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66)
첩자의 마교생활-66화(66/350)
66.
#화산파의 별종, 선유
“하하, 소저.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한데 직접 뵈니 그 아름다움이 오히려 부족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예에. 감사합니다.”
제갈상이 맹주를 비롯한 맹의 수뇌부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간 사이, 제갈소미는 후기지수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듣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차라리 103호 서신을 밤새고 다시 보는 게 더 낫겠어.’
주변은 왁자지껄 시끄럽고, 용(龍)이니, 성(星)이니. 난다긴다하는 후기지수들이 와서 대화를 청했지만 다 재미가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진짜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암각 요원들의 소식만 듣던 그녀가 이제 겨우 이십 대에 접어든 신출들의 얘기를 들으니 어찌 흥이 나겠는가. 마냥 늘어질 수밖에.
지금 자랑스레 허풍을 늘어놓는 저 형산파의 후기지수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난 녹림의 도적들을 보고 이리 말하였소. 당장 물러서거라. 그리하지 않으면 형산소룡(衡山小龍)의 검 맛을 보게 될 것이니.”
“오, 그래서. 그래서 어찌 되었소?”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으로 답이 되지 않겠소이까? 후후.”
“하하하! 대단하오, 형산소룡 소협!”
대단은 무슨. 고작해야 산도적 몇 명 상대한 거잖아. 누가 보면 녹림왕(綠林王)이라도 잡은 줄 알겠네.
모두가 엄지를 모아 추켜세웠다.
이에 제갈소미는 고개를 휙 돌렸다. 차라리 동정호에 배 띄우고 시나 읊는 게 낫겠다.
다른 곳에 귀를 기울여봐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하나같이 지루하고 뻔한 영웅담뿐.
“도대체 저걸 왜 다 들어주는 거야? 재미도 없는데.”
제갈소미가 들리지 않게 구시렁거리며 술병을 들고 자작자음을 하려던 찰나였다.
“품앗이하는 거야. 내가 들어줘야 상대도 얘기를 들어주거든.”
맞은편에 웬 짧은 바가지 머리를 한 귀여운 해바라기가 말을 건넸다. 제 턱을 양손으로 받치고 생글생글 웃는 여인.
“영화정!”
제갈소미가 잔을 툭 내려놓고 화들짝 놀라며 반겼다.
“오랜만이야!”
그녀의 이름은 영화정.
동그란 눈이 유독 아름다운 그녀 역시 제갈소미와 마찬가지로 무림사화 중 일인이었다.
별호는 걸인 개(丐), 꽃 화(花).
개화(丐花).
기품 있는 용모와 달리 헌 옷처럼 때 묻은 복식.
세상 관심사가 수만 개쯤 될 법한 동글동글하고 생기 있는 눈동자.
그렇다.
개천의 용보다 힘들다는 개방의 꽃이다.
정확히는 태상방주이자 신주오절 중 하나인 북개(北丐)의 손녀.
그리고 제갈소미의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안 온다며.”
제갈소미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진한 반가움을 드러내자 영화정이 상 위에 엎어지듯 쓰러지곤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오늘 밤새워야 해. 나 위로해줘. 너무 힘들어.”
“밤이야 새우면 되지.”
제갈소미는 영화정의 손을 꼭 붙잡았다. 손톱 때가 가득한데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움켜쥔다.
영화정은 그런 소탈한 제갈소미의 모습이 늘 고맙고 좋았다.
“근데 아까 그 얘기는 뭐야? 품앗이라니.”
“너도 참. 성격 안 변해. 내 얘기보다 그게 더 알고 싶어?”
“선후가 있잖니. 그리고 나 궁금한 건 못 참는 거 알잖아.”
제갈소미의 집요한 물음에 영화정이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야. 저기 보이지? 형산파 감 소협 차례 끝나자마자 그 옆에 창검문 도련님께서 얘기 중인 거.”
그렇네. 제갈소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피자 무리의 대화가 귀에 또렷이 박혔다.
형산소룡의 일화에 비하면 실로 부끄럽지만 내 얘기를 하자면, 이번에 산동의 하향검귀를 잡았다는 절명도객(絶命刀客)이 실은 나요.
