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78)
첩자의 마교생활-278화(278/350)
278.
#결심
그날 밤.
식사가 끝나고 뒤풀이가 한창일 무렵. 장이서는 독마와 따로 시간을 가졌다.
“벽을 허물고 새로운 단계에 올라선 것을 축하한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독마는 처음 본 순간부터 장이서가 초절정 경지에 올라섰음을 간파했다.
일전엔 당장 터질 것처럼 범람하던 내기가 지금은 몸 안으로 갈무리되어 한층 더 눈이 깊어졌기 때문.
게다가.
“환골탈태까지 이루다니. 이젠 천하에 널 상대할 자가 그리 많지 않겠구나.”
그는 독에만 달통한 것이 아니라 의술에도 능통한 자. 이전과 달라진 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냥 커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뼈와 살이 재구성되었음을.
“사숙에겐 속이질 못하겠네요.”
장이서도 픽 웃으며 숨김없이 이를 수긍했다.
솔직히 장이서도 이번에 독마를 다시 보며 새삼 여러 번 놀랐다.
과거엔 보이지 않던 그의 진짜 경지가 이제는 천마안을 펼치자 조금이나마 눈에 담겼기 때문.
‘마치 칠소궁을 지켜주듯 독무가 가득 차 있다. 이것이 바로 사숙의 성역.’
칠소궁을 가득 메운 이 푸른 독무에 발만 잘못 들여도 사숙의 기감을 피하지 못할 것이고, 만일 조금이라도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모두가 피 토하며 사지를 떨다 죽게 될 것임이 훤히 보였다.
그가 존재하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자 가장 위험한 곳이라는 얘기.
물론 이면을 볼 수 있는 건 장이서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독마 역시 장이서를 보며 기존과 달라진 또 다른 점을 발견했다.
이는 그의 불안정한 심리였다.
아까 식사 자리에서도 그렇고, 남들 다 웃을 때 유독 표정에 그늘이 끼어 있어 보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괜찮은 것이냐.”
그리고 당연한 듯한 사숙의 질문에 장이서는 마음이 울컥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법도 하거늘. 늘 그랬듯 안부부터 묻지 않는가.
그게 몹시 고마워 솔직하지 않은 답을 꺼냈다.
“괜찮습니다.”
“힘들면 쉬어도 된다.”
하지만 독마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표면에 드러낸 건 아니었다. 그저 부모가 자식을 모를 수 없듯이.
오직 장이서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한 독마에게는 보였다.
그가 얼마나 힘겨워하고 있는지.
결국 장이서는 웃음을 거둔 채, 허망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저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은 만들어진 존재와도 같았다.
임무라는 이름 아래 길이 정해져 있었고, 그 길을 걷기 위해 수많은 가면을 써야 했다.
그것이 바로 첩자 장이서의 삶이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 버려진 그 순간. 지난 삶은 모두 부정당했고, 가치관은 무너져 버렸다.
“다른 건 다 그대로인데, 제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문의 벽은 높고, 답을 찾기엔 막막했다.
쓴웃음을 뱉고선 독마를 흘겼다.
‘음?’
한데 표정이 심상치 않다. 어딘가 크게 놀란 모습. 너무 두서없이 걱정만 끼친 것 같다. 마음이 미안해져 정정했다.
“죄송합니다, 사숙. 지금 말은 못 들은 거로…….”
“너와 똑같은 말을 한 자가 있었다.”
한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도 같은 말을 했었지.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누가 그런 말을…….”
독마는 지난날을 회상하듯 초점이 희미해진 눈으로 이어갔다.
“네 사부의 이야기다.”
장이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사부라면 뇌신 한무영이다. 그리고 그는 정파에서 보내진 첩자. 한데 그에게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역시 너도 무림맹에서 보내진 아이였더냐.”
“……!”
벌떡 일어선 장이서.
첩자 인생 처음으로 제 신분을 들켜버렸다.
언제고 이 안에 있다 보면 들키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바로 오늘일 줄이야.
그것도 이젠 첩자도 아니게 된 상황에서, 가족이라 여기는 사숙에게.
