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3)
첩자의 마교생활-23화(23/350)
23.
“원하는 걸 말해라. 잘했으니 답례를 주지.”
사해령이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솔직히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보좌인 나락에게도. 그냥 장이서란 녀석이 악조건 속에서도 조금씩 헤쳐 나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그래서 뭐라도 주고 싶어 미약한 용기를 내어 말한 것.
“글쎄. 말하면 뭐든 다 주나?”
의미심장한 질문. 사해령이 눈빛에 무게를 담고는 대꾸했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지. 하지만 책임질 자신이 있다면 못 줄 것도 없다.”
“듣기 좋네. 원래 난 위험한 걸 좋아하지. 근데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정말 필요해지면 그때 얘기하마.”
“빚을 달아두겠다는 건가. 썩 달갑진 않아. 하지만 먼저 말을 꺼냈으니 이번만 들어주겠다.”
“오, 화통한데.”
사해령이 코웃음을 치곤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스스로 술잔을 따른 뒤 다시금 비웠다.
이를 보며 장이서는 참 대단한 여장부라고 생각했다. 보통 사내들이 마셔도 오래 버티기 힘든 독한 화주거늘. 내공으로 독기를 날린 것도 아닌데 술술 넘긴다.
사해령은 그렇게 몇 잔을 더 넘기더니 대뜸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아까 그 루주와는 무슨 사이지?”
누구. 홍란이? 많이 마셔서 그런가. 턱을 괸 채 고개 돌린 모습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다.
“뭐, 가려운 데 긁어주는 그런 사이?”
“흥, 사내들이란…….”
“설마 질투해?”
불쑥 던진 질문에 사해령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지그시 장이서를 바라본다. 그러곤 살며시 입을 열었다.
“……이곳 천산에선 여인이라 해도 힘이 있다면 열 사내를 거느릴 수 있지. 그러니 궁금하면 계속 물어봐. 너 하나 잡아 벗기는 건 일도 아니니.”
“와…….”
“무슨 반응이지?”
“너무 무서워서 할 말을 까먹었어.”
“흥, 너 같은 사내는 내게 별것 아니라는 얘기다. 쓸데없는 오해는 치워라.”
그래. 그래 보이네. 장이서가 어깨를 으쓱이고 술을 훅 털었다. 그러자 사해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게?”
“오래 있었다.”
진심이었다. 이리 술자리에 오래 있어 본 것 자체가 기억에 가물가물할 정도. 늘 바쁘게 치여 사는 터라 더 그렇다.
장이서가 마주 일어나 배웅하려 하자 됐다며 손을 들고는 계단 앞에 서서 말했다.
“교주님께선 자제들과 한 번씩 독대로 조찬의 시간을 가지신다. 일종의 정례회지. 그리고 보름 뒤는 칠공자의 차례. 알고 있었나?”
“음.”
장이서는 대답 대신 침음을 뱉었다.
알고는 있었다. 교주 진우광이 양자녀들과 시간을 갖는다는 것. 하지만 말이 조찬이지, 그간의 성과를 평가하고 가르침을 내리는 중대 행사다.
당연히 첩자로서 적장의 공식 행사를 모른다는 건 명백한 업무 태만.
“아니, 몰랐어.”
하지만 장이서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에 사해령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먼발치의 마오를 바라보며 답했다.
“말하지 않았겠지.”
표정을 보니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또 있는 건가. 설마 교주와의 조찬마저 도망 다닌 건가? 그건 정말 막장인데. 장이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걱정은 마. 반드시 참석할 거니까.”
다른 것이면 모를까, 이제 천마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내심 그와 만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천마 진우광.
명실상부 당대의 천하제일인.
첩자를 떠나 무림인으로서 그에게 관심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리라.
한데.
“가지 마라.”
그녀의 입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 뱉어졌다.
“가지 말라니?”
“차라리 폐관 수련에 들어 다음 기회로 미루라는 뜻이야.”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봐.”
“간다고 다 교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천마전의 문을 직접 열어야 한다. 그리고 칠공자는 유일하게 여태 단 한 번도 그걸 연 적이 없고.”
“뭐?”
