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319)
첩자의 마교생활-319화(319/350)
319.
#냄새가 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난 그냥 최선을 다해 버틴 것뿐이다.”
그의 길었던 이야기가 끝나고 장이서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알던 대주의 모습이 송두리째 깨져버린 기분.
이보다 더 첩자다운 삶이 있을까.
“날 그리 보지 말거라. 그저 난 너처럼 반하지 못한 것뿐이니.”
얕게 뱉어지는 한숨. 장이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에 이해하기엔 너무 멀리 갈라섰다.
“하나만 묻지. 그럼 암각의 명을 따른 것도 천마의 뜻이었나?”
“크큭, 넌 아직도 천마를 그리 모르느냐?”
“무슨 뜻이지?”
“그는 내가 어디에 속해 있든. 무얼 하든. 관심이 없는 자다. 그저 자신이 시킨 일만 해내면 그뿐인 거지.”
하긴. 뇌옥왕이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 걸 알면서도 버젓이 살려둔 자가 바로 천마였다.
그가 사소한 모략까지 가담했을 리 없는 일.
“천마가 내게 내린 명은 단 하나. 혈교에 잠입해 한 사람을 찾아내라는 것뿐이었다.”
“누구를.”
“한무영.”
“……!”
“그것이 그가 내 정체를 눈감아주는 조건이었다.”
어째서…….
“더는 묻지 말거라. 그 이상은 나도 모르니.”
머릿속이 살짝 혼란스러워진다. 그럼 사형은 계속해서 사부를 찾고 있었던 것인가.
언제부터.
아니, 그것보다도.
“그래서 찾았어?”
“크크, 그랬다면 내가 이곳에 갇혀 있겠느냐? 듣지도 못했다. 뭐,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침음이 뱉어진다. 그리고 겸사익과 지그시 눈을 마주했다.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자 현실이 보인다.
너무도 차분한 눈빛.
입을 다물려면 얼마든 다물 수 있었을 거다. 아무 이유 없이 인정했을 리는 없을 터.
표정을 갈음하고 물었다.
“바라는 게 뭐야.”
“크크, 역시 미친개답구나. 찰떡같이 알아듣는 걸 보니.”
“헛소리 말고 말해.”
“날 여기서 내보내다오.”
절로 인상이 확 찌푸려지는 소리.
“조용히 천산을 떠나겠다. 지금의 너라면 가능한 일 아니더냐.”
공교롭다. 그의 정체를 추궁해 알아냈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를 인정하고 목적을 밝힌다.
문득 처음 들어왔을 때 겸사익이 한 말이 떠올랐다.
‘크큭. 고작 3년 아니냐. 우리 같은 자들에게 기다림은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일이지. 앉거라.’
설마.
“3년간 기다렸다는 게 나였나?”
“너라면 냄새를 맡고 날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미친개 아니더냐.”
“이제 보니 안가에 가면을 놔둔 것도 일부러였군.”
그야말로 기가 막힌 일.
“근데 왜 놀랐던 건데.”
어이가 없어서 묻자 겸사익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한편으론 몰라주길 바랐으니까.”
빌어먹을. 그래도 일면은 대주이고 싶었다는 건가. 욕심이 지나치다.
“널 속였던 건 미안하다. 하지만 너와 함께할 때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어.”
“그렇겠지…….”
겸사익의 얼굴에 씁쓸함이 가득하다. 하나 부질없다.
“아는 걸 말해. 풀어줄지 말지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때 얘기니까.”
“크큭, 차가운 녀석 같으니.”
“잊었나? 우리는 인연이나 낭만에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는 거. 죽으면 경조사는 챙겨주지.”
겸사익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칼자루를 쥔 건 장이서. 어쩌겠는가. 따라야지.
“혈교에 오랜 시간 몸담았지만 나도 그들의 실체는 본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지. 애초에 내가 속한 흉신팔주도 원래부터 혈교가 아니니까.”
알고 있는 얘기.
“그런 우리끼리 만날 때도 가면을 쓰니 서로의 신분을 알지 못한다. 물론 대화를 하다 보면 유추할 수는 있지. 해서 오흉이 무림맹인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군사인 것까진 알지 못했다.”
“거래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들리는군.”
“성급하긴. 하나 물으마. 산왕가주가 흉신팔주였나?”
