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325)
첩자의 마교생활-325화(325/350)
325.
#맹호단
“이보게, 백 공! 잘 지냈는가?”
약속된 연무장에 도착하자 익숙한 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누가 봐도 오십 대 같지만, 자칭 노안 조진평이다.
“이거 첫날부터 분위기가 영 별로일세.”
그가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주변을 눈짓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눈에 날이 선 것이 건드리면 안 될 분위기다.
“왜 저러는 건데?”
“무시당했다 이거지.”
“누구한테.”
“누구겠는가. 입단식에 얼굴 한번 안 비춰주신 맹주님이지.”
눈매를 좁히고 귀를 기울이자 주변에서 수군대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맹주님은 오늘도 안 나오신 건가?”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사실 이곳에 모인 오십 명은 제법 특별한 자들이었다.
경쟁률만 수십 대 일.
쉽게 말해 어디 가서 칼 좀 쥐어봤다는 자들.
모르긴 몰라도 시험의 수준을 가늠해 보건대, 아마 제 고향에선 날고 기는 영재 소리 들으며 자란 자들일 거다.
한데 그런 그들이 이런 촌구석 낡은 장원까지 모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맹주 현청.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거였다. 한데 입단식에도 나타나지 않으니 불만이 속출할 수밖에.
“솔직히 총관님이 연설에 나서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오랫동안 칼 놓고 안살림만 하던 분인데. 이거 뭐 첫날부터 힘 빠지는구먼.”
조진평도 볼멘소리를 토했다.
물론 등 총관도 어디 가서 무시당할 군번은 절대 아니다.
아니, 과거를 생각하면 받들어 모셔야 할 수준.
하지만 맹주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다. 비교가 되니 누구든 마뜩잖을 수밖에.
“이제라도 맹주님이 나오셔야 해. 이대로면 괜히 총관님만 체면이 많이 상할 걸세. 뭔 말을 하든 반응들이 좋게 나오겠는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미 총관은 우리 앞에 섰고, 물러서자니 그건 그거대로 체면이 안 선다.
더구나 앞으로 호위무사들이 가장 많이 마주칠 자가 누구겠는가.
맹주? 아니다. 등 총관이다.
대부분 그가 명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누가 위인지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
맹주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그는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흥미로운 눈으로 잠시 상황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등 총관이 담담히 연설의 포문을 열었다.
“그대들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기로.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발언에 술렁임이 잦아들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주목됐다.
“어제까지는 무릎이 꿇려도 다시 일어서면 되었고, 하루 나태하게 보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뒷짐을 진 채 사이를 거닐며 말을 이어간다.
“이유를 아는가?”
내부가 술렁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가. 무엇을 위한 존재가 될 것인가. 과연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하루가 될 것인가. 지금까지는 그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등 총관은 차분했고, 담백했다. 그게 묘하게 거슬리면서도 가슴의 떨림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는 그대들 모두 그 답 앞에 서 있다.”
답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있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포부 있게 나온 정도인들에게 통용될 단 하나의 이름.
“맹(盟).”
모두의 눈이 부릅떠지고, 가슴에 돌덩이가 쿵! 떨어졌다.
무림을 수호하고, 정의를 관철하며, 수많은 희생으로 지켜온 바로 그 한 글자.
“오늘부터 그대들은 맹을 수호하는 벽. 무릎을 꿇으면 적들의 화살이 머리 위로 날아들 것이고, 한눈을 파는 순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올 것이다. 한 번의 실수가, 한 번의 좌절이, 한 번의 포기가! 우리에게서 맹을 앗아갈 것이다.”
모두의 어깨가 파르르 떨린다. 격앙되는 숨. 뜨거워지는 공기. 하나가 되는 기운.
“어제까지의 자신은 잊어라. 오직 맹을 위해 버텨라. 싸워라. 그리고 죽어라.”
“……!”
“기다리는 가족이 걱정되는가? 헛된 죽음으로 느껴지는가?”
결의가 단단해진다.
“맹이 기억할 것이다. 맹이 그대들을 바라볼 것이다. 맹이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다.”
신의가 확고해진다.
“영광의 벽이 되어라. 가슴에 긍지를 품어라.”
그 위에 충의가 쌓인다.
“그대들이 맹호단이다.”
와아아아아아!
거친 열기와 함께 미친 듯한 함성이 터졌다.
누가 등 총관을 한낱 안살림이나 맡는 자라 하였는가.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안살림까지 맡을 수 있었던 거다.
비록 칼을 놓은 지는 꽤 되었지만, 전란의 2세대에선 결코 빠질 수 없던 인물.
이것이 무림오성 중 일좌인 철혈성(鐵血聖) 등태보의 진면모였다.
‘아직 안 죽었네.’
장이서도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세대 신주오절의 그늘이 너무 컸을 뿐, 2세대를 대표하는 무림오성도 저력이 있는 자들.
이제 누구도 등태보를 앞에 두고 맹주를 찾는 녀석은 없을 거다.
아마 맹주도 그걸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일 테고.
“백 공, 나 오늘부터 총관파에 합류하겠네.”
“정신 차리고 앞에 봐.”
“그러지.”
피식 웃고는 등 총관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부터 맹주님과의 면담을 시작할 것이니, 호명하는 대로 따라오도록.”
“……!”
맹주와의 면담! 생각지도 못한 선물 같은 희소식에 모두의 얼굴이 벙쪄버렸다.
이런 줄도 모르고 불만부터 품었다니.
“왜 대답이 없나?”
이에 등 총관이 슥 노려보자.
“예-!”
“예-!”
세상 떠나갈 듯 우렁찬 외침이 흩날렸다. 등태보. 진짜 사람 다루는 재주는 알아줘야겠다.
그야말로 뛰는 무사들 위에 나는 총관.
