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64)
첩자의 마교생활-264화(264/350)
264.
#달라진 태도
적아린이 역으로 함정에 빠졌을 무렵.
제갈소미는 서녕에서 벗어나 동쪽 황야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엔 103호에 대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그가 했던 마지막 한마디가 내내 걸렸다.
‘부탁한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걸까. 선유를 찾길 바라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간절했다. 저를 지키려다가 당한 것이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103호의 목소리는 그 이상인 듯했다.
‘선유 소협을 바라보던 눈빛들도 그랬어. 어딘가 그리워했던 느낌……. 대체 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상했어. 103호를 만나러 가는데 왜 할아버지는 내게 선유 소협을 붙여준 거지?’
절 호위해 줄 사람은 많았다. 요원들도 있고, 아니더라도 제갈가의 식객 중에도 고수들은 널렸다.
한데 왜…….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알아내야 해. 어서 할아버지를 만나서…….’
그때였다.
말을 타고 달리던 그녀가 고삐를 당기곤 멈춰 섰다.
분명 주변을 둘러봐도 황야의 구릉뿐이거늘. 어째서 기이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잘못 느낀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슈슈슈슉!
사방 곳곳에서 일백이 넘는 신형이 일시에 나타났다.
통일성이라고는 일절 없는 행색.
그리고 하나 같이 어딘가 묘하게 안 어울리는 이목구비.
‘인피면구?! 설마……!’
그녀의 눈이 부릅떠지는 그 순간.
“대체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 게야!”
“……!”
바로 뒤에서 너무도 그리운 불호령이 터져 나왔다.
휘릭 몸을 돌리자 눈에 담기는 백발의 노부.
“할아버지……?”
그다. 암각의 주인, 제갈상.
그가 요원들을 대동한 채 당도한 것이다.
“무사하였구나.”
“할아버지……!”
제갈소미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와락 그의 품에 안겼다.
“내 각주라 부르라고 그리 신신당부하였거늘.”
“근무 시간 다 끝났거든요?”
“다친 곳은……. 다친 곳은 어디 없느냐?”
“괜찮아요. 저보다는 선유 소협이 혈교에 납치됐어요. 어서 찾아야 해요.”
“걱정 말거라.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으니. 곧 찾아낼 게다.”
“하…….”
조부의 든든한 호언에 그간의 걱정이 사르륵 녹아내린다. 그가 누구인가.
암각의 주인 제갈상이다. 그가 나섰다면 반드시 찾아낼 터.
“드릴 말씀도, 물어야 할 말도 많아요. 일단 주변을 좀 물러주세요.”
그녀의 말에 제갈상이 고개를 갸웃하곤, 이내 손을 들어 올렸다.
파파팟!
그러자 요원들이 나타났던 것처럼 다시금 바람처럼 자취를 감췄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103호를 만났어요.”
“어디서? 안 그래도 네 소식을 알려준 게 103호다.”
“저, 정말요?”
그랬구나. 그가 날 걱정해 줬구나. 제갈소미는 가슴 깊이 감동하며 두 손을 꼭 모았다.
“놀라지 마세요. 지금 천하를 들썩이게 만든 뇌마(雷魔)가 바로 103호예요.”
“무, 무어라……!”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들을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갈상은 충격과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 * *
“끙…….”
적아린이 정신을 차린 건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방에서였다.
의자에 묶인 채 앉혀 있었는데, 점혈을 짚었는지 밧줄에 저항할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안 쑤시는 뼈마디가 없는 걸 보니.
“엉망이네.”
아주 제대로 당했다.
“깨어났나?”
그때 바로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정도 지근거리까지 인기척을 못 느꼈다는 건 점혈만 짚은 게 아니라 내공도 텅 비었다는 얘기.
최악이네. 갑갑함에 슬며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언제 왔는지 제 앞에 그가 마주 앉아 있었다.
뇌마. 장이서다.
“후후, 네가 깨워주니 나쁘진 않네?”
“벌써 죽으면 안 되지. 물을 게 많거든.”
“묻는 건 자유지. 근데 어떡하지. 듣는 건 쉽지 않을 텐데. 가능하겠어?”
적아린이 자신감 넘치게 씨익 웃는다.