이게 무슨 소리인가. 문을 연 적이 없다니. 그럼 교주와 독대로 대면한 적이 없다는 소리?
너무 황당해 그녀를 바라보자 말끝을 흐리며 우려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만일 칠공자라는 감투마저 없다면 마오는…… 살아남기 힘들겠지.”
허. 장이서의 입에서 헛숨이 뱉어졌다. 박탈이라니. 그건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나 아무리 그녀를 살펴도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그럼.”
저벅, 저벅.
사해령이 계단을 내려가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장이서는 넋이 나간 얼굴로 저 아래서 속 좋게 춤추고 있는 마오를 살폈다.
“천마전의 문을 연 적이 없다고? 왜.”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다음 임무는 천마 진우광이 주최하는 정기회.
그곳에 마오를 참석시키는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
성대한 잔치가 끝이 나고, 다음 날.
촤아아악!
장이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칠소궁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런데 맑았던 어제와 달리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쉽게 그칠 마음은 없는지 그 소리가 꽤 시끄럽다.
“쩝쩝…….”
하나 마오는 여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이를 보며 장이서가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졸리겠지. 마오는 끝까지 교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게 참 대견했다.
이게 판 깔아준다고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마교의 똥만 찬 웃대가리들은 저들이 말 섞어주는 것만도 대단한 아량으로 여겼다.
‘그런 면에선 차라리 이 녀석이 더 낫다고 해야 하나.’
적어도 마오는 망나니일지언정 상대를 급으로 나누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오늘은 네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진 깨우지 않으마.’
장이서가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 물러섰다.
“으…… 푸…… 푸푸……! 악! x발! 너, 너 뭐야! 아니, 창문은 왜 열어놔. 이 미친놈아! 얼굴에 비 다 튀잖아!”
비를 막아준다고는 안 했다.
“저랑 얘기 좀 하시죠.”
*
장이서와 마오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본래 값비싼 명화(名畫)부터 온갖 장식들이 즐비한 접객실이었지만, 지금은 전부 내다 팔아 꽃 화분 몇 개만 남고 휑했다.
“왜 얘기하지 않으신 겁니까.”
잡설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 물론 마오 입장에선 어리둥절이다.
“뭘.”
모른 척을 하시겠다. 장이서가 눈을 매섭게 올려 뜨곤 툭 던졌다.
“보름 뒤, 교주님과의 조찬 말입니다.”
듣자마자 얼굴색이 굳는다. 저도 내내 마음에 걸리긴 했던 모양이다.
“……내가 일일이 말해야 해?”
“당연히 그럴 필요 없죠. 알아내는 건 내 일이니까.”
“근데 뭐가 문제야.”
“한 번도 천마전의 문을 안 열었다면서요. 그건 말을 해줘야지. 왜. 이번엔 나까지 망신 주고 올 생각이었어?”
“그건……!”
마오가 입을 오물거리다가 눈을 부릅뜨며 따졌다.
“근데 너 왜 자꾸 반말이야.”
“내가 언제. 그리고 논지 흐리지 마십시오. 대체 문을 왜 안 연 겁니까? 밥 먹기 싫으세요? 아침이라 입맛 없어요? 며칠 굶어 볼래요?”
“야!”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마오가 살기등등한 기세로 벌떡 일어섰다. 하나 상대는 장이서. 야? 덩달아 벌떡 일어나 눈을 아래위로 흘겼다.
그러자 마오가 한숨을 크게 뱉더니, 고개를 휙 돌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안 연 거 아니거든?”
“그럼.”
“못 연 거다.”
“그러니까 왜요. 누가 못 열게 막습니까?”
“아니? 여는 법을 모르니까 못 열지.”
“뭐라고?”
“문 여는 법 모른다고!”
장이서가 눈을 서너 번 깜빡였다. 지금 잘못 들은 건가. 문을 여는 방법은 간단하다. 옆으로 밀거나, 앞으로 밀거나. 혹은 당기거나. 보통 이런 걸 세 살배기도 하는 일이라고 하는 거다.
“거기 문 여는 거 어려워.”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좀 맞으면 쉬워지나.
“와 봐요. 가르쳐 줄게.”