“나를 죽일 것이냐.”
독마의 시선이 장이서의 우수로 향했다. 정확히는 완갑에 감춰진 비수를 보고 있는 것.
그도 뇌신의 무공을 익히 알고 있는바. 그의 애병인 백뢰를 모를 리 없다.
“사숙…….”
장이서는 미간을 좁힌 채 침을 삼켰다. 위험하다. 첩자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멸구를 해야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털썩. 장이서는 다시금 자리에 앉은 채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우십니까?”
이제 와서 숨긴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찌 살아야 할지도 모를 마당에. 미움받아도, 죽이려고 해도 상관없다.
한데.
“힘들었겠구나.”
독마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위로를 건넸다.
어째서…….
눈시울은 붉어지고, 얼굴은 이를 숨기려는 것처럼 오만상이 다 찌푸려졌다.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제가 무림맹에서 온 첩자인데도요.”
“말하지 않았느냐. 넌 내 화신이자 혈육?繭箚?”
“사숙!”
그의 어리석음에 화가 치솟았다. 자신은 모두를 이용하러 온 자이고, 그러기 위해 살아온 자였다.
한데 왜.
“예상은 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네 사부가 자신의 무공을 아무 곳에나 숨겨두고 떠났을 리는 없을 테니.”
“그건……!”
“보나 마나 우물 같은 곳에 너희만 알 수 있는 암어로 숨겨뒀겠지.”
빌어먹을.
“정확합니다.”
“후후, 그럴 줄 알았다. 네 사부는 그런 분이었다. 음흉하고, 잔꾀가 보통이 아니었지. 꼭 너처럼 말이다.”
“그랬습니까.”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무림맹에서 널 내친 모양이로구나. 그들은 늘 그런 식이지.”
정말 이젠 더 숨길 것도 없다. 장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자신의 삶에 대해.
신승에 이어 두 번째로 털어놓는 장이서의 인생이었다.
“……그렇게 청해에서 돌아오게 된 겁니다. 그리고 사숙께서 힘들게 만들어 주신 영단은 신승을 구하는 데 쓰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이야기를 마쳤다.
독마는 한참 입을 다물다 차분히 물었다.
“이곳이 싫은 것이냐.”
장이서는 망설임 없이 고갤 저었다.
“그랬다면 다시 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처음의 접근은 의도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젠 아니었다.
마오가 설보산에 나타났을 때도 느꼈고, 천산에 도착했을 때도. 그리고 이곳의 문을 열었을 때에도 연거푸 깨달았다.
가면을 벗은 지금도 이들은 제게 식구였고, 소중한 지인이라는 것을.
그래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이들을 위하기에 이들을 떠나야 한다고.
‘내 신분은 무림맹이 알고, 이젠 혈교까지 알게 되었다. 탄로 나는 건 시간 문제. 모든 게 밝혀진다면 주변 사람들부터 위험해질 거다.’
사숙도, 마오도. 그리고 식솔들과 벗들도.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다.
이미 한 번 겪어보지 않았는가.
이것이 장이서의 표정이 내내 어두운 이유였다.
“도망칠 것이냐?”
“……!”
그리고 사숙은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처럼 비수를 꽂았다.
“난 과거에 네 사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배신감을 느꼈고,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원망스럽고 밉기만 했지. 그저 몰랐던 신분을 하나 더 알게 되었을 뿐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 떠나가고 난 다음에야 알았다. 그분은 늘 내게 진심이었고, 나 역시 그분을 진심으로 따랐다는 것을. 신분이 뭐였든 상관없이 말이다.”
순간 장이서는 독마의 눈에서 과거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함께할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사부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후회하는지.
“천산에서 도망친다는 건 평생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채 숨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지.”
그래, 분명 그럴 거다.
“하나 난 네 사부를 그리 떠나보내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았다. 왜 그때 붙잡지 못했을까. 왜 그때 함께하지 못했을까.”
독마가 웃는다. 그러곤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젠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네 신분이 무엇이든 이 사숙은 널 놓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어디로 가든 함께 할 것이다. 설령 그게 죽음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사숙……!”
