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76)
첩자의 마교생활-276화(276/350)
276.
#영웅
– 흑룡강 오대련지(五代?池).
다섯 개의 호수가 자리한 신비의 수림(樹林).
푸른 숲엔 맹독을 품은 녀석들이 가득하고, 미로처럼 안개가 가득하다.
워낙 험지인 터라 누구든 들어서면 겁에 질리기 마련이겠거늘.
사박, 사박.
흑발의 미녀가 제집 앞마당처럼 당당히 들어선다.
스르르륵!
심지어 나무를 타고 다가오던 매서운 독사들도 그녀의 날 선 기세에 줄행랑치듯 도망쳤다.
당연했다.
그녀의 이름은 적아린.
사천의 포위망을 뚫고 기어코 이곳까지 살아 돌아온 혈교의 기린아였으니.
“후.”
하지만 그녀도 멀쩡해 보이는 건 아니다.
얼핏 봐도 당장 병상에 누워 한 달을 요양해야 할 수준.
한데도 이 머나먼 동부 끝자락까지 온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이곳이 그녀의 집이기에!
“제 발로 죽으려고 찾아왔구나!”
스스스슥!
안개로 가득한 숲속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흑색 무복의 고수들.
수는 채 백이 되지 않으나,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그들의 이름은 흑혈(黑血).
모두 혈교에 속한 자들이다!
그중 적아린을 마주한 이는 눈썹 대신 동그란 문신 두 개가 자리하고, 등에는 몸보다 긴 날이 달린 태도를 찬 백발의 미녀였다.
전신에도 악귀 형상을 한 문신이 가득한 걸 봐선 동영(東瀛)에서 온 여인.
다섯 개의 호수 중 백룡호(白龍湖)의 주인인 혈나비다.
“대업을 그리 망쳐놓고 여길 다시 돌아와? 아주 뻔뻔하구나! 잘 왔다. 지금 바로 죽여주마.”
척! 혈나비의 손이 등 뒤의 기다란 도파(刀把)로 옮겨진다.
이내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언제든 발도할 자세를 취했다.
일도만 휘둘러도 반경 십 보는 뭐든지 싹 다 도려낼 기세.
하나.
“자신 있어? 나야.”
한없이 가벼운 어투이지만 나라는 말. 그 말 한마디에 혈나비의 기세가 움찔했다.
분명 수중에 창도 없고, 이제는 좌천 당한 말단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본능이었다.
흑혈 내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던 흑룡호의 주인. 적아린을 향한 본능적인 두려움.
그녀뿐만 아니라 사방의 흑혈 모두가 그러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대업을 망친 죄인.
고도의 긴장감이 서리고, 접전이 벌어지려는 그 순간.
“가서 동방왕(東方王)께 전해. 새로운 성혈(聖血)을 찾아냈다고.”
“뭐……?!”
경악에 찬 외침. 혈나비의 얼굴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서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솨아아아아-!
숲속에 음산한 바람과 함께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기루처럼 길목 끝에 모습을 드러내는 분화구!
아니, 분화구로 오르는 면을 가득 메운 붉은 기와의 마을이 나타났다.
혈나비는 놀란 표정을 갈음하곤, 도파에서 손을 뗀 뒤 돌아섰다.
진법이 걷혔다는 건 오직 하나뿐.
“……따라와라.”
허락이 떨어졌다. 동방왕이 직접 그녀를 만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적아린은 진득한 미소를 갈무리하곤 뒤따랐다.
어쩌면 혈교에 새로운 바람이 되어줄지도 모를 그 사내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또 보자, 장이서.’
그가 중원에 뿌려놓은 씨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
– 섬서 화산 선인봉(仙人峰).
병풍 앞 향로에서 연기가 핀다.
조문객들이 줄을 잇고, 상주인 선유는 폐인 같은 모습으로 영혼 없이 고개를 숙였다.
화산의 장로이자 무림맹의 군사이며 제 스승이었던 화평자 구자기의 장례였다.