장이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살기를 발출하며 성큼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마오가 화들짝 놀라며 빽 소리 질렀다.
“몰라! 진짜 모른다고, 이 새끼야!”
“그러니까 가르쳐 준다고!”
“아니, x발! 누가 문에다가 이상한 수작을 부려놨다니까? 그 문이 아무리 밀고 당기고 지랄해 봐도 안 열린다고!”
“뭐……?”
장이서가 놀란 얼굴로 멈춰 서자 마오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울상을 지은 채 말했다.
“나라고 밥 안 먹고 싶은 줄 알아? 그리고…… 뭐는 반말이야, 개새끼야.”
장이서는 미간을 좁혔다.
천마전.
도대체 그 안에 뭐가 있는 것이냐.
텅!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
천마전(天魔殿).
천마가 거주하는 천산의 중추.
세상의 모든 음모가 태동할 것만 같은 이곳에 대해선 아는 자가 극히 적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제갈소미가 조부인 천하제일뇌 제갈상에게 천마전이 어떤 곳이냐 물었더니 먹구름 위에 있는 곳이라 답했다.
무슨 말이냐면 볼 수도, 닿을 수도 없을뿐더러 알려 하면 벼락만 맞는단 얘기.
그만큼 첩자가 판치는 작금의 시대에도 천마전은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교 생존 14년 차인 숙련 첩자 장이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임에도 예까지 걸음 했다.
【제갈서관(諸葛書館)】
장이서가 아는 자 중에선 마교에 가장 해박하고 접근이 쉬운 자다. 그라면 마오가 말한 그 문의 정체를 알지도 모른다.
끼이이익.
“주인장 있으신가.”
장이서가 문을 열자 허름한 서관의 습한 냄새가 먼저 그를 반겼다. 이내 피풍의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밖에 털어내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제갈량을 연상시키듯 윤건을 쓴 중년 사내가 탁자에 팔을 괸 채 눈 감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제갈귀룡. 이곳 주인이자 본명은 방가의 아들 방귀룡.
“자는 거요?”
툭툭. 장이서가 다가가 탁상을 두드렸다. 미동도 없다. 쥐 죽은 듯이 자는 게 업어가도 모르겠다.
“흐음. 안 자는 거 같은데.”
장이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암각 최고의 요원. 이 정도 판별은 일도 아니다.
숨소리는 곱고, 드문드문 목젖이 꿀렁인다. 곤히 자면서 침만 저리 잘 삼킬 수가 있나. 당연히 없지.
더구나 본래 돈 욕심이 과한 양반들은 잠이 적고, 귀가 밝다. 예민하니까. 내가 그렇다.
“자는 척 그만하고 일어나지?”
장이서가 톡 쏘아붙이자 느닷없이 잠꼬대를 뱉으며 아예 털썩 고개를 파묻고 엎드렸다.
“밤샘…… 작……업……. 피로…….”
“뭐라는 거야. 왜 이러는 건데. 나야. 장이서.”
장이서가 제갈귀룡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손 치우라는 듯 되려 그의 어깨가 들썩인다. 황당해서 손을 떼고 눈을 깜빡였다.
‘이 인간 뭐야. 설마 일부러 이래?’
뒤돌아봐도 아무도 없고. 지금 자신을 멀리하는 게 분명했다. 자그마치 7년을 이용한 단골한테 이래도 되나.
괘씸함에 그의 후두부를 물끄러미 살피다 품에서 말발굽 모양의 은원보(銀元寶) 하나를 툭 내려놓았다. 무게가 두둑한 게 하나에 은자 4, 50냥 정도다.
“썩……. 물러가…….”
그래? 척. 그럼 여기 하나 더.
“썩……. 음…….”
입질이 오나. 제갈귀룡이 이번엔 움찔한다.
“이번에도 안 일어나면 그냥 갈 것이오.”
장이서가 차갑게 말을 뱉곤 척! 마지막 하나를 더 올렸다. 무려 은원보 3개. 이 정도면 엄청난 돈이다.
잠시 후.
슥. 제갈귀룡의 주름진 손이 은원보를 쓸어 품으로 갈무리했다.
푸하! 개가 똥을 끊지.
#앞만 보고 가는 겁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