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80)
첩자의 마교생활-280화(280/350)
280.
#두 개의 이름
“오랜만일세.”
천마전으로 들어서자 우사 흑야가 기다렸다는 듯 환한 미소로 반겼다.
그도 좌사가 어깃장을 피울 건 이미 알고 있던바.
하지만 장이서가 그걸 어떻게 뚫고 들어올지는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었다.
좌사의 심술은 감히 장로들도 어쩌지 못함을 알기 때문.
한데 역시나 이번에도 장이서는 불가능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대를 넘어서는 행보는 늘 사람을 설레게 하는 법. 반가운 건 당연지사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디보다 평화로운 곳 아닌가.”
하긴.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곤 함께 복도를 거닐었다.
“그새 많이 변하였군.”
우사는 장이서의 깊이와 경지가 훨씬 더 성장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運). 우사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섰다. 과연 그럴까. 이제는 안다. 그냥 운이 아니라 역천이라는 타고난 자의 천명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무운을 빌지.”
길을 안내한 우사가 옆으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문양이 화려하게 인각된 커다란 석문이 나타났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곳.
드르르르륵!
석문이 열리고, 화로 사이에 펼쳐진 길이 또다시 펼쳐졌다.
그리고 그 끝엔.
“왔느냐.”
자신의 앞날을 결정지을 이 땅의 주인.
천마 진우광.
바로 그가 있었다.
*
쿵!
안으로 들어서자 석문이 닫혔다. 이번에도 손을 댄 자는 없다. 하지만 장이서의 눈엔 이제 보였다.
방 안은 온통 시커먼 어둠으로 가득하며, 그 안을 배회하는 불씨들이 득실댄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저 끝 태사의에 앉은 백발의 미공자.
천마 진우광이 다루는 절대적 성역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거라.”
천마의 명에 장이서가 걸음을 떼었다.
청해로 떠나기 전과 비슷하지만 많은 것이 달랐다.
걸음엔 무게가 서렸고, 표정은 강인했다.
중원에서 겪은 시간은 그만큼 그에게 충격적이었던 사건.
이는 천마에게 썩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주 조금 더 쓸만해졌구나.’
과거의 이따금 선하고 나약해 보이던 모습이 제법 잘 담금질이 된 느낌.
게다가 좌사의 시험을 통과해 들어왔다는 건 절 만나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는 얘기다.
사제가 사형이 보고 싶다고 그토록 정성을 표하는데, 좋아하지 않을 사형이 어디 있겠는가.
“천마지존 만마앙복. 신 장이서.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장이서가 목전에 다다라 부복한 채 인사를 올렸다. 그러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천마를 또렷이 바라봤다.
“늦었구나.”
천마 역시 이를 직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다시 만난 두 사람.
고오오오오!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늘 장내에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가득 채워졌다.
한데도 두 사람은 이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와는 공기의 무게 자체가 달랐다.
이건 장이서의 문제였다.
천마는 그대로인데 장이서가 순응하지 않고 맞서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이래서 사제를 두는 것인가.’
처음이었다.
감히 절 만나러 온 주제에 이처럼 겁도 없이 기세를 일으키는 놈은.
그게 몹시 흥미로웠다.
“송구합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장이서가 말문을 열자 천마는 너그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저의 위신을 위해 능가경을 불태웠다고.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오죽하면 그를 찾기 위해 사천까지 마중을 나갔겠는가.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냐.”
천마는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사제의 입으로 다시 듣고 싶었기 때문.
한데.
“능가경은 교주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솨아아아아!
천마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고, 장내엔 마기가 들끓었다.
분명히 기분이 아주 좋았었다.
기대 이상으로 성과를 세운 사제를 만날 생각에 들떴고.
목숨을 걸고 좌사의 시험까지 통과했음을 알았을 땐 역시라며 크게 웃기도 했다.
아까의 기분이라면 원하는 건 뭐든 해줄 수 있는 정도였다.
한데.
“다시 지껄여 보거라.”
사제가 능가경과 함께 사형에 대한 예도 불태운 모양이다.
휘이이잉!
태풍의 전조처럼 화로의 불꽃이 요동을 치고, 귓가엔 찢어진 바람 소리가 요란을 떤다.
장이서는 전신을 조여오는 막대한 마기에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능가경은…… 소림의 것. 본교에 와서는 안 될 물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불태웠습니다.”
천마의 입꼬리가 싸늘히 내려선다.
콰과과과과!
이어 손을 척! 들어 올리자 장이서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고, 목을 꽉 조르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내게 죽으려고 온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이런 오만방자한 말을 지껄일 이유는 없을 터.
하지만 장이서는 그 반대였다.
“살려고…… 온 것입니다…….”
천마의 눈매가 좁혀졌다.
갑자기 미쳐버렸거나, 머리가 나빠진 건 아닐 테고.
이게 살겠다는 녀석이 할 말인가?
하지만 의문을 품기엔 아직 이르다.
진짜는 시작도 안 했으니.
“저는…….”
장이서는 삶의 열의가 가득한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무림맹에서 온 첩자입니다.”
고오오오오오!
그 순간 천마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콰과과과광!
폭음이 빗발치고 꺼진 화로에선 검은 불꽃이 천장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천마의 손이 툭 앞으로 뻗쳐지자 쐐애애액! 쾅! 장이서는 일섬을 그리며 문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커헉!”
각혈이 토해지고, 정신은 혼미하다.
역근경이 아니었다면 일격에 즉사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
좌사가 용이었다면 이자는 신이다.
