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321)
첩자의 마교생활-321화(321/350)
321.
#청해의 백서
– 중원 귀주(貴州) 화림현(花林县).
눈꽃이 몰아치는 천산과 달리 따스한 벚꽃의 봄기운이 완연한 마을.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흑립을 눌러 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손엔 검은 반지. 허리춤엔 옥구슬의 장신구. 그리고 널찍한 소매 속엔 검은 완갑이 도드라진다.
그의 이름은 장이서.
“이곳인가.”
낙향한 맹주를 만나러 온 천마신교의 부교주였다.
목적은 퇴임식이 열리기 전, 맹주를 비밀리에 만나 혈교의 만행을 전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함.
물론 공식적인 만남을 청할 수도 있겠으나, 혈교가 어디까지 퍼져 있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은밀히. 아주 조용히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웅성웅성.
사시사철 한적해야 할 촌구석에 대체 뭐 이리 사람이 많단 말인가.
그것도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무림인들투성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소문이 퍼졌구나.’
특급 정보라는 말에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다.
다른 이도 아닌 맹주 현청. 무려 반백 년 동안 백도의 정점이었던 인물이다.
아무리 감추려 한들 태산이 움직이는데 어찌 잡음이 없으랴.
그의 거취에 이 정도 부산물이 뒤따르는 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나기가 쉽지만은 않겠구나.’
그렇다고 이 정도 변수에 흔들리는 건 장이서답지 않은 일.
금세 마음을 다잡고 마을로 들어섰다.
무림인들이 종종 보여서 그렇지, 그래도 나름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마을 주변은 작은 산들이 둘러싸 정취가 있고, 따스한 햇살에 비해 나무가 많아 시원하고 산뜻하다.
그야말로 은퇴 후 여생을 보내기에 나쁘지 않은 곳.
왜 굳이 연고도 없는 이곳을 골랐는지 조금은 알겠다.
“어서 오십시오.”
낡은 객잔에 들어서자 점소이가 힘없이 맞이한다.
손님이 많아져 웃음꽃이 핀 객주와 달리 죽상이 따로 없다.
“아무 데나 앉으세요.”
그러려고 온 건 아니고. 북적이는 장내를 가볍게 살피곤 품에서 엽전을 꺼내 건넸다. 그러자 점소이의 눈이 띠용 커진다.
“방 하나를 얻었으면 하는데. 기왕이면 해가 안 들고 조용한 곳으로.”
“마침 딱 좋은 방이 하나 있습죠!”
다행이네.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점소이가 신나게 위층으로 안내한다.
“타고 오신 말은 제가 마방(馬房)에 맡겨두겠습니다. 이쪽입니다.”
끼이익.
이내 구석진 곳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정말 혼자 오셨군요.”
빛 없는 낡은 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반겼다.
“오호호! 부교주님께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장난스레 활짝 웃으며 인사를 올리는 여인. 분명 다른 얼굴이지만 그녀였다.
이제는 그저 반갑기만 한 비룡당주 묘채경!
그녀가 미리 와서 동태를 살피고 있던 것.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픽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어느새 화려했던 깃털 옷도 버리고, 인피면구를 쓴 참한 아낙으로 변신해 있다.
“숨어 지내는데 별수 있겠습니까. 잘 아시면서.”
알지. 협탁에 앉자 그녀가 문밖을 다시 한번 살피곤 돌아와 마주 앉는다.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지낼 만은 했습니까?”
“이 집 저 집 반찬도 만들고, 바느질도 해주고. 곧잘 지냈습니다.”
찬모와 침모(針母) 노릇이라니.
‘옷이 찢어졌다고요? 오호호, 그 입 구멍부터 메꿔주마.’
상상은 잘 안 가지만, 비룡당주인 그녀는 이 분야의 전문가.
마음만 먹으면 수백 번이고 신분 바꾸는 건 일도 아니다. 그만큼 얻은 정보도 많을 거라는 얘기고.
