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286)
첩자의 마교생활-286화(286/350)
286.
#아니길 바랐건만
원점에서 생각해 봤다.
지금까진 암각에서 절 방치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했다. 천산에 오자마자 자질 부적격 판정을 받아, 들개로 살아야 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던 목숨.
한데도 암각에선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버려졌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럴 거였다면 제갈상과 원로들이 그렇게 공들여 가며 요원들을 길러낼 필요가 있었을까.
아닐 거다.
보이지 않는 테두리 속에 가둬둔 채 절 지켜보고 있었을 거다.
그렇지 않다면 고미산 중턱 으슥한 곳에 있던 제집까지 찾아와 임무를 주진 못했을 테니.
그러니까 12호는.
제 가까이에서 절 지켜보고 있었으며, 실력은 당주 급에 또 천산의 출입이 자유로운 사내였다.
그리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 자는 장이서의 머릿속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저 그가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
피잉!
얇은 소음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먼발치 하늘에 폭죽이 쏘아져 올라간다.
신호탄이다.
지금 이장로가 머무는 신월당 주변에는 묘채경과 그녀를 따르는 일부 무사들이 은신해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간단했다.
이장로와 만나는 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만일 자신이 짐작한 이가 맞으면 붉은색을. 아니라면 푸른색 폭죽을 터트리는 거다.
그리고 그 결과는…….
퍼어엉!
붉은 폭죽이 만개하듯 퍼져 나갔다.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건만.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장이서. 어딜 가든 넌 내 식구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하든 기죽지 말아라.’
‘못 버티겠으면 돌아와라. 네 자리는 남겨둘 테니.’
언제든 천산 밖을 오갈 수 있으며, 자신을 십 년간 가르치고 이끌어 주었던 자.
“장형 말이 맞았어! 지금 이장로가 만나고 있는 자는……!”
“방첩대주 겸사익.”
감았던 눈이 스르륵 떠졌다.
그다.
그가 바로 제게 임무를 줬던 12호였다.
첩자를 잡는 방첩대가 요원들을 보호하고 길러내는 본진이었던 것이다.
정작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처음부터 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아갈 길만 있을 뿐.
그러니까.
“가지.”
장이서의 걸음이 언덕 아래 팔 층짜리 화려한 마천루로 향했다.
방첩대 본관으로 출격이다.
* * *
– 천가(千家) 신월당(神月堂).
“자네는……!”
한편 이장로 천오산은 방으로 들어선 자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흑립을 벗고, 복면을 내린 그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
“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로님.”
“방첩대주가 아닌가.”
방첩대주 겸사익.
허리춤에 황금빛 환도 한 자루를 차고 호탕하게 웃는 호남아.
그에 대해서라면 이장로도 잘 알고 있었다.
직급만 놓고 보면 상종도 안 할 한낱 4급귀 대주이지만, 실력은 장로들도 무시 못 할 수준에 과거 삼공녀의 스승까지 하였으니.
“자네가 지난번에 뇌마를 첩자로 몰아간 자였나?”
“뭐 몰아갔다기보다는 의심 가는 구석이 있어서 제보를 한 거지요. 하하!”
이장로의 얼굴이 묘하게 비틀렸다.
처음 알았다.
아니, 뭐 들을 이유도 없긴 했다만…….
“자네였을 줄은 정말 몰랐군.”
“오랜 세월 제 밑에 있던 녀석이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도 그렇겠군. 뇌마가 방첩대 출신이었다지.”
“예. 제가 업어 기른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가벼운 언사에 이장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업어 기른 놈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화병으로 지낸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쓸데없는 과거사는 치우고. 뇌마를 잡을 묘책을 지니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곧 생길 예정이지요.”
“설마 첩자라는 그 얼토당토않은 헛소리를 또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겠지?”
겸사익이 씨익 웃는다. 왜 아니겠는가. 맞다. 하지만 괜히 말을 덧붙일 마음은 없었다. 중요한 건 증거이지, 입씨름이 아니니.
