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323)
첩자의 마교생활-323화(323/350)
323.
#극로
“총관님, 검에 이가 나갔습니다. 바꿔 주십시오!”
“제가 쓰던 검과는 검파의 길이가 다릅니다!”
곳곳에서 응시자들의 호소가 이어졌다.
하나 총관은 묵묵부답.
당연했다. 신검이 아니고서야 미약하게라도 검기를 두르지 못하면, 어차피 성공할 수 없을 테니.
모래알 틈에 섞인 옥석을 가려내기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봐, 백 공. 저기 보이나.”
조진평이 두 개의 바위를 턱짓했다.
완전히 양분된 바위 하나와 수백 조각으로 박살이 나버린 바위 하나.
“역시 그들 둘이 한 거겠지?”
진룡 진자량과 창궁룡 남궁신을 말함이다.
후기십룡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라더니. 흔적만 봐도 확실히 허명이 아니란 건 잘 알겠다.
“소문만큼 정말 대단하군. 이런 검으로 어떻게…….”
어느새 한산해진 진열대에 다다르자 조진평이 통탄의 한숨을 길게 뱉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검의 상태가 더 심했기 때문.
이를 보며 별다른 생각 없이 작게 중얼거렸다.
“근데 왜 검뿐이지?”
“칵!”
그러자 조진평이 기함했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등 총관이 슬쩍 고개를 들곤 찌릿 노려본다.
“이보게 백 공. 오직 일검일로(一劍一路)만을 걸어오신 맹주님 아니신가. 그분의 곁에 머물려면 당연히 검술이 기본이어야지.”
그런가. 호위무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거기까진 생각 못 했다.
“자네 설마 검술을 배우지 않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허리춤에 패용한 검도 없고.”
조진평의 경악에 장이서는 진열대에서 검 하나를 꺼내 쥐곤 답했다.
“여기 있네.”
벙찐 조진평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정식으로 검을 배운 적은 없다. 들개 생활 하며 닥치는 대로 싸우면서 익힌 게 전부.
그마저도 백뢰를 얻으면서 내려두었지만.
“다 골랐으면 이만 줄 서시게!”
등 총관의 재촉에 조진평이 다가와 결의에 찬 눈으로 말했다.
“백 공, 우리 꼭 합격해서 만나세!”
그러곤 제 두 손을 꽉 한 번 쥐고는 우측 끝으로 후다닥 달려 나간다.
사람 참 싱겁긴.
픽 웃고는 장이서는 마지막 자리에 섰다.
그러자.
캉!
장내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줄을 선 이들이 시험을 치르기 시작한 것.
“3번, 12번 탈락. 나가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는 것도 정도인의 자세인 걸 모르는 겐가? 나가시게.”
등 총관은 어느새 다가와 가차 없이 판결했다.
자칫 냉혹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는 백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어느새 장이서의 차례가 되자 등 총관이 옆을 스치며 다 들으란 듯 조언했다.
“맹주님께서 자네들을 생각하여 직접 준비하신 자리일세. 그러니 신중히들 임하시게. 기회는 한 번뿐이니.”
이 화강암들이 다 맹주가 직접 준비한 거라고?
듣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평소 정도후학회를 열 만큼 후배들을 아낀단 소리는 들었었다.
하지만 암각의 요원이었던 장이서에겐 그리 와닿는 말은 아니었다.
만인에겐 어떤 맹주였을지 모르지만, 그에겐 사지로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몰래 육성한 비정한 맹주였으니.
캉!
다시금 쇳소리가 귓가에 박힌다.
정신이 일깨워지고 장이서는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채 화강암 앞에 마주 섰다.
맹주가 직접 준비한 것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문득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기는 의념을 도와주는 매개체일 뿐. 정신의 깊이가 경지에 다다르고, 뜻이 통하였다면 설령 내기가 없더라도 그 무엇이 동하지 않으리.’
분명 공력을 담아 베어낸다면 검술의 깊이가 얕은 저라도 이 시험은 우습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가벼운 일장에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맹주의 배려에 심기가 살짝 언짢아졌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맹주가 한 말이 불현듯 떠올라 무심코 본능이 따랐기 때문인지.