기강이 제대로 잡히는 순간이었다.
기대감이 잔뜩 서리는 순간이었고.
*
맹주와의 면담은 단독이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다섯 명씩 한 조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첫날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
따로 은밀히 접선하기 전에 미리 봐둔다면 어떤 식으로든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둘 호명에 따라 안채가 놓인 담으로 향했다. 숙련된 자들답게 묵묵히 긴 시간을 기다렸다.
한데 절반 정도가 넘어서자 연무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기 때문.
“설마 성적 역순인가?”
아무리 강호가 넓다지만, 윗물은 좁게 고이는 법.
칼 좀 쓰는 자들 사이에서도 제법 잘 알려진 자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것이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묘한 신경전이 펼쳐진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마지막 최종 다섯 명이 남겨졌다.
기적처럼 생존한 조진평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다가와 쑥덕거렸다.
“백 공, 보이는가? 진룡과 창궁룡일세! 지금 저 둘과 우리가 한 공간에 있단 말일세!”
나도 알아. 쪽팔리니까 그만해. 그리고 아까부터 같이 있었어.
어찌나 목청이 큰지, 이 정도면 모른 체 해주는 두 사람이 고마울 지경.
그래도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긴 했다.
정파 3세대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두 사람이었으니.
진자량은 무심한 눈빛이 썩 잘 어울리는 미공자였고, 남궁신은 주루에서 봤던 대로 위압적인 체격의 호남이었다.
둘이 나란히 서 있으니 제법 그럴싸했다.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한데 정말 이게 성적순은 아니겠지? 에이, 내가 그 정도는 아닌데. 하하하!”
조진평이 쑥스럽다는 듯 호탕하게 웃는다. 글쎄. 근데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누가 그런 걸 신경…… 쓰는구나.
고오오오!
남궁신과 진자량의 몸에서 엄청난 열기가 불타올랐다.
말은 안 했지만 그냥 느껴졌다. 서로를 향한 승부욕이.
그리고 때마침 다시 돌아온 등 총관.
그의 입이 열렸다.
“조진평, 송옥.”
“예!”
무미건조하게 불리는 이름. 조진평이 손을 번쩍 들며 앞으로 나간다.
송옥은 종남파 출신으로 진자량과 가장 가까운 벗이다. 옆이 너무 잘나서 그렇지 그 역시 쾌룡(快龍)으로 통하는 후기십룡 중 하나.
드디어 다음 차례.
남궁신과 진자량의 울대가 꿀렁인다.
과연 누구의 이름이 먼저 불릴 것인가.
“남궁신, 진자량.”
“……!”
남궁신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반면 진자량의 얼굴은 희미하게 평안해진다.
하나 그도 잠시.
‘아직 넷이다!’
‘하나가 더 있어?!’
두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그리고 등 총관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백서. 이상 안채로 이동한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휙 돌아갔다.
앞머리로 눈매를 가린 또래의 사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남궁신은 1등도, 2등도 아닌 3등이라는 사실에 두 눈 부릅뜬 채로 멎어버렸고. 진자량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장이서를 흘겼다.
성적이 아니었나? 그냥 우연이었던 건가?
물론 등 총관이 성적 역순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저 남아 있던 이들이 지레짐작한 것뿐.
하지만 어찌 이리 찝찝한 것인가.
“맹주님을 기다리시게 할 셈인가?!”
등 총관의 호통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백서…….’
그의 이름을 뇌리에 깊이 박은 채.
*
맹주가 머무는 거처는 사찰과 비슷했다.
수양을 위한 널따란 공간이 있었고, 안쪽 구석엔 그의 방으로 향하는 장지문이 놓였다.
안에선 미묘하게 떫은 향이 가득했는데, 그가 즐겨 마시는 차인 듯했다.
‘어째 향이 낯이 익은데.’
여러 향이 배합되어 확실하진 않지만 분명 익숙한 느낌이 섞여 있다.
“여기서 기다리게.”
하나 등 총관의 말에 금세 잡념을 떨쳤다.
다섯 개의 방석이 놓여 있고, 총관은 맹주의 방으로 사라졌다.
자리에 앉자 조진평이 감격한 듯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내 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감개무량일세!”
“그리 좋아?”
“좋다마다! 나 같은 얼치기가 언제 맹주님과 또 인사를 나누겠는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지. 저들 둘이면 또 모를까.”
하긴.
“한데 백 공, 자네는 맹주님을 만나 뵌 적이 있는가?”
“그거야 당연히…… 없지.”
있어도 말할 수 없지만, 어차피 그는 절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 없는 것과 진배없다.
근데 그건 왜.
조진평은 흘깃 주변 눈치를 살피곤 슬그머니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내 자네니까 말해주는데 이번에 맹주님께 반드시 잘 보여야 하네.”
“왜.”
“사람 참 순진하긴. 몰라서 묻나? 같은 호위무사라고 다가 아니네. 자그마치 오십 명 아닌가. 잘 보이면 꽃마차 드는 거고, 밉보이면 대문이나 여는 거지.”
“그냥 둘 다 노비 같은데.”
“어허! 주인님 옆에 붙어야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거 아닌가. 여기 왜 왔는가. 하나라도 가르침을 받으러 온 거 아닌가? 괜히 불침번으로 야외 순찰만 뺑뺑이 돌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명심하게.”
아니, 별로 명심하고 싶진 않은데.
드르륵!
때마침 장지문이 열리고 조진평은 잽싸게 방석을 끌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많이 기다렸는가.”
그가 나타났다.
단정한 차림에 인자함이 물씬 느껴지는 중년의 사내.
과거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반갑네.”
무림맹주 현청.
그와 다시 만났다.
약 20년에 달하는 시간이 흘러 바로 이곳 귀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