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27)
첩자의 마교생활-227화(227/350)
227.
#천산을 떠나다
늦은 밤.
장이서는 칠소궁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놀랍게도 우사 흑야가 동행했다. 천마가 그를 배려해 준 것.
덕분에 오는 길은 순탄했다.
“…….”
둘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원래 흑야는 과묵한 편이었고, 말하는 것보단 묵묵히 상대를 관찰하는 데 더 익숙했다.
그런 그가 본 장이서는 정말 또다시 그의 의심병을 불러일으켰다.
눈빛은 죽어 있고, 짙은 어둠이 느껴졌기 때문. 마치 본교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부교주 자리를 거절한 것도 실로 이상하지 않은가.
끼이이이익!
하지만 칠소궁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속단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죽어 있던 눈빛은 이 순간을 위해 그래왔던 것처럼 총명해졌고, 생기가 가득해졌으니.
“밖에서 기다리지.”
흑야는 희미하게 웃고는 문밖에 대기했다.
그리고 장이서가 칠소궁 안으로 걸음을 들이자.
“장 보좌님…….”
누구보다 든든한 내 편, 홍란.
“흐어어엉, 형님!”
“죽는 줄 알았지 말입니다!”
이제 왈패의 티를 조금 벗어낸 용태와 메기.
“장형, 출세했다며!”
속물이지만, 그래도 벗 소오.
그리고…….
“끌끌, 스승님. 이서가 왔습니다.”
“왔느냐.”
마의 형님과 독마 사숙까지.
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미리 보내놓은 전서구 하나에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기다림에 감사했고, 또 무사함에 기뻤다.
“저 왔습니다.”
그리고 장이서는 식구들과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비룡당에 붙잡혔던 이야기부터 어떻게 풀려나오게 됐는지. 또 뭘 먹었고, 어떻게 밤잠을 견뎠는지.
그렇게 평범하진 않지만, 소박할 수는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물론 이번 사태의 결말도 빠져선 안 될 얘기.
“근데 대공자가 가만히 있을까요?”
홍란의 걱정 어린 물음에 장이서는 픽 웃고는 염려 놓으라는 듯 편히 답했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거다. 앞으로 일 년간은.”
왜냐하면 지금쯤 광명좌사 백야가 도착했을 테니까.
*
*
*
– 천가(千家) 신월당(神月堂).
후사를 위한 작당 모의 중이던 대공자 천무기와 사공자 한. 그리고 이장로 천오산은 눈이 부릅떠졌다.
새하얀 의복의 손님이 귀신처럼 방 안에 불쑥 나타났기 때문.
“과, 광명좌사?!”
“문도 안 열렸는데 대체 어디로…….”
그게 중하겠는가. 이게 중하지. 좌사가 교지(敎旨)를 길게 쫙 펼치며 말했다.
“교주님의 명을 전하러 왔다. 일소궁을 일 년간 봉문하고 근신에 처한다.”
“그게 무슨……!”
“이를 어기면 참할 것이고, 도와도 참할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난 대공자다. 소교주가 될 대공자란 말이다-!”
천무기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하나 어쩌라는 건지.
본교에서 패배자는 유구무언이어야 하는 법.
“분명히 전하였습니다. 따르기 싫다면 그리하셔도 됩니다. 다만 그땐 제가 다시 찾아올 겁니다. 교지가 아니라 구도(歐刀-죄인의 목을 베는 칼)를 들고서.”
좌사는 무섭게 할 말을 뱉고는 다시 귀신처럼 사라졌다.
사공자는 문득 장이서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네가 잡은 그 줄. 대세 아니고 패세(敗勢)야. 내 말 명심해.’
그것도 아주 얄밉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고 앞을 바라보자 대공자는 넋을 잃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장이서…… 장이서어어어어어어-!”
그리운 임의 이름만을 사무치게 부르며.
*
*
*
“하하하!”
우중충한 천가와 달리 칠소궁은 새벽녘까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도 대공자는 그 정도로 끝난 걸 천만다행으로 알아야 할 게다. 스승님께서 미리 아셨다면…….”
마의가 슬쩍 독마를 살피자 근엄하게 차를 삼키며 나직이 답했다.
“지금 알았다고 달라질 것 없다.”
이해하면 너무 무서운 이야기지만, 다들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일행은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돌아가고, 어느새 여명이 떠오를 무렵.
마침내 장이서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천마의 명인 것이냐.”
옷깃을 여미고, 별관을 나와 뒤를 돌아보자 이젠 예전의 멋을 되찾은 독마가 서 있다.
여전히 마르긴 했으나, 병환 때문이 아니라 날카로운 그만의 멋으로 느껴진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밖에 광명우사까지 데리고 올 이유는 없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저리 큰 그림자가 대나무숲을 전부 드리우는데 모를 수가 있겠느냐.”
솨아아아아!
그의 말에 장원 밖의 대나무 숲을 살폈다. 장이서 눈엔 보이지 않으나, 독마는 보였다.
해가 떠오르고 있음에도 어둡기만 한 숲의 전경이.
우사의 성명절기인 암영귀혼공 여파다.
아마 지금쯤 숲속 어딘가 대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
반대로 우사가 느끼기엔 이곳 칠소궁에 지독한 독무가 퍼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입신지경에 오른 괴물들의 시선.
한데 그리 잘 알면서도 서로 인사조차 안 하는 걸 보면 사이가 썩 좋진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장이서의 대답에 독마는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두 눈엔 걱정을 담고 있음에도 그랬다. 무한한 믿음. 아마 그런 것일 거다.
“걱정하실 일 없도록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습니다.”
장이서는 고마운 마음에 다가가 독마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더 고맙고 미안해질 말을 꺼낸다.