“오다 보니 무사들을 꽤 많이 모으신 모양이더군요.”
“흥, 이것이 대의라는 방증 아니겠는가.”
대의는 무슨. 겸사익이 속으로 피식 비웃고는 맞장구쳐 주듯 답했다.
“맞습니다. 느닷없이 부교주라니. 누구도 원치 않을 일이지요. 하지만 장이서를 우습게 보진 마십시오. 그 녀석에게 물리는 건 많이 아프거든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이장로와 사공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왜 모르겠는가. 장이서한테 이미 뜯기다 못해 만신창이가 됐다.
“그래서?”
“제가 도와드리지요.”
“난 말만 앞서는 자는 신뢰하지 않는다네. 이미 실패한 자라면 더더욱.”
“조만간 칠소궁의 무사들이 폐관을 마치고 나올 예정입니다.”
“……만마분총으로 들어간 녀석들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 칠소궁과 뇌마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던데?”
“확신하십니까.”
당연히 그건 아니지. 이장로가 눈으로 추궁하자 겸사익이 웃으며 답했다.
“칠소궁이 회당에 올 일은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흐음.”
이장로의 딱딱한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나쁘지는 않은 제안. 하지만 그렇다고 만족할 수준까지는 아니다.
한데.
“또한 장이서를 완전히 몰락시킬 증좌도 가져다드리지요.”
“뭐, 뭐라?!”
이장로의 눈에서 안광이 번쩍했다. 완전한 몰락. 이보다 더 완벽한 말이 또 있을까.
“확실한 증거만 가져오거라.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 것이다.”
“하하! 방첩대주가 원하는 게 뭐 있겠소. 첩자 놈 잡아 가두는 게 전부지. 제때 잘만 써 주십시오. 그럼 믿고 갑니다.”
겸사익이 씨익 웃고는 밖으로 나섰다.
이장로와 사공자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
밖으로 나온 겸사익은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주변엔 횃불을 들고 순찰 중인 무사들이 한가득한 게 마치 황궁을 보는 듯했다.
천산의 수뇌들이 파견한 자들이었다.
“우리가 뇌마를 막을 수 있을까?”
“쉿! 쓸데없는 소리. 다 거품이라니까.”
슬쩍 무사들을 살피자 소년처럼 앳된 무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먹은 모습이 보인다.
이에 겸사익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많이 컸구나, 장이서. 이젠 올려다봐야 할 거물이 되었어.”
다 큰 자식을 보는 아비처럼 표정엔 훈훈함이 가득하다.
격세지감이었다.
들개로 떠돌던 시절이 엊그제 같거늘. 이제는 수많은 이가 그를 경외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이장로 천오산이 저리 발을 동동 구르는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그래서.
“안타깝구나. 저딴 인간들의 목구멍에 널 넣어줘야 한다는 사실이.”
겸사익은 씁쓸했다. 그가 장이서를 처음 만난 건 저 소년들처럼, 겨우 열여덟을 맞이했을 때쯤이었다.
‘저 녀석이 103호라고?!’
그때의 장이서 눈빛은 저 소년들과 다르게 무서우리만치 독했고, 사나웠다.
의심을 피하고자 암각에서 수년을 방치한 사이, 완벽한 들개가 되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
만일 미리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가 요원일 거라곤 절대 생각지 못했을 거였다.
‘함께 가겠느냐? 같이 가면 굶을 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장이서는 방첩대원이 되었다.
그 뒤부터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뻔한 나날이었다.
‘저자만 잡으면 되는 겁니까?’
약간의 어색함이 있던 일 년.
‘장이서, 너 이 새끼 똑바로 안 해!’
실수에 인색하던 이 년.
‘대주. 나 오늘 저 새끼 잡는다.’
골칫덩이로 진화하던 삼 년.
‘야, 다들 저 새끼 말려!’
덕분에 주름만 늘어가던 사 년.
‘대주. 오늘 진태가 골로 갔어. 이대로 그냥 있을 거야?’
‘완장 떼라. 그 새끼 멱따러 간다.’