정파에 신성이 나타났다더니! 그게 소협이셨구려!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 제갈소미가 금세 귀를 닫고 물었다.
“근데 저게 왜.”
“앞으로는 절명도객으로 불러달라는 얘기야.”
“뭐어?”
“별호가 어떻게 생기겠어. 남이 불러줘야 생기는 거지. 기왕이면 자기가 원하는 거로 듣겠다는 거지.”
“그런 게 어딨어. 그럼 산동의 하향검귀는 뭔데. 그건 사실일 거 아니야.”
“산동성 제녕 곡부의 작은 마을 하향현에 사는 검귀? 그건 할아버지들도 모를걸? 진짜 귀신일지도 모르고.”
하하……. 찰떡같은 비유에 헛웃음이 새 나왔다. 개방의 태상방주인 북개나 암각주인 제갈상이 모르는 거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거다.
“아무튼 저렇게 돌아가면서 서로 띄워주고, 소문도 내주고. 업적 하나씩 만들어주는 거야. 다 모이는 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고, 후기지수들한테는 이름 알릴 좋은 기회라고 봐야지.”
그렇구나. 이해가 쏙 됐다. 물론 그만큼 관심은 뚝 떨어졌지만.
제갈소미가 한입에 잔을 털어내곤 그제야 안부를 물었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이야? 오늘은 꼼짝없이 북경에 있어야 한다며.”
“누가 사람 좀 찾아 달래서. 그래서 데리고 오다 보니 그렇게 됐어.”
“누가?”
“있어, 저 인간.”
영화정이 술잔을 든 손으로 이제 막 들어서는 한 사내를 가리켰다.
짙은 푸른색의 화산파 도복을 입은 사내.
새하얀 피부에 용모는 웬만한 여인보다 예쁘고, 또 장신이다.
특히 세상 모든 일에 초연한 듯한 눈빛이 묘하게 자극적.
덕분에 곳곳에서 여인들이 수군거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누군데?”
제갈소미가 놀라며 묻자 영화정이 놀리듯 곁눈질을 보내며 짓궂게 답했다.
“왜. 저긴 관심이 좀 가?”
“장난치지 말고.”
“글쎄. 뭐라고 해줘야 하나. 요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가장 떠오르는 화산파 별종?”
“별종?”
“보면 알걸?”
영화정이 키득거리며 고갯짓하자, 제갈소미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선유.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참석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정도후학회에 뒤늦게 나타난 화산파의 별종, 선유.
그는 여인들이 아닌 사내들 품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도 같은 화산파 일대제자들 사이에 말이다.
“…….”
“대답 안 해? 이젠 내 말이 우습다 이거냐?”
제법 사내답게 생긴 자가 언성을 크게 높였다. 그의 도명은 선광. 별호는 매화룡이며, 후기지수 중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이자 일대제자 중 대사형으로 통하는 자였다.
이제 내년이면 그의 나이가 이립이니 선유와는 나이만 무려 11살 차이.
한데 표정을 보아하니 어린 선유에게 평소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우스우면 웃었을 텐데.”
왠지 이유를 알 것도 같은 그런 느낌.
“뭐?! 이 자식이……!”
매화룡이 분을 못 참고 멱살을 잡으려 하자 다른 제자들이 가로막으며 말렸다.
“대사형, 여기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예, 참으십시오. 선유 저 자식 원래 저런 거 아시지 않습니까.”
“놓아. 지금 저 자식이 나 무시하잖아!”
선유. 정말 그런 거냐? 제자들이 사과하라는 듯 노려본다. 그러자 선유가 차분히 붉은 입술을 떼었다.
“……그런 것 같기도.”
“아아아악!”
“대사형, 제발요!”
“아주 기고만장하는구나! 오냐.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오늘 정식으로 다시 붙자!”
“……다시 해도 결과는 같겠지.”
“선유! 너도 작작 좀 해, 이 자식아! 화산파 망신 다 시킬 셈이냐?”
사형들의 호소에 선유는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제자들은 미쳐 날뛰는 매화룡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야?”
제갈소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큼지막한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화산파가 자유분방하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러니까 세상 밖으로도 좀 나오고 그래. 저들 요즘 유명해. 다들 봐봐.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보잖아.”
