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311)
첩자의 마교생활-311화(311/350)
311.
#가짜 명분
그의 등장은 참으로 기이했다.
“저런 쓰레기들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타이르는 듯한 말은 모두의 심금에 울림을 주었고, 홀로 걸어오는 모습은 모든 공기가 그를 중심으로 흘러가게 하는 듯했다.
하여 모두가 할 말을 잊은 것처럼 침묵에 빠졌다.
이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든든하고 다정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섬찟함과 무게감이 같이 느껴지는 기분.
흡사 과거 천마가 나타났을 때처럼 말이다.
이에 마오는 괜히 울컥한 마음을 찡그려 숨기곤 말했다.
“왜 나왔어. 잠이나 더 자라니까.”
“내 집 앞에 웬 발싸개 같은 놈이 짖어대는데 어떻게 잡니까.”
내 집. 칠소궁을 말함이다.
장이서가 씨익 웃자, 마오도 애써 웃음을 지었다.
3년이고, 부교주고.
칠소궁이 제집인 건 여전하다는 마음의 표현.
그게 뭐라고 참 쓸데없이 감동이다.
“그리고 저 자식 칠공자님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닙니다.”
“뭐? 그럼 왜 온 건데.”
왜긴. 저 때문이지. 지금도 충혈된 눈으로 저만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꼭 평생을 기다려 온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장이서…… 오랜만이구나.”
삐뚤삐뚤 올라가는 입꼬리. 장이서는 이를 보곤 비웃으며 말했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훅 들어오는 직언. 이젠 말을 높이지도 않는다. 천무기의 표정이 썩은 생선처럼 일그러졌다.
“겁대가리 없이 까부는 건 여전하구나.”
“피차 오래 봐서 좋을 것도 없는데 용건이나 말해.”
“못 들었느냐. 역모를 저지른 놈들을 벌하러 온 것이다.”
“그 자리엔 나도 있었어. 방립이라고 했나? 별거 아닌 놈이던데. 고작 그런 자가 널 대신한다니 실망인데.”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천무기는 간신히 분노를 다스리며 말했다.
“상대가 누구였든 나의 패를 지니고 있었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섬겼어야 한다. 그것이 본교의 법도인 것이다.”
“아, 법도. 혹시 이 패를 말하는 건가?”
장이서가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은색에 불꽃이 새겨진 신패.
천무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자신이 화염대장 방립에게 주었던 교주 대행 신패였기 때문.
“네놈들이 스스로 역모를 인정하는 꼴이구나! 아니면 내 패를 주웠으니 명분이 있다고 우기고 싶은 것이냐? 뭐든 참으로 천박한 생각이 아닐 수…….”
툭. 천무기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장이서는 천무기 앞에다 패를 집어 던졌다. 마치 너나 처먹으라는 듯이.
“가져가라.”
“이 새끼가 감히 이게 무엇인 줄 알고!”
천무기의 눈에 열불이 터졌다. 감히 교주 대행의 패를 던지다니. 그것도 땅바닥에!
서둘러 몸을 숙여 패를 주웠다. 그러곤 후후 불어 먼지를 털어내려는 찰나.
“법도가 그리 중하다면 그럼 이건 어때.”
슥. 장이서가 다시금 품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다른 화려한 불꽃 문양의 황금빛 신패!
“처, 천마신패-?!”
이를 가장 먼저 알아본 천무기가 경악을 터트렸다.
천마신패야말로 곧 교주를 뜻하는 절세 신패!
“천마지존 만마앙복!”
“천마지존 만마앙복!”
신도들이 넙죽 엎드린 채 목청껏 외쳤다.
마오와 칠무위도 뒤늦게 이를 깨닫곤 더 보란 듯이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반면 천무기와 산왕가는 당황한 채 석상처럼 굳어졌다.
이건 제 꾀에 제가 당한 격.
설마 장이서가 천마신패를 가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에 장이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고 서 있지? 그새 법도를 잊었나?”
이런 개새끼가! 천무기가 영혼까지 탈탈 흔들린다.
