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83)
첩자의 마교생활-83화(83/350)
83.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자님 (2)
후우우!
유령마군의 뿜어지던 위압적인 기세가 깨진 항아리에 담긴 물처럼 찬찬히 사라졌다.
일시에 날리기엔 내공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
‘괴물은 괴물이네.’
장이서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령마군 환사.
지금이야 3급귀 보좌에 불과하지만, 이십여 년 전엔 중원을 혈겁에 빠트렸던 대마두였다.
그의 손에 이슬로 사라진 구파일방의 무림인만 수백 명.
한마디로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고수라는 얘기.
물론 그런 괴물의 살광에도 눈썹 하나 깜짝 않는 철면피가 바로 장이서다.
‘듣던 것과는 다르구나.’
그리고 이러한 장이서의 모습에 천무기는 호기심을 넘어 짙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7급귀 출신의 무능한 돈 귀신.
하나 지금은 아무리 봐도 그런 어수룩한 범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배짱도 있고, 감춰둔 실력도 있다.
물론 마오가 백인장의 인을 얻은 순간, 어느 정도는 예상은 했었다.
어쩌면 그가.
사해령이 심어 놓은 진짜 비장의 칼일지도 모른다는 가설 말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알겠다.
‘확실하구나. 셋째가 숨겨둔 검이.’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냐.”
그러니 지금 하는 대답이 무엇이든.
오늘 이곳을 절대로 살아나가지 못하리라.
한데.
“앞으로 칠소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삼공녀를 위해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무어라? 하하하!”
처음으로 천무기의 얼굴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 사달을 벌여놓고 이제 와서 뭐라? 삼공녀를 위해 움직이지 않겠다?
“그 말은 곧…… 셋째를 배신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
“애초에 삼공녀께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으니 배신이 아닙니다.”
“그게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무슨 말씀이신지.”
장이서가 생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천무기는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애초에 너는 셋째가 심어 놓은 간자가 아니더냐.”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네가 셋째의 추천을 받아 들어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았더냐.”
천무기의 손가락에 스산한 기운이 스민다.
아니라 말하든, 맞다 말하든. 목구멍에 지풍을 꽂아주리라.
한데.
“본디 제가 몸담은 곳은 방첩대입니다.”
장이서의 입에서 뚱딴지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근 10년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때 따랐던 방첩대주는 겸사익이라는 자로 금전을 무척이나 밝힙니다. 하여 녹 주는 자가 주인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자이죠.”
겸사익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다. 어디에도 줄을 서지 않아 지닌 무예나 업적에 비해 실로 조촐한 직급을 가진 자. 하여 그도 포기한 자가 아닌가.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절 삼공녀한테 추천서를 써준 자가 바로 겸 대주입니다. 이는 확인해 보시면 금방 아실 겁니다.”
“뭐?”
“한데 그럼 전 겸 대주가 심어둔 사람이 되는 겁니까?”
하! 천무기가 탁자를 내리쳤다.
“억지다.”
“그렇지 않습니다. 명을 받고 사는 몸. 소속이 바뀌면 당연히 입장도 바뀌는 것 아닙니까.”
“실로 궁색한 변명이로구나. 그래서 지금 네놈은 삼공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냐?”
그래. 근데 애초에 나는 그녀의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무림맹 소속이었지.
“중요한 건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이 대공자님 앞이라는 것입니다.”
천무기가 턱을 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 혓바닥이 간악한 녀석이로다.”
“대세를 따를 뿐입니다.”
“하긴. 여긴 너 같은 놈이 살아남는 곳이지.”
그건 말이 좀 심한데. 장이서가 이를 물고 억지로 씨익 웃었다.
어쨌든 표정을 봐선 대공자의 의심이 어느 정도는 걷힌 듯했다.
어설픈 변명보다 확실한 노선을 밝히는 게 천무기에게는 더 와닿았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그런 곳이니.
“막내의 뜻도 너와 같더냐.”