영화정의 말에 뒤늦게 제갈소미가 주변을 훑었다. 한데 모두 관심이 식었는지 다시 각자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도명은 선유. 화평자께서 거둔 유일한 제자인데, 알다시피 대협께선 정사마전에서 다친 상처 때문에 단전이……. 아무튼 그래서 직전이나 진산은 아니고 기명제자.”
영화정이 그에 대한 신상을 말하자 제갈소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사부한테 직접 무공을 배우는 직전제자도 아니고, 영재로 지원받는 진산제자도 아니고.
그냥 이름만 올린 기명제자인데도 저리 버릇이 없다고?
“처음 얻은 별호는 잘생겨서 옥협. 기명제자라 많이 알려진 건 아니고 알음알음 여협들 사이에서 유명했어.”
“몰랐어.”
“옥협이란 별호는 오래 안 갔으니까. 바로 바뀌었거든. 십초자(十秒者)로.”
“십초자?”
“어느 누가 꼬리치든 그냥 열 세기 전에 까버리거든. 뭐, 그래서 우리끼리 부를 땐 그냥 십xx.”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무슨 그런 별호가 다 있단 말인가. 좋다고 옥협이라고 부를 땐 언제고.
영화정도 피식 웃고는 술병을 그대로 입에 문 채 꿀꺽꿀꺽 삼킨 뒤 다시 말했다.
“크으, 어쨌든 그 일이 있기 전까진 그냥 화산파에 얼굴 반반하고 정 없는 사람 정도였는데……. 얼마 전에 그 사건이 터지곤 완전히 바뀌었지.”
“그 사건?”
“아까 봤지. 매화룡이 못 참고 날뛰는 거.”
봤다. 봐서 너무 황당했다. 체면과 예를 중시하는 정도에서 대체 이 무슨 꼴불견이란 말인가.
한데.
“졌거든. 선유한테. 그것도 열 번이나.”
“뭐어?!”
제갈소미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내 주변 눈치를 살핀 뒤 제 입을 고운 손으로 가렸다.
그만큼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놀라운 말이었다.
매화룡이 누구인가.
평소 화가 많긴 하나 후기지수 중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고수이고, 또 화산파 장문인에게 인정받은 적전제자(嫡傳弟子) 아닌가.
한마디로 미래의 장문인!
한데 그런 사람이 고작 기명제자한테 당했다니.
“믿으라고?”
“믿어야지. 내가 네 정보통인데.”
“맙소사.”
제갈소미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리 기이한 일들이 매일매일 벌어지는 곳이 강호라지만…….
화산파 적전제자가 기명제자한테 졌다는 건 확실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이해가 좀 되네. 눈에 보이는 게 없었겠어.”
제갈소미가 입맛을 다시며 매화룡이 지나간 자리를 안쓰러운 눈으로 살폈다.
이미 소문은 다 퍼져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했을 테고, 화산파 내에서도 아마 난리가 났을 거다.
“아니, 근데 그럼 화산파에서 이제라도 진산제자로 받아주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아직도 기명제자인 건데? 어쨌든 일대제자니까 명분도 충분하잖아.”
제갈소미가 문득 든 의문을 표하자 영화정이 역시 지화라며 검지를 툭 던지곤 답했다.
“하산하겠대.”
“뭐어어?!”
좌중이 조용해지고, 모두가 벌떡 일어난 제갈소미에게 시선이 꽂혔다. 이에 얼굴이 확 붉어진 그녀는 이빨을 꽉 깨물고 웃으며 사방에 포권을 취해 사죄를 표했다.
그러곤 다시 자리에 앉아 최대한 목소리를 줄인 채 물었다.
“아니, 왜?”
“그건 나도 모르지.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내가 왜.”
“저 인간이 찾아달라던 게 너거든.”
“어?”
제갈소미가 황당함에 되묻는 순간, 영화정의 뒤에 웬 커다란 사내가 우뚝 선 채 나타났다.
무심하리만치 차갑고, 짙은 속눈썹이며 콧날까지.
빚은 것처럼 완벽하기만 한 얼굴.
화산파의 별종, 선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