“어, 어디서 모조품을 가져와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천마신패는 오직 아버님만이 갖고 계신 것이다. 한데 너 따위가…….”
“말 더듬는 걸 보니 썩 당황한 모양이야. 하긴 여태 부교주가 없었으니 뭘 지니고 있는지도 몰랐겠지. 하지만 명색이 대공자라면 잘 알 텐데. 이게 가품인지, 진품인지.”
“그건…….”
천무기가 입술을 옴짝달싹한다. 왜 모르겠는가. 저렇게 황금에 불꽃이 생생하게 인각된 건 진품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저놈이 천마신패를…….’
천무기는 정신이 혼미했다. 장이서의 내리까는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것이 명분이다. 너처럼 가짜 주제에 말로만 지껄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모멸감.
천마전에서 교주 대행의 패를 받았을 때 얼마나 희열에 젖었던가.
제 분신처럼 아끼고 귀중히 다루었다. 품에 지니고 것만으로도 천마의 선택을 받은 것 같았다.
한데…….
‘처음부터 내가 가짜였단 말인가? 나 천무기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이에 후후 불던 패를 꽈득 움켜쥐었다.
스스스스.
가루가 되어 흩날릴 때까지.
이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전부 죽여버리겠다!”
역모(逆謀)를 추궁하러 온 그가 반대로 역모를 일으키겠다는 것.
“천무기. 이제라도 얌전히 일소궁에 돌아가. 그게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크크큭. 기회? 그건 모든 걸 가진 나 같은 자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네놈처럼 미천한 들개 새끼가 아니라! 뭣들 하느냐!”
천무기가 고개를 까딱인다.
그러자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산왕가의 무사들.
대화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결전이다.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드디어 오랜 악연의 종지부를 찍을 마지막 대결이 시작되었다.
*
홍예교 위에서 벌어진 산왕가와 칠무위의 접전은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크악!”
첨벙! 물 아래로 빠지고, 핏방울이 비산하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들처럼 거침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산왕가와 칠무위는 이미 그들 자체만으로도 오래된 악연.
서로 좋게 끝낼 사이가 아니다.
그리고 산왕가주 파군성은 오늘의 승리를 확신했다.
‘네놈들에 대해선 이미 잘 알고 있다.’
과거 구유와 흉노족이 산왕가를 궤멸 직전까지 몰고 간 적이 있다.
당시 오군장 중 막내가 구유에게 당했고, 흉노족의 단합력과 끈질긴 투기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본인들이 혈교임을 숨겨야 했던 시기.
전장의 용은 인정하지만, 세력전에선 밀릴 이유가 하등 없었다.
한마디로 막상 까보면 외공밖에 안 익힌 그저 그런 놈들이라는 얘기.
그러니 당연히 결과는 산왕가의 압승이었다.
수로 보나, 실력 차로 보나.
분명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오늘만 기다렸다, 이 새끼들아!”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과평과 적진 사이를 누비며 거침없이 쓰러트리는 아신.
그리고 일당백의 무사들처럼 산왕가를 거침없이 날려버리는 칠무위까지.
‘도대체 어떻게……?’
막상 까고 보니 그저 그런 건 자신들이었다.
‘그사이에 모두가 다 강해졌단 말인가?!’
어느 쪽이든 믿고 싶지 않은 일. 표정이 싹 굳어지고, 이내 바로 다음을 지시했다.
“용기야.”
그의 부름에 황금 갑주를 걸친 늠름한 전사를 필두로 세 사람이 앞에 나섰다.
황금대장(黃金大將) 곽용기.
강철대장(强鐵大將) 극철.
질풍대장(疾風大將) 풍진.
이들이야말로 힘든 시절부터 혈교의 수족이 되기까지.
자신의 발자취를 함께한 가족과 다름이 없었다.
또한 지난 3년 새 영약과 온갖 지원으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진 상태.
질풍대장 풍진의 움직임은 가히 바람과 같고, 강철대장 극철의 몸은 만년한철과 같았다.
황금대장 곽용기는 저를 제하면 가장 강한 완성체.