“정도의 커다란 별이 졌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수많은 이가 애석한 조의를 표하였고, 선유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사형들도 이번만은 묵묵히 옆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선유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어도 여전히 머릿속은 안갯길을 거닐 듯 혼란으로 가득했다.
‘형이라고 불러.’
제게 형이라 부르던 사내.
그가 사실은 마교의 뇌마였고, 사부가 죽은 현장에서 발견된 범인이었다.
한데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은 정체 모를 여인이 범인이라고 말을 바꿨다.
어째서.
‘분명히 둘은 한 패였는데…….’
제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여인이 뇌마를 구해가는 모습을.
한데 누구도 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무림맹에선 조사 중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했고, 심지어 태사부인 서검도 찾아가 보았지만.
‘……네 사부는 그만 잊거라.’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들어야 했다. 그게 선유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억울하겠군.”
그런데 그때. 다른 문상객들과는 다소 다른 첫 마디가 정신을 깨웠다.
이에 고개를 들자 제 앞에 번듯한 차림을 한 강인한 용모의 중년인이 눈에 담겼다.
옆에 뒤따라온 충복의 모습이 자못 특이했는데 머리카락도, 눈썹도. 심지어 눈동자마저도 새하R다.
“자네 사부를 가장 잘 아는 벗이라고 해두지.”
초면이기 때문인가, 사내는 담담히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선유는 이에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자기가 무공을 잃기 전에는 화산의 제일 기재라 불렸고, 정사마전이 끝난 후에는 군사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다.
강호에 그의 벗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더구나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이곳 화산까지 들어오지도 못한다.
“아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억울할 것 같다고 하였네. 난 억울하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사부를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군지 자네는 알지 않은가.”
“……!”
선유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에 사내는 북적이는 주변을 살피며 이어갔다.
“어쩌면 모두가 다 알면서도 쉬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의 일언이 선유의 속을 후빈다. 한데 아픈 게 아니라 후련했다. 가려웠지만 외면해 왔던 부분을 파내버리는 기분.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천마의 보복이 두려울 테니.”
쾅! 선유의 뇌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이거였다. 내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끝없이 떠오르던 의심과 불신.
천마.
그가 두려워 뇌마의 죄를 덮은 것이 아닌가 하는 최악의 가설.
“자네 사부의 죽음을 밝히고 싶다면 지금은 자중하게. 구태를 답습하는 미련한 수뇌들이 존재하는 한 결코 자네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
흐물거렸던 선유의 기세가 돌연 첨예해지고, 이내 돌아서는 사내를 향해 단호히 물었다.
“대인은 누구십니까.”
이에 사내는 떠나가며 말했다.
“모용소.”
“……!”
“언제고 때가 되면 한번 들르시게. 우린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니.”
선유는 점점 멀어지는 그를 멍하니 눈에 담았다.
모용소.
몸져누운 가주의 아우이자, 실상 모용세가의 실권자로 알려진 자.
그리고…….
“오흉이 제자를 잘 길러뒀구나.”
“맞습니다, 주인님.”
구자기를 오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
바로 흉신팔주의 수장!
일흉(一凶)이었다.
“이번 대업은 모두 실패했으나 아직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언제고 무림맹은 내 손에 넣고 말 것이다. 반드시…….”
새로운 음모의 시작이었다.
* * *
– 천산 인근 어해촌.
솨아아아-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어느 날.
장이서와 일행은 마침내 길고 긴 황야를 지나 다시 이곳에 도착했다.
“여, 여기가……!”
구름에 가려진 봉우리들만으로도 초행인 자들은 저절로 몸이 위축되는 곳.
천산(天山).
마의 소굴, 천마신교에 말이다.
장이서는 놀라는 만광을 뒤로한 채, 기이한 감정을 담아 전경을 살폈다.
격세지감이다.
떠날 때의 가벼웠던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져 돌아왔다.
과연 사람들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또한 반대로 자신은 사람들을 어떻게 마주 볼 것인가.
숱한 의문이 남겨진다.
두려움과 쓸쓸함.
어느 순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외톨이가 된 이상한 기분.
“뭐 해? 가자.”
마오가 활짝 웃으며 등허리를 툭 치곤 앞장선다.
