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of a Spy in the Demonic Cult RAW novel - Chapter (89)
첩자의 마교생활-89화(89/350)
89.
#칼과 친해지는 법
진우광은 그들의 등장에도 별다른 말 없이 반짝이는 호숫가를 살폈다.
이에 우사 흑야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 아이에게 부쩍 관심을 두시기에, 올해는 여기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좌사 백야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그 아이?”
“있네. 교주님께서 직접 천마전으로 부른 아이. 내가 신패도 내려주었지.”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나는 모르는 일인데?”
“알면. 또 쪼르르 달려가 다 말하고 다니게?”
“허!”
백야가 개탄스럽다는 듯 숨을 뱉는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다니. 장이서. 그의 이야기다.
하나.
“더 볼 일 없는 아이다.”
진우광은 칼같이 선을 그었다.
그가 보기에 장이서는 지금 올라와 있는 위치가 그의 한계였다.
그리고 천마는 더 올라오지도 못할 자를 계속 내려다보고 관심을 둘 만큼 자애로운 존재가 아니다.
“기개가 높고 패기도 있어 제법 쓸만해 보였는데……. 거기까지였나 보군요.”
오히려 아쉬워하는 건 흑야였다. 그의 눈엔 현 후계들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
‘흐음, 교주님께서 눈여겨보신 아이 중엔 가장 나아 보였거늘.’
하나 그가 그렇게 정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
흑야마저 관심을 싹 거두곤 화제를 바꿔 물었다.
“아직도 그분 생각이 나시는 겁니까.”
진우광은 미약하게나마 픽 웃으며 반응을 보였다.
남들이 들으면 떠나간 연인이라도 떠올리는가 싶겠다.
하나 이곳은 마교. 그리고 그는 천마다.
그런 어수룩한 감정은 어울리지 않는 일.
진우광이 그리는 이는 그런 풋풋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했고, 위압적이었으며, 또 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절대자였다.
“어느덧 더는 올라갈 곳이 없으니 더욱더 생각이 나는구나. 지금의 나라면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분께서 살아 돌아오신다고 해도, 지금의 지존을 이기진 못할 것입니다.”
“후후, 그러한가.”
좌사의 입바른 말에 진우광이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을 믿어서는 아니다.
어차피 그는 돌아올 수 없는 자.
성사될 수 없는 싸움에 미련을 덜기 위함일 뿐.
어느새 그의 동공이 흐려지고, 이젠 기억도 희미한 그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그래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살아 돌아오면 꼭 한 번 겨루어 보고 싶군. 지금의 당신과 나. 누가 더 위에 있는지.’
진우광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느 날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전대의 정점.
무영(無影)을 기리며.
* * *
– 천산북로 황야.
황야가 내려다보이는 어느 구릉 위.
수십에 달하는 백색 도포의 무사들을 뒤로한 채, 한 중년 여인이 벼랑 끝 놓인 의자에 앉아 있다.
복색이 참으로 특이한데 하얀 매처럼 깃털이 가득하고, 이마에는 녹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이미 불혹이 훌쩍 넘었음에도 성숙함과 아름다움이 스며있고, 그사이 노련한 섬찟함도 담겼다.
그녀의 이름은 묘채경.
마교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이자 외교와 정보를 담당하는 비룡당(飛龍堂)의 당주였다.
그리고 고상하게 차나 마실 것 같은 그녀가 이런 험지에서 고운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이유는 하나.
‘이 발칙한 것들. 대체 어디 숨어 있는 것이냐!’
최근 호룡당에서 공조를 요청해온 일 때문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철마적.
신강을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직이었다.
‘철마적? 별거 아닌 놈들이겠군요. 열흘. 아니, 사흘 안에 잡아드리죠. 그럼…… 당주께선 뭘 해주실 건가요?’
처음 지대호에게 부탁받았을 땐 만만히 보고 큰소리친 게 사실이었다.
북방에서 날고 기는 일족도 아니고, 중원의 주요 세력도 아니고.
기껏해야 소일거리 받아먹듯 잡일이나 거들고 약탈하는 보잘것없는 도적들이라 생각했으니.
하지만…….
꽈득.
그녀가 제 엄지손가락을 질끈 물었다. 이게 지금 심경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배배 꼬였고, 사흘 안에 잡겠다는 약속은 물 건너간 지 오래.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란 말이냐.’
솔직히 마교에서 정보라면 제일로 꼽히는 그녀도 그들에 대해 알게 된 건 오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도 알아 가는 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기껏해야 보잘것없는 마적단 아닌가.
하지만 알아낼수록 심상치 않음을 깨닫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들 손에 누가 당해?’
‘오군장(五軍長)이라고 산왕가의 충신으로서…….’
‘네놈이 날 바보로 아는 것이냐?! 그걸 누가 모르느냐. 그럼 그때 죽었다는 게…….’
‘예. 그들의 소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엔 철마적이 아니라 일개 병졸로 참전했던 터라…….’
‘그걸 왜 이제 아는 것이야!’
‘산왕가에서 이를 쉬쉬하였던 터라…… 송구합니다.’
‘쓸모없는 놈!’
꽈득.
그녀가 옛 생각에 또다시 제 엄지손가락을 물었다. 진작 알았다면 어쭙잖게 보내진 않았을 텐데.
그것만 아니었다면…….
‘감히 비룡당을 건드려? 이 씹어 죽일 것들.’
제 수하들이 사라지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치욕 그 자체.
사실 이것만으로도 비룡당 혼자 수사할 게 아니라 오룡당 전체가 나서야 할 중대 문제였다.
