓰지도 않는 방.
‘사숙인가? 하나 저건 분명 칼자국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 다가가 손끝으로 위에서부터 천천히 문틀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점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二), 사(四), 칠(七).’
숫자다. 이는 숫자를 나타내는 암어였다. 그것도 너무나 익숙한 무림맹의 암어!
대체 무림맹의 흔적이 왜 여기…….
안색을 굳히고 끼익 문을 열었다.
그러곤 빠르게 눈으로 바닥의 석판을 좇았다. 우측으로 둘, 위로 넷. 그리고 다시 좌측으로 일곱.
‘저거다.’
드륵!
이어 다가가 해당 석판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서신 한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암각(暗閣)】
그들이었다. 자신을 보낸 무림맹의 비밀결사대!
마오를 소교주로 만들라는 첫 번째 임무 이후 다시 밀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곤륜산 연천산장(連天山莊), 이달 그믐. 103호는 부름에 응하라.】
무려 14년 만의 재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