장이서는 청개구리처럼 일말의 공력도 주입하지 않고, 서늘한 표정으로 자세를 취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인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제 자신은 암각의 요원이 아닌 마교의 부교주가 됐음을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핑!
안광이 번뜩이며 눈앞에 수많은 결이 그려진다.
떠다니는 먼지, 바람의 흐름. 대기를 형성하는 입자.
그중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만의 검로(劍路)를 찾았다.
그리고.
수아아악!
횡으로 검을 그었다.
아무런 내공도 없이, 그저 베겠다는 일념만으로!
그 결과는…….
콱!
“음……?!”
기괴한 소음에 시선을 돌린 등 총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동시에 장이서는 홀렸던 정신을 바로잡았다.
천마안이 서서히 옅어지고, 이내 검파에서 손을 뗀 채 한 걸음을 뒤로 물렀다.
검은 정확히 화강암 정중앙에 박혀 버렸다.
등 총관은 기이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벤 건가? 찌른 것인가.”
미처 보지 못한 그로서는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빠지지도 않고 박혀 버리다니.”
등 총관이 검파를 쥐고 빼 보려 해도 검은 바위 안에 갇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릇 베었든, 찔렀든 지나온 길은 있기 마련이거늘.
아무리 봐도 그 흔적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내기를 다루긴 한 것인가.’
직접 보질 못했으니 알 수가 없는 일.
무림맹의 안살림을 맡아온 등 총관으로서도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으음…….”
하지만 규칙은 규칙.
“합격일세.”
등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맹(盟)이라는 글귀가 적힌 나무 신패를 건넸다.
“사흘 뒤에 맹호원으로 나오시게.”
장이서는 묵묵히 이를 바라보다 짧게 묵례를 취한 뒤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하, 하하하하! 돼, 됐다-!”
우측 끝에선 커다란 외침이 터졌다.
조진평이다.
그가 전력을 다해 펼친 일격으로 바위에 금이 서린 것.
방방 뛰며 환호하는 모습에 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느덧 해가 저문 저녁.
드디어 시험이 끝이 났다.
* * *
어느덧 밤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고, 인파로 가득 찼던 시험장도 한적해진 시각.
암벽 앞 공터에는 웬 백의의 노부가 홀로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현청.
퇴임을 앞둔 무림맹주이자 이번 시험을 준비한 장본인이다.
이 야심한 시각에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하나.
“흐음……. 날보다 상흔이 넓다는 것은 공력을 담아내긴 하였으나 날카롭게 세우지는 못한 것이겠지.”
가지런히 놓인 오십 개의 화강암.
이 안에 새겨진 흔적으로 시험에 참가한 이들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미 합격한 이들을 두고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고질적인 취미였다. 후학들의 수를 살펴보고 이를 유추하는 것.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의 경지쯤 되면 어떻게 검을 대해왔는지, 또 어떤 마음으로 수를 펼쳤는지가 훤히 보였다.
이는 단순히 그가 화경에 오른 고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검을 수련한 최고의 검객이자, 수많은 후학을 봐왔던 맹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보람을 느껴 종종 가르침을 내려주기도 했다.
“아직 물도 다 차지 않았거늘, 배부터 띄우려 하니 제대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선문답에 가까운 터라 못 알아듣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험의 흔적을 살피는 건 맹주의 지친 일상에 단비와도 같은 일.
“흐음, 이미 베어낼 실력은 충분하거늘. 검을 믿지 못하였구나. 부서질까 두려워 여기서 힘을 거둔 것이야.”
그들의 이름도, 출신도 알지 못했지만, 저와 함께 할 자들의 특징을 꼼꼼히 기억했다.
맹주가 먼저 쌓는 내적 친밀감.
이것이 바로 수많은 이가 그를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리라.
그리고.
“그새 더 진일보하였구나. 훌륭하다.”
말끔히 두 동강 난 바위 앞에 서서 처음으로 호평을 터트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잘 아는 자였다.