당연히 어렵겠지.
딱 보면 안다. 고문을 못 이겨 술술 불어댈 자인지, 아니면 죽어가면서도 웃어 젖힐 자인지.
당연히 적아린은 후자다.
고통 따위는 이미 한참 전에 초월한 괴물.
장이서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슴 윗면에 두 손가락을 툭 얹었다.
“뭐야. 그런 쪽이야? 좋긴 한데, 좀 실망이네.”
그쪽이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투툭!
장이서의 검결지가 일시에 그녀의 점혈을 풀었다.
“어?”
그뿐 아니라 손에 쥔 백뢰로 툭 밧줄까지 잘랐다.
“뭐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묻지도, 듣지도 않고 풀어주겠다는 건가? 심지어 호위를 서듯 스륵 뒤돌아 뒷짐을 지고는 말했다.
“채워. 비었잖아.”
“나더러 지금 운기조식을 취하라고?”
“싫어?”
“설마 지금 나도 너랑 같은 편이다. 이렇게 접근하려는 거야? 그건 너무 하수인데.”
말 참 많네. 장이서가 얕게 한숨을 뱉고는 다시 다가와 바닥의 밧줄을 주워 들고 말했다.
“다시 묶을까?”
“후회하지 마.”
와당탕! 의자를 집어 던지고, 바로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취하는 적아린.
우우웅!
사방의 기운이 그녀에게로 몰려들고, 장이서는 의자에 앉은 채 묵묵히 이를 지켜봤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땐.
“후, 개운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악하고도 위압적인 원래의 기세로 돌아와 있었다.
힘을 되찾은 것!
“괜찮나?”
“뭐, 다는 아닌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근데, 혼자야?”
“보다시피.”
“푸훗, 위험하게 왜 그랬어. 네가 강해진 건 알겠는데 아직 나 상대할 만큼은 아니잖아.”
“그래?”
장이서가 되묻자 그녀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곤 앉아 있는 장이서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어떡하지. 볼수록 더 마음에 드는데. 그냥 데려가서 확 같이 살아버릴까?”
“헛소리 그만하고, 내가 너한테 물을 게 있다고 말했을 텐데.”
“하하! 어떻게 들을 건데? 먼저 선처를 베풀었으니 너도 말해달라 뭐 그런 거야?”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농염한 손길도 어느새 장이서의 가슴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그럴 리가.”
화르륵!
그 순간, 장이서의 등 뒤에 불꽃이 서리더니 어느새 거대하고도 붉은 마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퀴아아아아아-!]그러곤 완전한 모습을 갖춘 뒤 내지르는 포효!
“뭐, 뭐야……!”
적아린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만큼 놀랐다.
마귀에게서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혈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으니.
망연자실한 눈으로 올려 살피는 그 순간.
“조금 아플 거다.”
화르르륵!
적아린의 시야에 암전이 닥쳤다.
*
“헉!”
다시 깨어난 그녀. 앞에는 여전히 장이서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너, 너 뭐야!”
속박된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녀는 온몸이 강박 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는 공포였다. 지독한 공포.
단순히 자신을 압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 네가 혈기(血氣)를 지니고 있는 건데?!”
혈마귀(血魔鬼).
혈옥을 먹고 태어난 바로 장이서의 천마귀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이상했어. 곤륜산맥에서는 인피면구를 쓰고 능가경을 갖고 있더니. 여기선 대뜸 뇌마라고 하지를 않나. 이제는…… 너 진짜 정체가 뭐야!”
“살 생각이 아예 없는가 보군. 주절주절 떠드는 거 보니.”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어떻게 네가 혈마귀를 가지고 있는 거지?”
장이서도 그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넌 천마귀가 아닌 혈마귀라고 부르는군. 난 아무 말도 한 적이 없는데.”
“그건…….”
적아린이 입을 꾹 다물었다. 딱 봐도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
뭔가가 있다.
잠시 후, 그녀는 장난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진짜 궁금한 게 뭐야.”
다소 달라진 분위기. 그녀에게서 적대감이 아니라 긴장감이 느껴진다. 고작 한 번 부딪쳤다고 그럴 인물이 아닐 텐데.
장이서는 차분히 답했다.