눈매가 좁혀졌다. 아무것도 모른다더니. 그건 또 어디서 들었는가.
“맞아.”
“역시 그랬군. 참석이 가장 뜸했던 걸 생각하면 그가 사흉이겠군.”
정확하다. 의문스럽게 바라보자 겸사익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일흉이라면 내가 사라진 순간 바로 그 자리를 채워놓았을 테니까.”
“일흉?”
“흉신팔주의 수장인 자다. 누구보다 음흉하고 위험한 자이지. 흑혈에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강자이기도 하고.”
흑혈. 적아린이 속했던 곳이다. 문제가 있는 자들을 청소하는 자객 단체.
“만일 산왕가주가 이 안에서 무언가를 획책했다면 그건 모두 일흉의 뜻일 거다.”
전쟁을 준비한 게 그라는 얘기.
“그가 누구지?”
“모른다.”
무의미한 대화. 인상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지.”
마지막 기회다.
“정도에 숨어든 첩자는 군사 하나가 아니라는 것.”
“뭐……?”
“일흉은 정도의 사람이다. 그것도 스스로 무림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는 아주 큰 거물.”
“……!”
“맹주를 살펴라. 분명 그의 신변에 네가 찾는 답이 있을 테니.”
뒤를 돌아보자 겸사익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씨익 웃는다.
“……풀어주는 건 사실부터 확인한 다음.”
“후후, 기다림은 늘 익숙한 법이지. 다녀오시지요, 부교주님.”
빌어먹을 양반.
*
장이서는 뇌옥에서 나와 곧장 묘채경에게 조사부터 명했다.
3년 내 정도 맹주 주변에 특이점이 없는지. 새로운 세력이 나타난 건 없는지.
그리고 해가 저물기도 전에 그녀는 식솔들과 대화 중이던 칠소궁으로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부교주님 말씀대로 이상한 점들이 있었습니다.”
빌어먹을. 아니길 바랐거늘.
“아무래도 맹주에게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
장이서를 비롯해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에 묘채경은 서신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보시지요.”
서신을 받아 펼치자 생소한 소식이 시야에 담긴다.
【무림맹주 현청 귀주로 낙향. 조만간 퇴임을 준비 중인 것으로 확인.】
퇴임이라니. 너무 놀라 헛숨이 뱉어졌다.
“당주 외에는 볼 수가 없는 특급 정보라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만, 이미 전부터 얘기가 나오고 있던 모양입니다.”
대체 왜. 아니,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는 이미 구순을 바라보는 혼란의 1세대 인물.
천마인 사형과 사도련주가 전란의 2세대임을 감안하면 분명 한참 전에 세대가 바뀌었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련주와 사형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줄 알았거늘.’
솔직히 완성된 그림의 삼분지 일이 텅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이건 이미 수십 년 넘게 균형을 이루며 평화 협정을 마친 세 절대자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이리라.
한데 그런 그가 퇴임을 한다니.
이건 평화롭던 무림에 대격변을 예고한 것과도 마찬가지.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묘채경이 말끝을 흐린다.
“3년 전부터 맹주는 두문불출한 채 일선에서 물러서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1세대인 신주오절들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그때부터 준비했던 게 아닐는지요.”
3년 전이라면……. 군사의 죽음 이후를 말하는 것인가.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오륜회라는 자들이 나타나 지금은 중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오륜회(五輪會).
본래 명가에서 시작한 가벼운 친목 모임이었으나, 단기간에 거침없이 세를 키운 이들이었다.
비공식적인 모임인 터라 실체가 불분명하나, 그들의 허가 없이는 작은 문파조차도 운영하기 힘들다는 것이 작금의 통례.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소오가 그건 아닐 거라며 고개를 내젓자 묘채경이 얕게 숨을 뱉곤 답했다.
“보거라. 3년 새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몰락해 가는 문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오륜회에 들지 못했다는 것이지.”
묘채경이 내려놓은 서류에는 수많은 문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수만 무려 서른여 곳.
장이서는 침음하며 나직이 물었다.
“구파일방에서 이를 가만히 놔뒀단 말입니까?”
“아시다시피 구파일방은 세속과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하나 오륜회는 다릅니다. 상단부터 시작해 황실의 관료들까지. 모든 영역에 전반적으로 걸쳐 있지요.”