마(魔)의 신!
다시 고개를 들자 어느새 천마가 태사의에서 날아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다시 말해보거라.”
그러곤 의기상인을 내뿜으며 손을 뻗었다.
느껴진다. 저 손끝으로 모이는 마기가 제게로 쏘아지는 순간 머리가 터져 죽게 될 거다.
하지만 장이서는 덤덤했다.
어차피 탄로 날 일.
길이 없다면 직접 부딪쳐 길을 만들어 내리라.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아는 자들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그걸 일일이 대응하기엔 늦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땅의 주인, 진우광.
천마를 제 편으로 만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
그리고 이를 위해 준비해 온 수(手)는 단 세 가지.
그중 첫 번째 수는.
“이미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
천마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춰내는 것이다.
“제가 첩자라는 사실. 이미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랬다. 장이서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곳 천마전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천마의 영역이다. 어느 곳을 가든, 어디에 있든. 그의 기감을 피해 갈 수 없다.’
처음에 왔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점차 들르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의구심이 생겼고, 천마안을 얻게 된 지금은 고스란히 보였다.
천마의 눈이 되어주고, 귀가 되어줄 마의 불씨가 천마전 전역에 가득하다는 것을.
그의 성역이 곧, 천마전 전체에 퍼져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여 깨달았다.
천마는 자신이 처음 우물을 통해 비로로 이곳에 몰래 들어온 걸 모를 리 없다는 것을.
‘재밌는 아이로구나.’
천마와의 첫 만남에서 한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말이다.
그뿐인가.
제 심장에 천마귀를 심은 것도 바로 천마였다. 그때 불타 사라진 고독을 그가 정말 몰랐을까?
천만에.
그는 알고 있었던 거다.
“아닙니까?”
장이서의 당돌한 물음에 천마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장내는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잠잠해졌다.
그리고 천마는…….
“어찌 알았느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어느새 흠뻑 젖은 손바닥을 꽉 움켜쥐었다.
첫 번째 수가 통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두 번째 수.
천마는 자신이 첩자인 걸 알고 있었다.
한데도 아무런 추궁도, 책임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살려주고, 부교주를 맡기려고까지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자신에게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부님 때문 아닙니까?”
자신의 사부 뇌신 한무영.
그와의 연결 고리가 아니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준비해 온 두 번째 수.
“후후, 하하하하하!”
천마의 입에서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화로의 불길이 흔들리고, 천지가 흔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독마가 말해주더냐.”
툭. 바닥에 내려선 그가 미련 없이 이를 수긍했다.
두 번째 수도 통했다!
“다 늙어서 입이 가벼워졌구나.”
“독마께서 말씀해 주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석연치 않아 짐작해 본 것뿐입니다. 그분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단호하게 선을 긋자 천마의 표정이 묘하게 좋아하는 듯했다. 마치 장난감을 빼앗은 아이처럼.
“그럼 이것도 아느냐?”
무얼 말인가.
“네 사부 한무영. 그의 또 다른 이름 말이다.”
사부의 이름이 두 개였었나? 그건 금시초문이다.
“아니요. 모르는 일입니다.”
“무극(無極)이다.”
“예?”
“나의 사부이기도 하지.”
“……!”
머리가 띵 하고 울리며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누가, 누구의 사부라고?
“아직도 모르겠느냐? 날 가르친 전대의 천마 무극이자 본교의 수뇌들과 전전대 천마를 없앤 살수 뇌신 한무영. 둘은 같은 인물이라는 얘기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니 내가 너의 사형이 되겠지.”
“아…….”
이건 예정에 없던 수였다. 아니, 상상도 하지 못한 수다.
신분이 바뀌었다.
첩자에서 마인으로.
그리고 이젠 천마의 사제로.
인생, 참…… 지랄이다.
*
“오거라.”
천마가 다시 태사의로 돌아가 앉고는 턱을 괴고 변태 같은 웃음을 짓는다.
이에 홀린 듯 그의 앞으로 다가가 마주 섰다.
“놀랐느냐.”
안 놀라면 그게 사람이겠는가. 당연히 놀랐다. 아니, 뇌가 굳어진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제게 혈마귀가 있음을 알고서도 죽이지 않은 이유.
독마와 천마 사이에 모종의 인연이 느껴졌던 이유.
천마가 자신을 부교주로 추대하고, 사천까지 마중 나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살려주고 간 이유.
모두 다 이제야 납득이 됐다.
이는 한무영. 바로 하나의 사부를…….
“큭?!”
생각이 마무리 되어갈 무렵. 천마의 손아귀로 빛살처럼 몸이 빨려 들어갔다.
덥석! 그러곤 목줄마냥 붙잡힌 채 그를 목전에서 마주했다.
갑자기 왜?!
“하지만 착각은 말거라. 널 살려둔 건 사부 때문이 아니니.”
“다른 이유가…… 또 있습니까?”
“있지.”
그게 뭔데.
“내가 네 사형이기 때문이다.”
이 무슨 말장난 같은 개소리인가.
눈으로 의문을 던지자 그가 손아귀에 힘을 까득 주며 미소와 함께 말했다.
“보거라. 지금도 이리 널 살려주고 있지 않으냐. 사부가 아닌 사형인 내가.”
사부에게 맞고 자랐나? 무슨 공치사를 이딴 식으로 따지는가.
“그러니 절대 잊지 말거라. 네가 사는 이유는 나 때문이라는 것을.”
“크윽!”
“늘 감사하며 존경하라는 말이다.”
이……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