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32)
첩자의 마교생활-232화(232/350)
232.
#동등한 존재
처음엔 인지하지 못했으나, 자세히 살피니 멀쩡하던 사물들에 기이한 자국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파인 듯한 모양도 있었고, 굵직하게 그어진 실금도 있었다.
마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처처럼 말이다.
이내 다시 천궁의 힘을 거두자, 보이던 자국들은 사라졌다.
“설마, 약점이라도 되는 건가.”
비슷했다. 정확히는 사기(死氣)가 보였던 것.
독이란 원천적으로 생기가 부족한 곳으로 파고들어 주변을 병들게 한다. 불사독마공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런 것이었다.
장이서는 이쯤 되자 문득 두려움이 느껴졌다.
천마신공이 파괴의 극이라면 남천능가경은 보완의 극.
“이런 무공을 만든 달마 당신은…….”
새삼 그의 존재가 터무니 없이 멀고 거대하게 느껴진다.
어쨌든 그저 혈마귀를 만나려고 했던 것뿐이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깨우치게 되었다.
“천궁 천마안(天魔眼)과 독마안(毒魔眼)이라 불러야겠구나.”
마(魔)라는 글귀가 당연히 내킬 리 없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닿을 수 없는 힘이었으니.
천마안은 기의 속성과 흐름을 읽으며 절대적 시간을 느리게 만든다.
이는 일촉즉발의 상황일수록 위기를 타개하는 데 유용할 터.
반면 독마안은 사기를 읽게 되었으니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는 데 효율적일 것이다.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마음에 든다.
천궁을 깨우쳤으니 진짜 실전은 이제부터.
우우웅!
다시금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했다.
아까와 다를 건 없다. 다만, 이번엔 바깥이 아니라 내면에 천마기의 파동을 일으키는 거다.
『남천능가경(南天楞伽經) 천궁(天宮) 천마안(天魔眼)』
핑!
그러자 그 순간, 끝없는 무저갱 속을 추락하는 기분과 함께 머릿속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흐트러지면 안 된다.
견디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
두뇌가 팽창하듯 돌아가고, 인지와 수용이 극에 달한 그 순간!
화르르륵!
지독히 어두운 공간에 떨어졌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상상도 할 수 없는 크기의 흉포한 붉은 마귀!
[퀴아아아아아-!]드디어 혈마귀와 마주하게 되었다.
장이서는 순간 당황에 빠졌다. 열기가 정수리까지 차오르고, 두 눈이 충혈되며 심장은 간질간질했다.
‘이게 이 녀석의 지금 감정인가……!’
살의(殺意)였다.
일순 다 찢어발기고 싶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것.
오죽하면 고개를 떨궈 바라본 제 팔뚝의 살점까지 뜯어내고 싶었다.
이는 곧 혈마귀가 지닌 감정을 고스란히 감응한 결과였다.
‘혈마귀한테 잡아 먹힌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왜 혈마귀가 숙주보다 강하면 안 되는지 잘 알겠다.
이건 자의인지 타의인지 분간도 안 될 만큼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
하지만…….
‘마귀 따위에 당할 것 같으냐!’
우우웅! 장이서의 심장부에 녹색의 기운이 서린다. 항마력을 드높여 주는 남천능가경 심궁의 힘이다!
정신이 지독한 마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퀴아아아아아!]혈마귀는 가소롭다는 듯 기세를 더 피워 올렸다.
그럴 때마다 장이서의 두 눈엔 핏발이 곤두서고, 입가는 살귀처럼 올라갔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듯 달마 조사의 정기가 담긴 남천능가경 역시 더 강렬해졌다.
‘이 몸의 주인은 나다. 내 의지는 내가 정한다. 그러니 넘보지 마라-!’
장이서의 안색이 마귀 앞에 선 호법신처럼 변모한다.
그렇게 상태가 호전됐다가 다시 지독한 살귀로 변모하기를 수차례.
고오오오오!
두 사람의 기세전이 완전히 극한까지 치닫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천지가 진동한다.
이윽고……!
콰아아아앙!
혈마귀의 몸에서 거대한 화염 폭발이 치솟았다.
“……!”
이에 눈길 하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하는 장이서.
화르륵!
이내 타닥거리며 조금씩 불길이 사그라든다.
‘너는…….’
그러자 태산 같던 혈마귀의 몸집은 점점 작아져 어느새 장이서와 눈높이를 맞췄다.
또한 지독했던 살의 역시 거두어졌다.
‘나를 인정한 거냐?’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이 살의가 아닌 순응으로 바뀌었음을.
드디어 장이서가 혈마귀와 동등한 존재로 바로 선 것이다.