“이미 보셨겠지만 상황이 조금 안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설명을 이어갔다.
“소문이 어찌나 빨리 퍼진 건지. 며칠 새 몰린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맹주 측에서도 이 때문에 난처해하는 듯하고요.”
그랬겠지. 요란을 떨 거였다면 뭣 하러 이런 외진 곳까지 왔겠는가.
분명 퇴임식까지 생각 정리라도 할 겸 조용히 칩거하고자 찾은 것일 터.
단기간에 퍼진 것이면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냈을 확률이 높다.
단지.
“범인을 특정하기는 어렵겠군.”
“예. 워낙 은원관계가 복잡하기도 하고, 자리를 비우는 순간부터 수많은 이가 의문을 품었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나마 가장 의심스러운 건 무림맹과 대척 중인 오륜회인데…….”
오륜회.
명가(名家)를 중심으로 3년 새 무림맹을 위협할 만큼 급부상한 조직.
일흉이 개입되어 있을 공산이 유력한 자들이다.
“하지만 동기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굳이 이런 사달을 일으켜 얻을 게 무엇인가 싶고요.”
묘채경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알아서 퇴임해 주겠다고 낙향한 맹주를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무엇인가.
상식적인 선에선 타초경사다.
“오륜회 쪽은 차도가 있습니까.”
말이 나온 김에 물었다.
그들의 실체에 접근했냐는 의미.
“아직입니다. 그래도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묘채경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말은 길게 안 했지만, 아마 소오가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니고 있을 거였다.
서역에서 온 부호 행세하며 오륜회에 들어가려고 용을 쓰고 있을 테니.
뭐, 그건 그거고.
“어쨌든 의심되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겁니다.”
그녀가 품에서 고이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올렸다.
그러곤 이를 펼쳐보라 눈짓을 보낸다.
이에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활짝 펼치자, 그 안엔 생각지도 못한 글귀가 담겨 있었다.
【호위무사 모집. 정원 50명. – 맹호원(盟護院)】
이건……!
“예. 맹주 쪽에서 붙인 공고입니다. 누가 누구를 호위한다는 건지, 원. 어쨌든 너무 많은 이가 마을에 몰리니 저들도 둘이선 별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둘이요?”
“예. 맹주와 총관. 귀주에 단둘이 왔답니다.”
“그게 무슨…….”
“어이가 없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근데 사실입니다. 장원은 큰데 안은 텅 비어 있는 셈이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이야기. 아직 퇴임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뭐, 어쨌든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맹주 주변에 사람을 심어둘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 말이지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는다.
좋은 기회.
맞는 말이다.
맹주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그게 혈교든.
아니면, 나든.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끼이익!
창문을 열어젖히자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밝은 햇살이 안으로 스민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먼발치를 살폈다.
언덕 위에 산을 등지고 웅장하게 자리한 장원 하나.
맹호원(盟護院).
맹을 지키겠다는 포부가 담긴 이름. 무림맹주 현청이 머무는 곳이다.
과거 속했던 조직의 수장이자,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기억 속의 그는 매우 멀었고, 또 이상한 어른이었으니까.
말마따나 암각에서 한창 수련 중이던 어린애 앞에서 이기어검술 같은 초상승 무공을 펼쳐 보이다니.
내기도 못 다루는 애가 본다고 뭘 알겠는가.
심지어 자신이 구규지체인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넌 선천적으로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몸이다. 알고 있느냐.’
사람 놀리려고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듣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어서 해준 가르침들도 괴상했다.
‘음양은 천지 만물을 이루는 근간이오, 흐름이니라. 때로는 대립하나, 때로는 공존하며, 어느덧 조화와 평형이 유지되니 그것이 곧 우주이리라.’
선문답도 이런 선문답이 없다.
물론 그 덕에 시간이 흘러 구규지체의 첫 번째 구멍을 막았고, 음양일원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으니 욕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은인인 것 같기도 하고.’