아주 조금이나마 짐이 덜어진다.
그래. 가자.
장이서는 그를 물끄러미 살피다 걸음을 떼었다.
“근데 원래 이렇게 조용한 겁니까?”
산길에 올라서자 만광이 들떴던 것도 잠시, 이상함을 느끼곤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열댓 명 지나갈 법한 넓은 산길은 휑하리만치 조용했다.
비가 내리고 있다곤 하나 마중 온 이가 단 하나도 없던 것.
마교가 폐쇄적인 곳이라곤 해도 명색이 칠공자 아닌가.
더구나 중원에서 신승과 원담을 꺾고, 사천지부까지 들쑤시고 돌아온 뇌마(雷魔)의 귀환이었다.
한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서운함에 김이 새는 건 당연한 일.
“이상하긴 하구나.”
하지만 비로를 지나 동굴까지 들어서자 묘채경 역시도 의문을 드러냈다.
아니, 마오고 장이서고 다 떠나서 자신이 누구인가.
아무리 정직된 신세라곤 하나 명색이 교외를 관리하는 비룡당주다.
한데 문 열어 주러 온 놈이 고작 말단 당원 둘이라니.
“이게 어찌 된 것이냐. 왜 너희뿐인 게야?! 날 무시하는 것이냐!”
“그, 그게 아니오라…….”
“아니면, 뭐!”
괜히 말단 당원한테 성질을 부리는 묘채경. 하지만 동굴을 벗어나 본교에 들어서는 순간.
“헉!”
그녀는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와아아아아아-!
귀청을 때리는 함성이 자신들을 마중했기 때문.
드넓은 천마신교의 문주(門柱)를 중심으로 사방천지에 끝이 안 보일 만큼 빼곡한 인파가 가득 차 있었다.
심장이 들썩이고, 전신의 솜털이 쭈뼛 섰다.
비룡당원들은 대부분 그런 신도들을 막는 데 투입되어 여념이 없었다.
“이게 무슨…….”
“뭐냐. 싸우자는 거냐!”
마오가 당황하며 창룡도를 꺼내 든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쪽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
“뇌마이시여!”
“장이서! 장이서!”
신도들은 그를 부르짖고 있었다.
보좌 장이서.
아니, 이제는 뇌마가 되어 돌아온 본산의 영웅을 말이다.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지는 상황.
하지만 그들만 몰랐을 뿐.
청해에서 승전고(勝戰鼓)를 울릴 때마다 중원은 경멸했겠지만, 반대로 천산은 열광하고 있었다.
‘뇌마라는 자가 신승을 쓰러트렸다던데?’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소림의 사대금강이 패검문에 쳐들어갔다가 된통 당했다더군!’
‘설마…… 이번에도?’
‘이번에도 뇌마일세.’
‘맙소사!’
그다음에는 경악에 빠졌으며.
‘뇌마께서 사천지부까지 쳐들어갔다가 천라지망을 뚫고 유유히 빠져나오셨다네!’
‘그게 가능한 일이야?’
‘뇌마이신데 가능하고말고!’
‘안 그래도 평화니 뭐니 지긋지긋했는데. 건방진 무림맹 새끼들한테 누가 위인지 제대로 보여주었구나!’
‘오…… 뇌마이시여.’
어느 순간부터는 경외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더구나 뒤늦게 그가 대공자를 봉문에 빠트리고, 부교주 위에 오를 뻔했다는 소식까지 알려지자 또 한 번 마교는 뒤집혔다.
‘교주님께서 왜 그분을 골랐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오직 뇌마만이 진정한 이 시대의 마인(魔人)이다!’
터져 나오는 찬양 일색.
눈물을 흘리며 연호했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교외자로 태어나 들개에서 조장으로.
보좌에 오르자마자 1년도 안 되어 부교주를 지나 뇌마라는 대마두에 이르기까지.
그의 입지전적인 행보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경이적이고도 찬란한 업적은 19년간 평화롭고 따분했던 마교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랬다.
천산은 지금 장이서에게 미쳐 있었다.
그는 마교에서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