‘이것이 천마가 말했던 널 직접 마주하는 것…….’
내면의 세계에 고요함이 깃들었다. 장이서는 혈마귀에게 다가섰다.
‘넌 이리 생겼구나.’
온통 시뻘건 불꽃으로 일렁이는 마귀.
분명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장이서는 마치 동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혈마귀를 다룬다는 건 어쩌면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장이서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리자 혈마귀도 동경에 비춘 것처럼 똑같이 행동했다.
이내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 순간.
화르르륵!
불꽃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등 뒤에 엄청난 기운이 자리를 잡고…….
[퀴아아아아악!]혈마귀와 장이서는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
“후…….”
다시 눈이 떠졌다.
어두웠던 방 안은 어느새 여명을 맞이했다.
그새 하루가 또 지난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아무 일도 없이 그저 명상에 잠겼던 것처럼 보이겠지만, 장이서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남천능가경 천궁을 개안했고, 그로 인해 천마안과 독마안을 터득했다.
그리고…….
화르륵!
의지만으로 등 뒤에 자리한 붉은 마귀.
“이것이 혈마귀의 힘……!”
두 손을 앞으로 모으자 서려 있는 불꽃의 기운이 분명히 시야에 담겼다.
이걸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마치 신검을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한 번만 휘둘러도 이 객잔 전부를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투기.
일순 살욕이 치밀고, 어둠의 기운이 용솟음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퀴아아아악!]화르륵!
혈마귀가 가소롭다는 듯 포효를 지르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텅 비어버린 천마기.
온종일 달리고 지친 기분이다.
“내력과 심력 소모가 감히 상상도 못 할 수준이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지금 장이서가 가진 혈마귀는 그 힘만 10갑자에 육박하는 괴물.
그런 힘을 고작 초절정도 넘지 못한 몸으로 쓰려고 하니 찰나도 못 버틸 수밖에.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을 위한 구명절초로구나.”
헛웃음이 뱉어졌다. 단 한 번만 써도 기력이 방전되는 힘이라니.
하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적어도 적아린한테 한 방 먹여줄 비장의 수 하나는 생긴 것이니.
장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창을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손님 맞이하기 딱 좋은 날씨.
그리고 일다경쯤 지났을까.
“너, 이 새끼-!”
벌컥 문이 열리고, 성난 그녀가 반갑게 인사하며 들이닥쳤다.
비룡당주 묘채경이다.
“며칠이 지났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 일은 일대로 시켜놓고 두문불출하면 어쩌자고?!”
“기다리신 겁니까?”
“그럼 안 기다리게 생겼느냐? 네놈 창문 열리는 것만 종일 쳐다보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임무의 성공은 인내와 기다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
비룡당주라 그런가 확실히 첩자의 기본은 있는 여자다.
“수련에 빠져 시간이 흐른 것도 몰랐습니다.”
“수련?”
묘채경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이야기를 듣고 방 안을 다시 살피니 음산한 기운이 잔뜩 느껴졌다.
‘일전에는 대종사의 기세가 느껴지더니, 이제는 오한이 들 만큼 지독한 마기가 느껴지는구나. 대체 네놈은 무슨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냐?’
아무리 마교가 잡식이 기본이라지만, 알수록 이해가 안 가는 놈이었다.
물론 그 진짜 정체를 알면 기절했겠지만.
어쨌든 그녀로서는 지금의 장이서는 상당히 낯설었다.
지난번 대공자와의 대결을 벌일 때도 대단하다 여겼지만, 갈수록 더 강해지는 느낌.
‘그러고 보면 이놈이 무공까지 뛰어나지면 이길 자가 있기는 한 것인가.’
덜컥 치솟는 두려움.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뭐, 수련 중이었다면 잊었을 수도 있지.”
“이해해 주니 감사하군요. 그럼 일 얘기로 넘어가죠.”
“그, 그래.”
묘채경이 고개를 끄덕이곤 열린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살핀 뒤 문을 닫았다.
뒤이어 장이서가 먼저 입장을 밝혔다.
“우선 청해지부를 만나봐야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지부장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근데 문제가 생겼다.”
“예?”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어이가 없어서 되묻자 묘채경은 자신이 패검문에서 보고 들은 걸 그대로 이야기했다.
지부장은 이미 주화입마에 빠져 생사가 위태롭고, 허 총관이라는 자가 배신을 획책 중이라는 것까지.
“뭐, 차라리 이대로 지부장이 사라지고 소문주를 키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도통 말을 들어 먹질 않는 자이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뭐가 문제더냐.”