자신과 같은 사문의 아이.
무당의 진룡 진자량.
반듯하게 잘려 나간 일면이며, 삼 척의 날로 오 척의 바위를 잘라낸 깊이며.
무엇 하나 거스를 게 없는 실력이다.
굳이 하나를 따지자면 검로가 너무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
나쁜 건 아니었다.
그저 재능이 너무 뛰어난 게 문제라면 문제.
진자량은 한 번만 봐도 상대를 베는 데 최적의 검로가 보이는 검안(劍眼)의 소유자.
이게 어느 정도로 대단한 일인가 하면.
고작 스물다섯 살 나이에 배분을 무시한 채 무당 제자들 중 제일검이 되었다.
물론 내공을 다루지 않은 순수 검 실력만 논한 것이었지만, 그만큼 검객으로서는 미친 자질이라는 얘기.
하지만.
“최상의 검로는 최적의 길이 아니다.”
그 역시도 말년에 오르고서야 깨달은 부분.
말로 형용하기는 어려우나 맹주는 최상의 검로가 신조차도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길이라고 정의했다.
이른바 극로(極路).
쉽게 말해 그 검로로 베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얘기다.
뜬구름 같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언제고 진자량도 이를 깨닫게 될 터.
이를 지켜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리라.
물론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남궁가의 기교가 갈수록 현묘해지는구나.”
다음으로 맹주가 감탄한 곳은 역시나 창궁룡 남궁신.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자리였다.
일검에 시원하게 잘라버린 진룡과는 달리 그의 검은 굉장히 능숙했고, 현란했다.
검 안에 수많은 내기를 응축했다가 베어내면서 폭발시킨 것.
진룡이 오직 검 하나의 외길 인생이라면, 남궁신은 공력이 만든 탑에 검을 올리는 형국.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용호상박이다.
이외에도 감탄한 흔적들이 여럿 더 있었으나, 진자량과 남궁신에 비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예상했던 바.
흥겨웠던 기분도 어느새 차분해지고 마침내 마지막 화강암 앞에 다다랐다.
한데.
“이게 무슨……!”
처졌던 맹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어떤 흔적을 보았을 때보다도 크게 놀랐다.
화강암 가운데에 박혀 있는 칼 하나.
등 총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는 보였다.
이 칼이 지나온 흔적이!
그리고 그것은…….
“이건 극로(極路)가 아닌가!”
믿을 수 없지만 자신이 지고한 경지에 올라서야 찾아낸 경지인 극로였다.
현청은 떨리는 손으로 검파를 쥐었다.
하나 어느 쪽으로도 빠지지 않는다.
당연했다.
검의 극로란…….
그 순간에 펼쳐진 바람의 흐름과 떠다니는 입자. 그리고 검이 이끌리는 방향.
이 모든 것이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단 하나의 길이기 때문.
극로를 통해 벤 검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며, 공력이 없어도 전부 잘라낼 수 있다.
그야말로 신이 정한 질서를 무시하는 길.
하여 상황이 바뀐 이 순간엔 다시는 그 검로를 되찾을 수 없으며 되돌아갈 수도 없다.
만일 자신이 그 길을 답습해 이 박힌 칼을 빼내려 한다면 부러지고 말 거다.
그것이 질서를 무너뜨리며 탄생한 극로의 형벌이므로.
자신도 말년에야 깨달은 극로를 대체 누가…….
“우연히 펼친 것인가.”
검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박혀 있는 걸 봐선 확실했다. 무의식중에 펼치다 뒤늦게 의식을 차리고 길이 막힌 것.
게다가 투박하고 서투르다.
검을 제대로 잡아본 자도 아니라는 얘기.
한데.
‘우연일지라도 극로를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절대 아니다!
천하의 맹주 현청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굳어져 버렸다.
도대체 이자는 누구인가.
머릿속에 온통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허. 허허허허…….”
그러곤 허탈한 웃음이 가득 뱉어졌다.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이번 낙향은 확실히 잃는 것보단 얻는 게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겠네.”
맹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어느 날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