이것이 바로 오륜회가 정도 무림을 단기간에 집어삼킬 수 있던 이유였다.
아무리 도를 닦고, 불경을 읊는 자들이라도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도움이 필요한 바.
오륜회는 바로 이점을 파고들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통제해 버리니 버틸 재간이 없는 것.
더구나 같은 정도의 친목 무리이니 거세게 견제할 수도 없는 노릇.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난다. 그것도 아주 독하게.
만일 일흉이 정도의 거물이라면, 그가 곧 오륜회의 수뇌부일 확률이 높다.
맹주가 지친 틈에 교묘히 장악에 들어간 것.
“어찌할 것이냐.”
잠자코 듣던 독마 사숙이 묻는다.
장이서는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겼다.
만일 무림맹주가 퇴임을 선언한다면 그 후는 어찌 되겠는가.
일흉이 무림맹을 장악하기라도 하는 날엔 중원은 끝이다.
절대 그리 놔두어선 안 될 일. 맹주의 퇴임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마침내 장이서의 결단이 내려졌다.
“제가 직접 맹주를 만나봐야겠습니다.”
“뭐어?!”
부교주에 올라선 지 어느덧 한 달 남짓.
3년 만에 강호 출두다.
* * *
– 중원 귀주(貴州) 화림현(花林县).
사시사철 따뜻하여 푸른 산과 수풀이 가득한 아담한 마을.
이곳의 오랜 세월 비어 있던 거대한 장원에 주인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무림맹주 현청.
낙향한 그가 제 처소를 처음으로 찾아온 귀한 벗을 맞이했다.
겉보기엔 그냥 무단 침입한 거지가 따로 없지만, 허리춤 열 개의 붉은 매듭을 보면 결코 그리 막대할 수 없다.
“맹주 직에서 내려오겠다는 게 사실인가? 제정신인 게야?!”
수년 만에 나타나 냅다 맹주한테 성질부터 내는 거지. 아니, 유일하게 성질부릴 수 있는 거지.
신주오절의 일인.
개방의 태상방주인 북개 취걸륜이었다.
“우선 좀 앉게. 만나자마자 뭐 그리 급한가.”
현청은 그런 벗의 성질마저 반가운지 허허 웃으며 자리를 안내했다.
반면 취걸륜은 우유부단해 보이는 모습에 더더욱 속이 근질거렸다.
늘그막에 예까지 무슨 기분으로 달려왔겠는가. 아주 복창 터지는 줄 알았다.
또르르.
한데 그런 속도 모르고 뜨신 차를 따라주고 앉았으니.
“들게나.”
“됐네!”
화만 더 나지. 북개가 고개를 휙 돌린다. 단단히 토라졌다는 얘기. 현청은 이에 픽 입꼬리를 올렸다.
예부터 신주오절 내에서도 취걸륜과 제갈상은 그에게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서검 여중악은 제일검(第一劍)을 두고 후기지수 시절부터 경쟁이 치열했기에 서먹함이 있었고.
신승은 모두에게 공대를 하고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니 가까워지긴 어려웠다.
반면 세 사람은 서로 술을 좋아한 데다, 의협심이 강해 일찍이 의기투합한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이토록 화가 잔뜩 난 채 찾아왔다는 건…….
‘그새 찾아가 또 사정했나 보군.’
뻔했다. 자신이 퇴임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자 수뇌들이 애꿎은 북개를 찾아가 호소한 것.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한 게야?! 거 변명이라도 해보게.”
현청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뱉어졌다.
여태 이 질문만 수백 번은 들었다.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답한 적은 없다.
다른 이였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내보냈을 터.
하지만.
“하나만 물음세. 날 말리러 온 겐가, 얘기를 들으러 온 겐가.”
“에잉! 이런 촌구석까지 온 자네가 어디 말린다고 들을 사람인가?”
이유만 알면 된다는 얘기. 현청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곤 먼 산 보듯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젠 지친 것 같네.”
북개는 침음을 삼켰다.
자신이나 제갈상이면 몰라도 맹주나, 서검. 그리고 신승은 노화라는 필멸의 저주를 비껴간 자들.
굳이 따지자면 언제고 선계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처지다.
그러니 육신이 지쳤다는 건 결코 아닐 터.
“혹 그날의 일 때문인가?”
망설임 없는 발언에 현청의 눈매가 흠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