그렇게 묻는 네가 문제다. 장이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지금 소문주는 어디 있습니까.”
“흑사방에 잡혀 갔다.”
가관이네.
“그것도 안 막고 뭐 한 겁니까?”
“내가 왜 막아. 어차피 잘된 일 아니냐. 새로운 주인이 될 네가 기적처럼 구해주고. 그렇게 연을 쌓는 거지. 낭만 있게. 고마워하거라. 오호호!”
“그래서 언제 잡혀 갔는데요.”
“이틀 전.”
이런 미친! 죽고도 남았겠다!
“어딥니까, 거기가.”
* * *
“끄으…….”
멀끔히 집기가 치워진 객실 안.
만신창이가 된 채 쓰러진 사내에게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성질머리가 가득해 보이는 빼어난 용모.
패검문의 소문주, 만광이다.
얼마나 맞았는지 일어서기도 힘든 수준.
“큭…….”
하지만 무력한 비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두 눈은 고통에 분개하고, 악에 받친 느낌이 더 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매질이 멈춰지자.
“더 쳐, 이 개새끼들아!”
도리어 더 때리라며 고성을 내질렀다.
벌써 이틀째였다.
바닥엔 이미 부서진 몽둥이만 십여 개고, 산공독을 먹여 내공까지 금했거늘 지치지도 않는다.
이 정도쯤 되니 도리어 치던 사람들이 지쳤다.
손등에 뱀 문신이 무색하게 치라는데도 선뜻 손이 올라가질 않았다.
아마 뒤에서 지켜보는 이가 없었다면 이미 두 손 들고, 풀어줬을 거다.
맞는 놈보다 더 실실 웃으며 눈에 초승달을 그리는 사내.
참모 독사호리만 없었다면 말이다.
“저, 독한 새끼. 그렇게 처맞고도 눈 똑바로 뜨고 개기는 거 봐라. 이 새끼 이거 마교 맞네. 맞아. 킬킬.”
“닥쳐, 이 개새끼야!”
“워, 워. 이 새끼 이거. 어린 새끼가 예의가 없네?”
“찢어버린다!”
눈이 회까닥 돌아서는 죽일 듯이 달려든다. 하나 지금 몸으로 뭘 할 수 있겠는가.
“커헉!”
흑사방원들이 다시 몽둥이를 휘갈겼다.
독사호리는 그 와중에 코웃음을 치며 대화를 이어간다.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네놈이 나한테 칼을 휘둘렀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더라고. 보상을 받아야지. 그래서 너희 패검문에게 돈 좀 받기로 했다.”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거 같아?”
“아니지, 아니야. 그 말은 네가 할 게 아니지. 내 후일을 걱정할 게 아니라 네 오늘을 걱정해야 하는 거다.”
“청해지부가 너희를 가만둘 거 같아?”
“킬킬, 모르겠는데. 내가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맞습니다, 형님. 수하들이 낄낄대며 웃는다.
만광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뭘 믿고 이리 까분단 말인가.
아무리 본교와 단절이 되었다고 해도 간판은 천마신교 청해지부다.
얕잡아 볼 순 있어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결코 조용히 끝낼 수 없는 일.
한데 방주도 아닌 고작 참모 따위가 뭐라고.
“궁금해?”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만광의 미간이 와락 좁혀졌다.
그러자 그에게서 믿을 수 없는 말이 뱉어졌다.
“네 아비 오늘내일한다며.”
“……!”
대체 그걸 어떻게. 만광의 눈이 부릅떠졌다.
“맞네. 킬킬. 이 새끼. 너야말로 도대체 뭘 믿고 까분 것이냐. 응? 아비 없으면 x도 아닌 새끼가.”
“선 넘지 마, 이 새끼야-!”
또다시 이 악물고 달려드는 만광.
“칵!”
하나 독사호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벼락처럼 내지른 발길질에 와당탕 나가떨어진다.
“듣자 하니 네 아비 쓰러지고 간부들도 등을 돌렸다던데. 너희도 참 너희다. 본질이 마교라 그런가. 의리라고는 x도 없지 않으냐.”
“닥……쳐…….”
“뭐,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우리도 없거든. 킬킬킬!”
독사호리의 조롱에 장내가 웃음으로 가득 채워진다.
반면 만광의 동공은 분노에 파르르 떨렸다.
“너…… 내가 반드시 죽여버린다. 지옥까지 찾아가서라도 죽여버린다!”
“기대하마.”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수하 하나가 고개 숙여 외쳤다.
“패검문에서 찾아왔습니다!”
“오! 그래? 저놈을 끌고 오거라.”
독사호리가 피식 웃고는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