피식 웃음을 삼켰다.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두자. 설마 다른 의미가 있어서 알려주었겠는가.
그냥 늙은 도사의 유희였을 거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네게 천운이 닿으면 언제고 깨달을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아니면 말고.
뭐 그런 될 대로 되라 식의 아량 말이다.
당연히 잠시 만난 저를 기억할 리도 없고, 저 역시도 무림맹에 미련을 닫았다.
그저 하루빨리 맹주에게 혈교의 심각성을 알려 이런 애들 소꿉놀이는 집어치우라고 말해주고 싶을 뿐.
“부교주님, 준비 다 됐습니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묘채경이 들어와 서 있다.
고이 접은 옷가지와 새로운 신패를 손에 들고서.
“시작합시다.”
천마신교 부교주 장이서.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날 시간이다.
*
“갑니다, 가요!”
객잔의 점소이는 정신이 없었다.
늘 파리만 날리던 곳에 요즘은 낮이고 밤이고 손님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
입꼬리가 찢어진 객주를 보면 배가 아파 때려치울까도 했지만, 종종 따로 몫을 챙겨주는 손님들 탓에 힘겹게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간신히 일을 마치고 숨을 돌리려는 찰나.
저벅, 저벅.
객실이 있는 2층에서 백의를 입은 손님 하나가 내려섰다.
앞머리가 눈 아래까지 덮어 답답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올려 묶은 머리가 또 나름 분위기가 있다.
갸름한 하관과 제법 높은 코가 호남형인 것 같기도 한데…….
“저런 손님이 계셨나?”
웬만하면 손님 얼굴은 다 기억하는 편인데, 요즘 도통 바빠서 그런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여기 청주 한 병!”
하긴 뭔 상관이랴.
제 객잔도 아닌 것을.
“예, 가요!”
점소이가 픽 웃고는 달려 나갔다.
그사이 사내는 객잔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물론 머물렀던 건 맞긴 하다.
단지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전혀 다른 모습이라서 그렇지.
그의 이름은 백서.
나이는 서른넷.
청해에 있는 백가장(白家莊)의 소장주로서 평소 무림맹주를 동경하여 무작정 예까지 달려온 자다.
물론.
‘곧 찾아뵙도록 하죠.’
목적을 다하면 사라질 신분이지만 말이다.
* * *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장원.
미간의 천(川)자 주름만 봐도 상당히 예민해 보이는 중년인이 대문 앞에 섰다.
그의 이름은 등태보.
무림맹 총관으로 오랜 세월 맹주를 보필해 온 최측근이다.
지금은 맹주보다 먼저 사직서를 내고, 맹호원 총관으로 재직 중.
그리고 장원 앞에 몰려든 이들 탓에 가장 골머릴 썩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했다.
“총관님이시다!”
“등 총관님이 나오셨다!”
“와아아아!”
도대체 이게 뭔 소란인지.
그야말로 골머리가 지끈거린다.
자신은 수저 하나를 놓아도 가지런히 놔야 밥이 넘어가는 사람이거늘.
이건 뭐 무질서하게 몰려 있는 꼴이 도떼기시장에 몰려든 잡상인이 따로 없다.
정말 오늘 밥 먹기는 글렀다.
게다가.
‘정녕 이자들을 안에 들여야 하는 것인가.’
저들 중 호위무사를 뽑아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하나 별다른 수도 없긴 했다.
이미 조용하던 마을은 바람 잘 날 없었고, 무수히 몰려드는 이들을 진정시키려면 뭐라도 하긴 해야 했으니.
그저.
“지원하러 온 자들은 한 줄. 아니 열 줄로 서시오!”
이 중에 진정으로 함께할 만한 자들이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하겠소!”
와아아아아!
낙향한 맹주의 거처 맹호원.
함께 상주할 호위무사 모집을 위한 시험이 드디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