그러니 이들이라면 상황을 뒤엎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끄아아악-!”
“요, 용기야!”
바로 그때 믿을 수 없는 비극이 눈앞에 연이어 펼쳐졌다.
제 앞에 주르륵 밀려온 황금대장 곽용기를 시작으로 세 사람이 순식간에 작살이 난 것.
눈이 번쩍 떠지고, 머릿속의 사고 회로는 멍해졌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다시 전방을 살피자 정확히 그들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창룡도를 든 채 풍진을 숯불구이로 만든 염제 마오.
한철로 만들어진 갑주를 누더기로 변화시킨 권마 구유.
마지막으로 제 앞까지 밀려와 눈도 못 감고 즉사한 황금대장 곽용기.
어떻게 당했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그저.
“뇌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이쪽을 보며 서 있는 장이서.
그와 마주했다는 것밖에는.
3년 새에 달라진 건 자신들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쓸모없는 것들.”
결국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천무기의 비릿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에 파군성은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다는 뜻.
하지만 괜찮다.
결국 무림인의 전쟁은 수 싸움이 아니다. 진정한 강자가 누구냐를 가리는 것.
최상위 포식자의 싸움이란 얘기다.
그러니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전부 치워라. 내가 직접 처리할 것이니.”
천무기의 참전 선언에 파군성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그러자 접전을 벌이던 산왕가 무사들이 하나둘씩 퇴보한다.
칠무위도 마오의 손짓에 더는 쫓지 않고 이를 기다렸다.
사이가 벌어지자 전황의 추는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무사들 태반이 산왕가의 옷을 입고 있던 것.
살아서 퇴보한 이들의 눈빛도 마치 지옥에 발을 들였다 온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반면 칠무위의 투기는 더 거세게 달아올랐다.
산왕가가 밀린 것이다.
오군장도, 전사들도. 모두 다.
저 빌어먹을 칠소궁 녀석들에게.
“네놈들은 늘 이런 식이다. 미천한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이빨을 들이밀지.”
천무기는 물린다는 듯 경멸의 눈빛을 띠고는 앞으로 나섰다.
이 정도면 악몽의 재현이다.
흑화위가 당했던 3년 전처럼. 이번에는 산왕가가 당한 것.
하지만 다른 점도 한 가지 있었다.
“이번엔 아버님께서 네놈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더는 자신을 막아줄 존재가 없다는 것.
그러니까.
고오오오오오!
“모조리 상대해 주마.”
천무기의 검에서 시커먼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성명절기인 파천흑마공(破天黑魔功)이다.
과거에도 살벌했지만 이젠 완전히 검을 감싸다 못해 길게 솟아난 것이 확실히 더 강해진 모습.
이를 지켜보던 마오가 나지막이 제안했다.
“장이서. 그때 우리 설롱산에서 했던 말 기억 나?”
설보산이겠지.
“그때 내가 소교주 되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난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나 그거 여전해. 지금도.”
안다. 눈빛만 봐도 진짜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가벼움 속에 무게가 서려 있으니.
“근데 하나가 달라졌어. 처음엔 너 때문이었거든? 근데 이젠 아니야.”
“그럼 뭡니까.”
“못 지키니까. 힘이 없으면 내 식구들도 그리고 내 신도들도. 전부 지켜낼 수가 없잖아.”
“……!”
“그래서 나 소교주 하려고.”
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놈이었나. 입가는 가벼우나 눈빛이 너무도 진중해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다.
“갑자기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저 자식…… 나한테 넘겨.”
예상치 못한 말에 흠칫 놀라 마오를 다시 살폈다. 지금 대공자 천무기를 제가 맡겠다고 한 것인가.
“마이신도 그렇고, 저 자식도 그렇고. 어쨌든 빌어먹을 내 형이잖아. 어쩌겠어. 나라도 말려야지.”
너…….
“그리고. 이제는 저딴 자식한테 질 것 같지가 않거든.”
처음이었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고 든든해 보이는 모습은.
강해졌구나, 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