“이곳의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나와 마의가 지켜줄 것이니.”
“사숙…….”
“네 사람이라면, 내 사람이기도 하다. 교주가 널 지켜주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
장이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에게서 죄책감이 묻어나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
하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받거라.”
그는 품에서 금빛으로 곱게 포장된 환약을 꺼내 건넸다.
“이게…… 뭡니까?”
“만년설삼으로 만든 영단이다. 다룰 심법도 같이 찾아서 줘야 하겠지만, 시간이 없었구나.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주저 없이 쓰거라. 도움이 될 게다.”
“아…….”
장이서의 입에서 탄식이 뱉어졌다. 가슴 속에 뭉클함이 크게 일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감사……합니다.”
“가족끼리는 그런 인사 하는 거 아니다.”
가족. 그렇구나. 이건 가족이구나. 아낌없이 모든 걸 줄 수 있는 존재. 말하지 않아도 내 편이 되어주는 존재.
장이서는 또 한 번 가족의 마음을 느꼈다.
‘마오를 소교주로 만들고 나면…… 이 또한 끝나는 것인가?’
또다시 알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이 용솟음친다.
하지만 사숙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그저 진심 어린 미소만을 가득 피웠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사숙.”
독마의 사나운 팔자 주름이 지워지고 다정한 미소가 서렸다.
*
장이서는 그렇게 이틀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밤이 되어 천마전으로 돌아왔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해준 흑야에게는 따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부교주 위를 거절한 것에 후회는 없는 것이냐.”
“전혀 없습니다.”
신기한 놈. 우사는 보이지 않게 피식 웃고는 무심한 듯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네가 거절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천가를 비롯한 장로들은 이제 널 다르게 주시할 것이다. 수많은 시험이 따르겠지. 그러니 돌아올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와야 할 거다. 본교는 그런 곳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저 방 안에 지존께서 네게 내리신 것이 있으니 채비하고 알현하거라.”
방을 가리키고 무심히 떠나가는 흑야를 보며 장이서는 훈훈한 웃음을 짓고는 끝까지 포권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방 안 한가운데. 장식대 위에 가지런히 접힌 옷가지와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짙은 흑색이라 크게 호화스러움은 없었으나 옷깃엔 화려한 문양이 들어가 근사한 멋을 자아냈다.
신까지 갈아 신자 어느새 자리엔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장이서가 나타났다.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단순히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풀어진 머리칼에 총명함과 고수의 기운이 갈무리된 눈빛.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허리를 굽신거릴 자태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게 신기할 지경.
과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환골탈태다.
그렇게 장이서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천마가 기다리는 정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원으로 떠난다는 게 사실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진 않았다.
천산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14년.
언제고 다시 돌아갈 날을 꿈꾸었고, 수많은 모습을 상상했었다.
금의환향하는 문관. 상처뿐인 무장. 황금마차를 탄 거부. 외롭고 쓸쓸한 이방인.
한데 천마의 밀명을 받고 가는 처지라니.
하지만 가야 할 이유는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했다.
‘혈교. 너희가 뭘 꾸미고 있든 철저히 부숴주마.’
그러니까.
“왔느냐.”
떠나는 거다.
“신 장이서. 지존의 명을 받아 청해로 가 능가경을 회수해 오겠습니다!”
달 밝은 어느 날.
장이서가 천산을 떠났다.
천마의 밀명을 받고서.
* * *
– 일소궁 흑화원.
불꽃의 문양이 그려진 일소궁의 문짝마다 새하얀 종이가 비스듬히 붙었다.
얼핏 보면 춘첩자처럼 보이지만 적힌 글귀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이 아니라 일벌봉문(一罰封門), 이벌즉참(二罰卽斬)이다.
쉽게 말해 일 년간 쥐 죽은 듯이 얌전히 지내면 봉문으로 끝나지만, 더 까불면 그 목부터 잘라버리겠다는 뜻.
실로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글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매일 같이 이 앞을 지나는 이공자 무한성에게는 실로 만족스러운 문장이었다.
“크하하하하! 일벌봉문 이벌즉참이라. 야, 이거 나 같으면 쪽팔려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겠는데. 안 그래, 조 보좌?”
“후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원래 내가 여기만 오면 체한 거 같았거든? 근데 이젠 너무 기분이 좋아. 이젠 안 오면 서운해. 하하하!”
담장은 낮은 건지, 그들의 목소리가 큰 건지. 자존심이 하늘에 닿은 천무기는 매일을 분노에 부르르 떨어야 했다.
심지어.
“이딴 걸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냐!”
챙그랑! 내던진 수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차려진 상에 올라온 건 그야말로 풀떼기뿐.
그나마 그의 것이 좀 더 많았다. 그 앞에 이 열로 길게 마주 앉은 흑화위의 앞에는 그보다 반도 안 되는 양의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곳간이 동났으니 별수 있겠는가. 주는 대로 먹어야지.
천마가 내린 엄벌은 그런 것이었다.
찬란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도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벌레처럼 구차하게 숨만 쉬고 있어야 하는 것.
“장이서 이 쳐 죽일 놈! 내 반드시 네놈을 죽여 없앨 것이다. 반드시!”
대공자의 진심 어린 노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죄를 뉘우치기 전까지 벌은 끝난 게 아니라고.
“커흑!”
“꺼어억…….”
쿵! 식사를 하던 흑화위 무사들이 거품을 물고 상 위에 머리 박고 쓰러진다.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천마가 내린 엄벌.
“무, 무슨……!”
이제부턴 독마의 차례다.
“으아아아아아악!”
천무기의 비명이 오래. 아주 길게 울려 퍼지는 어느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