방첩대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된 오 년.
‘장이서.’
‘조져!’
말이 필요 없어진 육 년.
‘저 꼴통 새끼.’
이젠 그냥 웃음만 나오던 칠 년.
‘대주도 장가가야지. 새끼 낳으면 내가 두둑이 넣어줄게. 엽전 두 닢.’
‘꺼져, 이 새끼야!’
징그러운 가족이 되어버린 팔 년.
‘장이서? 아주 넌덜머리가 나는 놈이지. 하지만 굳이 내 다음을 꼽으라면…… 역시 그놈뿐이지. 끌끌.’
어느덧 특별한 녀석이 되어버린 구 년.
그리고…….
【103호에게 임무를 하달하라.】
제 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마지막 십 년.
‘그간 감사했습니다, 대주.’
뻔했지만 특별했던.
길었지만 짧았던.
그런 시간이었다.
장이서와 함께 보낸 시간은.
한데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따르거나, 반하거나.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서글픈 팔자인 게지. 넌 반하였고, 난 따르는 것이니 너무 원망은 말거라.”
겸사익이 표정을 갈음하곤 걸음을 나섰다.
그리고 인파로 가득한 길을 걸어 나가자 그의 주변으로 복면과 흑립을 쓴 이들이 하나둘씩 붙는다.
수는 많지 않으나 눈빛이 묵직하고 강렬한 자들.
방첩대 내에서도 최정예로 통하는 제 일조.
그중에서도 신분이 알려지지 않은 조원들이다.
하지만 그 이면은 겸사익이 천산에서 길러낸, 오직 그만을 따르는 요원들!
“상대는 미친개 장이서다.”
겸사익이 걸어가며 말한다.
이에 일조원들의 얼굴에 싸늘한 긴장감이 서린다.
한때는 동료이자 방첩대 내에서도 전설로 통하던 남자.
“절대 방심하지 마라. 조금만 냄새를 맡아도 사정없이 물어뜯길 테니. 당장 본관으로 돌아가 요원들 자료부터 폐기한다.”
요원들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미친개라면 이골이 날 만큼 잘 안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물리는 건 시간 문제.
이들의 걸음이 다소 빨라지던 그때였다.
“대주, 큰일 났습니다!”
요원 하나가 그림자처럼 다가와 다급히 구두로 위험신호를 보냈다.
겸사익은 시장통 수많은 인파 사이에 우뚝 멈춰 섰다.
왁자지껄 떠드는 음색 사이에 서늘한 불길함이 등골을 스친다.
식은땀과 함께 굳어지는 입꼬리.
설마.
“방첩대 본관이 당했습니다!”
쿵! 겸사익은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벌써……?
“놈이 이미 냄새를 맡은 걸까요.”
요원의 절망 어린 목소리에 겸사익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이건 놈이 냄새를 맡은 게 아니다.”
왜 몰랐을까.
상대는 미친개 장이서인데.
이건…….
“처음부터 우리가 목적이었던 거다!”
부교주 선거는 미끼.
낚인 건 자신들 암각이었다.
장이서는 이미 방첩대 본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휙!
겸사익이 무서운 눈짓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사방 곳곳 지붕 위에 은신해 있는 새하얀 새들이 눈에 담겼다.
‘비룡당?!’
묘채경이다. 그녀가 정예들을 엄선해 이곳에 숨어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서!
‘내가 이장로와 접선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냐?’
겸사익은 순간 눈앞이 노래지며 머릿속에 장이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대주는 따르시오. 난 반할 테니. 대신 서로 원망은 맙시다.’
“장이서…… 크크큭. 아주 제대로 물렸구나.”
겸사익이 낭패감이 깃든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바로 물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진 않는다.
암각 최고의 요원이라 불렸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전원, 전투 준비.”
겸사익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대원들이 그를 보호하듯 진형을 짜고 칼을 빼 들었다.
그러자 지붕 위의 새들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
“쳐라!”
“오호호! 잡아라!”
비룡당과 방첩대.
아니, 암각 요원들과의 접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