한결 풀어진 어조로 그가 물었다.
“칠공자께선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조용히. 무탈하게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사실 별 관심도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겁니다.”
“흠, 그러고도 남을 아이이지.”
그간의 마오를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천무기의 입이 열렸다.
“너희 생각은 무엇이냐.”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저희는 이번 모집일에 삼소궁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대주들을 설득하지 않으셔도 이번 계획은 실패할 겁니다.”
“그래서.”
“하지만 앞으로 삼공녀는 계속해서 이를 얻어내려 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 서든.”
“그렇겠지. 셋째는 제 것으로 판단하면 무엇이든 쉽게 포기할 녀석이 아니니.”
그게 신패든, 자리든, 사람이든. 그 집요함은 천무기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나 그건 이공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음?”
“그 역시도 욕심을 부릴 공산이 큽니다. 그의 부름에 달려올 오룡당의 무사들은 많을 테니까요.”
천무기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일리 있는 말이기 때문.
이공자는 단순하고 포악한 만큼 욕심이 크다.
지금이야 삼공녀가 먼저 손을 썼으니 막기에 급급하나, 그다음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천무기의 목소리에 살짝 갈증이 얹어진다.
이에 장이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게 백인장의 인을 시원하게 날려버릴 묘책이 있습니다.”
“묘책?”
“예.”
장이서가 당차게 호언을 뱉는다.
표정이 너무 당당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
심지어 유령마군은 저도 모르게 제 푸른 입술마저 할짝거렸다. 그만큼 궁금하다는 얘기.
하지만.
“하하하하!”
천무기는 묻지도 않고 대소부터 터트렸다.
그러곤 자릴 박차고 일어나 앞의 탁자까지 퍽! 하고 날려버렸다.
이내 맹렬하게 앞으로 손을 쭉 뻗어내자.
“큭!”
장이서의 육신이 속절없이 끌려와 그의 손아귀에 저절로 목이 붙잡혔다.
그것도 실제로 손에 잡힌 게 아니라 손끝에서 한 치 앞두고 무형의 기운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실로 엄청난 공력!
“감히 누구 앞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장이서는 새빨개진 얼굴로 억울하다는 듯 간신히 말을 뱉었다.
하나.
“내가 널 정말 믿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냐.”
장이서의 눈이 부릅떠졌다.
“애초에 이 사태를 획책한 게 바로 너 아니더냐.”
“……!”
꽈드득! 목이 더 거세게 조여온다.
이를 버텨내는 건 온전히 내력의 싸움. 그리고 이에 장이서는 뱀 앞의 쥐처럼 엄청난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한낱 절정 초입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천무기의 내력은 이미 초절정을 넘어선 경지였기 때문.
장이서의 얼굴이 사색(死色)으로 물들자 천무기는 가소롭다는 듯 노려보곤 그대로 퍽! 벽에다 내던졌다.
“컥…….”
바닥에 털썩 쓰러진 장이서를 두고 천무기는 픽 웃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번 일은 졸렬하고, 간사하면서도, 영악하다. 그건 사해령의 방식도, 나락의 방식도 아니다. 지금까진 전혀 맡지 못했던 낯선 마인의 냄새지.”
“……!”
“그래, 너. 바로 너 말이다.”
장이서가 굳어진 눈매로 바라본다. 이에 천무기는 확신을 굳혔다.
“이제야 알겠다. 넌 셋째가 숨겨둔 검이 아니라 셋째도 이용한 것이야. 그 아이를 앞에 세워 나와 둘째를 움직이려 한 것이지. 어째서냐.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냐.”
우우웅!
천무기의 몸에서 막대한 살기가 뿜어졌다.
어찌나 강렬한지 전신에 화살 수십 발이 관통하는 기분.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무공도, 영민함도. 그 어느 것도 부족할 게 없다.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무엇도 믿지 않는 치밀함까지.
하나…….