독마의 말이 가슴 속을 뒤흔든다.
“하나, 그것이 정녕 네가 원하는 삶인지 잘 생각해 보거라. 모두를 두고 홀연히 떠나면 마음이 편해지겠느냐? 그건 외면이 아니더냐. 네가 이대로 떠난다고 무림맹이 널 가만히 놔두진 않을 것이다.”
이빨이 빠득 씹히다 못해 갈린다.
맞는 말이다. 도망을 친다고 결코 해결되진 않을 거다.
암각은 위협 요소를 계속 남겨두지 않을 테니.
“이서야. 네 삶이 있긴 하였더냐. 그저 널 버린 자들이 만든 꼭두각시의 삶은 아니었더냐. 주저하지 말고, 이젠 네 것을 잡거라. 더는 남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삶을 살란 말이다!”
“……!”
커다란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내가 원하는 삶.
“너라면 분명 살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게다.”
이내 흔들리는 망막을 질끈 감아 잡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래도 한결 마음이 후련해졌다.
고마운 사람. 늘 제 편을 들어 주는 정말 고마운 가족이다, 사숙은.
장이서는 울컥하는 마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서.
*
독마와의 대화를 마치고, 모두 잠들었을 새벽.
장이서는 소리 없이 밖으로 나섰다.
크게 숨을 들이켜자 냉기가 폐부에 스민다.
청해보다 공기는 찬데 비가 개인 뒤 바람 한 점 없어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정원의 고요한 연못으로 다가서니 둥근 달이 비친다.
퐁당. 이윽고 개구리 한 마리가 연못에 뛰어들자 물결이 일며 보름달이 마치 악귀처럼 흐트러졌다.
저처럼 모든 게 다 가짜였다는 듯이.
피식. 괜스레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 웃음이 났다.
“달밤에 청승이라. 나답지가 않네.”
정말 그런 것 같다.
사숙의 말이 옳았다. 도망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건 비단 저만의 일뿐만이 아니다.
윤이는 정말 혼자가 될 것이고, 적아린 때문에 잠시 흔들렸지만 혈교는 여전히 파멸을 기원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볼 것이다.
남겨진 마오와 식솔들은 첩자에게 이용당했다는 꼬리표가 계속해서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모든 걸 바꿔야 한다. 내 방식대로.”
우선은 신분(身分).
지금까지 절 지탱해 주었던 정도인이라는 꼬리표부터 과감히 잘라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천마와의 독대.
“후…….”
마음을 굳히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다시 잔잔해진 연못에 둥근 달이 맺힌다.
달라진 건 없었다.
달이 악귀로 보였던 건 그저 비친 모습이 그러했을 뿐.
나 역시도 그럴 것이다.
실패한 첩자로 쓸쓸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분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만일 그때도 자신을 받아준다면…….
그땐 정말 이들과 함께하리라.
걸음을 옮겨 어느덧 정문에 다다랐다.
우뚝 걸음을 멈춰 세운 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장이서, 또 어디 가?!’
마오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린다.
‘장 보좌! 이번엔 나도 데려가야 해.’
맹휘의 당부 어린 목소리도 들리고.
‘이봐, 장 형. 이번엔 나도 불러 줄 거지?’
소오의 익살스러운 음성도 뒤따른다.
‘기다리겠습니다, 주인님.’
홍란도 빠질 수 없고.
‘형님. 무기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요즘 저희가 최고지 말입니다.’
용태와 메기도 함께 서 있다.
‘늙은 형님 놔두고 맨날 어딜 그리 싸돌아 다니는 게야.’
‘다녀오거라.’
마의 형님과 독마 사숙.
‘가는 건가.’
‘형님, 잘 다녀오슈.’
‘……다녀오십시오.’
아쉽게도 만나지 못했지만 구유와 칠무위 녀석들까지.
모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들이 저를 향해 활짝 웃는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더는 마음이 공허하지 않다.
가득 채워졌다.
진심을 담아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노라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이윽고 칠소궁에서 장이서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첩자의 마교 생활을 청산하고.
진짜 마교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