“흉신팔주에 대한 정보.”
“오흉?”
“너와 함께 있던 자가 다섯 번째인가 보군.”
“그거면 돼?”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그거만 알려주면 되냐고.”
입장이 바뀌었다. 이번엔 적아린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 말해줄게. 대신 내 부탁도 들어줘.”
“그럴 처지가 된다고 생각해?”
“죽여도 상관없어. 그만큼 중요한 문제니까.”
장이서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도대체 얘 뭐지?
“네가 보여준 그 힘. 한 번만 더 보여줘. 한 번만 더 때려달라고.”
“너, 진짜 제정신이 아니구나.”
“부탁이야.”
장이서는 눈매를 좁히곤 그녀를 골똘히 살폈다. 거짓 같아 보이진 않는다.
어차피 한 번 보인 거, 두 번 한다고 손해 볼 것도 없는 일. 수틀리면 죽이면 그만이다.
[퀴아아아아아!]거친 포효와 함께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혈마귀.
“아아…….”
적아린은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홀린 듯이 이를 살폈다.
그러곤 털썩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좌우로 벌린다.
“태워줘…….”
화르르륵!
다시금 지독한 혈기가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널브러지는 적아린.
장이서는 혈마귀를 날려 보내곤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친년.”
*
적아린이 다시 깨어난 건 그로부터 반 시진 정도가 지나서였다.
그때부턴 그녀의 태도가 다소. 아니 자못 달라져 있었다.
“하하! 널 뭐라고 부르면 될까. 뇌마는 정 없고. 이름이 뭐야?”
좋게 말하면 친화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빈대다.
“떨어져 앉아. 네가 여기 왜 와 있는지 몰라? 너 납치된 거야.”
“알아. 나 그래서 엄청 협조하는 건데? 이름 좀 가르쳐 줘.”
도대체 뭘 삶아 먹은 건지.
느닷없이 배고픈 강아지처럼 코앞에 앉아 꼬리를 흔든다.
“후, 장이서다.”
“장이서. 이름 예쁘네. 나는 적아린.”
“그건 이미 아는 거고. 오흉이 누군지나 말해.”
“뭐 이리 급해. 혈기는 어디서 난 거야? 아, 팔흉이구나. 40년 넘게 쌓아온 혈옥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더니. 여기 있었네. 네가 그걸 먹은 거야. 너무 충격인데.”
“인질이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미안.”
싱글싱글 웃는 게 왜 이렇게 약이 오르는지. 장이서가 섬?하게 눈을 뜨곤 말했다.
“내가 지금 널 믿어야 할 이유를 말해 봐.”
“안 믿으면? 어차피 내 얘기 들으려고 잡아 온 거잖아. 그럼 믿어야지.”
“안 믿고 그냥 죽이는 방법도 있지.”
“그럼 흉신팔주는 못 찾을 텐데?”
“그건 산 자가 걱정할 문제고.”
지지 않는 시선이 허공에서 뒤섞인다. 그리고 잠시 후.
“좋아!”
적아린이 검지를 툭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이러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믿겠다 이거잖아.”
“시간 아껴서 좋네. 계속해.”
“별거 없어. 우리가 다루는 힘을 혈기(血氣)라고 하는데, 더 강한 혈기를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끌리게 되어 있거든. 같이 있으면 공력이 잘 돌기도 하고.”
그녀는 제 말의 설명을 보충하듯 손아귀에 붉은 기의 구체를 만들곤 고갯짓했다.
혈마귀를 꺼내 보라는 얘기.
이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혈마귀를 불러내자, 정말 그녀의 구체도 반응하듯 더 힘이 강렬해졌다.
“아…….”
심지어 얼굴을 보니 상기된 게 정신력도 영향을 받는 듯했다.
다시 혈마귀를 날려 보내자 그녀가 아쉬운 듯 숨을 크게 들이켜곤 이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난 혈기가 강한 자를 존중해. 아니, 공경하지. 본교에 이런 말이 있거든. 혈기가 클수록 위대하다.”
코웃음이 절로 나는 소리. 어디서 헛소리를. 하지만 그녀가 적개심이 없다는 건 잘 알겠다.
“어깨에 머리 치워.”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