‘그렇기에 넌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이서가 내면의 웃음을 감추고 말했다.
“두어 달 뒤에……. 마가에서 칠공자와 무혈공의 대결이 있사옵니다.”
“뭐?”
“그리고 칠공자께서 패하면 전 마가의 사람이 됩니다. 저를 내기에 걸었기 때문이지요.”
“보좌인 너를 말이냐……?”
“예. 무혈공께선 저를 탐내었습니다.”
무혈공 마이신. 그의 이름이 개입되자 천무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찌 됐든 자신과 더불어 최고의 후기지수로 꼽히던 자.
그가 눈여겨볼 정도라면 확실히 보통은 아닌 놈이다.
“해서 어차피 떠나야 하는 신세라면……. 뭐라도 손에 쥐고 가는 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었구나. 네놈이 이곳에 온 이유가.
천무기는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이제야 말이 맞아떨어졌기 때문.
가진 것 하나 없는 비천한 놈이 간신히 칠공자 옆에 붙었는데, 오자마자 마가에 종속되게 생긴 것.
하여 판을 짠 것이다.
제깟 놈에게 자신이 귀를 기울여줄 커다란 판을.
그럼 모든 게 다 맞아떨어진다.
“하하하! 이제 보니…… 간악한 게 아니라 그냥 모자란 놈이 아니냐. 이리하면 네놈의 말을 내 들어줄 줄 알았더냐.”
천무기의 비소에 장이서는 침묵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응. 네놈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다.
왜냐하면.
‘넌 이제 내게 진짜 묘책이 있다고 믿게 되었으니까.’
다른 어떠한 사심 없이 단 하나.
그저 한탕 해 먹기 위해 영악한 미꾸라지가 개입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무리 대범하게 행동해도 넌 구렁이만 가득한 실리주의니까.
그러니 넌 내 말을 들을 것이다.
“흐음…….”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천무기의 표정에서 고심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장이서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전 방첩대 출신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방첩대주 겸사익에게 배웠고, 그는 금전을 심히 밝히는 자입니다.”
“어쩌라는 것이냐. 설마…… 내게 돈을 달라는 것이냐?!”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묘책입니다.”
뭐 이딴 놈이……. 천무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자 유령마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냐!”
어느 안전이긴. 마교의 잡배들 앞이 아니냐.
장이서가 픽 비웃자 유령마군의 눈이 뒤집힌다.
하나.
“되었다. 그거 하나 바라고 목숨 걸어 예까지 온 놈이다.”
“하오나 대공자님!”
천무기가 손을 들어 올린다. 더 떠들지 말라는 얘기.
“그래, 좋다. 무엇이냐. 그 묘책이라는 게. 쓸만하면 그간 네놈의 기만은 묻어주도록 하마.”
“…….”
“왜. 싫으냐? 그럼 죽거라.”
우우웅!
다시금 천무기의 몸에서 막대한 내기가 솟아오른다.
하나 장이서는 그딴 건 관심 없다는 듯 아랑곳없이 말했다.
“은원보 백 개.”
“뭐?”
“이를 주시면 이공자, 삼공녀. 모두 백인장의 인을 넘보지 못하게 아예 무용지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하.”
“어차피 제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습니까. 삼공녀도, 이공자도. 모두 칠공자에게 갈 것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대공자님께서도 그들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셔야 합니다.”
“내가 왜. 녀석들이 가기 전에 막내가 죽어주면 될 일을.”
“마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일장로는 나와 한배를 탄 몸. 내가 버린 자식보다 못할까.”
“대신 그 대가는 은원보 백 개로는 어림도 없겠지요.”
“하하, 그래서. 네놈에게 주는 것이 싸게 먹히는 거다?”
“서역에서 비단길을 타고 들어오는 은자가 엄청나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가와 맹가. 천가에서 이를 관리하지요. 그러니 대공자님껜 그리 큰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한텐 인생을 걸 만한 액수지만요.”
하! 대공자 천무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