하지만 묘채경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지 않았다.
뭣보다 이 일의 최초 보고자가 장이서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장이서…… 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생각만 해도 욕설이 내뱉어졌다.
2급귀 당주씩이나 되는 거물인 그녀가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 그를 원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나 어투를 보건대 하루 이틀 된 악연은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녀는 직접 철마적을 도륙해야만 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니, 최소한 놈들의 본거지라도 알아내야 했다.
그게 마지막 자존심이다.
“분명 놈들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토록 대범한 녀석들이라면 본교라는 가장 큰 먹잇감을 놓칠 리 없지. 그러니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린다.”
묘채경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가 택한 방법은 대대적인 수색이 아니라 칼을 숨긴 채 조용히 기다리는 것.
천산으로 이어지는 열여덟 개의 마을과 관문에 당원들을 매복시켰다.
그리고.
“당주님!”
뒤쪽에서 희망찬 음색이 들려왔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돌아보자 백마를 타고 달려온 부관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부복한 채 외쳤다.
“철마적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어디냐!”
그녀의 굳어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무관이 잔뜩 경직된 얼굴로 답했다.
“불문객잔 인근이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묘채경이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에 부관은 참담한 목소리로 외쳤다.
“육공자께서 놈들에게 납치되셨다고 합니다!”
“뭐라고?!”
맹휘의 실종.
긴급 상황이 벌어졌다.
* * *
– 월하촌 칠소궁.
창공에 노을이 진다.
안 그래도 붉은 머리가 더 빨갛게 빛난다.
화가 잔뜩 난 얼굴도 마찬가지.
“이 자식이! 감히 내 뒤통수를 까?!”
마오의 이야기다. 그리고 화풀이 대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 뚝 떼고 늠름하게 뻗은 창룡도였다.
친구 된 기념으로 그저 내기만 조금 흘려보냈을 뿐이거늘.
‘하마터면 장이서까지 베어버릴 뻔했잖아!’
생각할수록 간담이 서늘했다. 이 정도면 요물 그 자체.
“잠깐. 이거 혹시 진짜 요괴 아니야?”
오! 획기적인 추론. 마오가 집게손가락을 제 턱에 가져갔다.
그러곤 쪼그려 앉아 칼을 바닥에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야. 말해 봐. 말해 보라고.”
하지만 당연히 반응이 있을 리가.
“버티시겠다? 이래도?”
퉤퉤퉤! 마오가 치졸하게 칼날에 침을 뱉는다.
“이 새끼, 딱 걸렸어! 얼굴 점점 빨개지잖아.”
노을빛이다.
“아니네.”
금세 시들해진 마오가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요괴면 낫지. 말이라도 섞게.
“잠깐. 말? 누가 그랬는데. 칼은 두들겨 패줘야 말을 듣는 거라고. 어, 맞아.”
바로 그거다.
마오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이내 정원 구석에 놓인 커다란 돌덩이에 시선이 꽂힌다. 거북이 등처럼 둥그런 암석. 아주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놈이다.
“으흐흐. 네가 아주 날 졸로 봤나 본데. 너 딱 걸렸어.”
마오가 총총 달려가더니,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곤 두 다리 살짝 벌리고, 엉성한 자세로 그대로 암석에 후려쳤다.
부우우웅!
하지만 이는 칼을 조금이라도 다뤄봤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
왜냐하면.
까앙!
“크아악!”
튕기는 반동력에 팔만 죽어 나갈 테니 말이다.
심지어 벤 것도 아니고, 후렸으니 오죽하랴.
“나 죽어!”
처참하게 뒤로 나자빠진 마오는 바닥만 데구루루 굴렀다.
벼락 맞은 것처럼 찌르르 울리는 두 팔.
눈물도 살짝 고였다.
멀찍이서 오늘 공사를 마친 용태와 메기는 도련님 또 술 드셨냐며 낄낄대며 집으로 돌아갔다.
“으아아악! 이 개자식!”
간신히 눈물을 떨구고 주저앉은 마오는 씩씩대며 칼을 들어 올렸다.
마음 같아선 멀리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하지만 그 순간 장이서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계속 쥐고 계십시오. 잘 때든, 깰 때든, 어디를 가든. 웬만해선 절대 놓지 마십시오. 우선 손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럼 어느 순간 내 칼이 나한테 바라는 게 무언지 조금은 느껴지게 될 겁니다.’
젠장.
“도대체 얘가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 아니, 친해지는 게 가능하긴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장이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낱 쇠붙이 아닌가.
“하아…….”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고, 괜히 한숨만 늘어지게 나온다.
장이서도 없고.
차라리 어디 털어놓고 물을 곳이라도 있으면…….
“공자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그때였다.
청량한 음색이 귓가에 시원하게 스며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미녀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루주……?”
취선루주 취홍란.
본래는 중원의 명망 높은 모용세가의 여식.
그녀가 바구니에 도시락을 싸 들고 찾아왔다.
*
“그러니까 장 보좌님께서 그 칼과 친해지라고 하셨다고요?”
“그렇다니까.”
마오는 정원에 홍란과 마주 앉아 심통 맞은 얼굴로 과일을 우걱우걱 씹었다.
처음엔 그냥 하도 답답해서 속풀이나 할까 싶었던 건데.
그녀가 활짝 웃는 얼굴로 사근사근 말을 잘 받아주니, 속내가 술술 나온다.
“또 손에서 절대 놓지 말라더라고. 아주 이러다 똥 싸고 칼로 닦게 생겼어.”
“푸훗.”
“웃기지? 근데 진짜라니까. 미치겠다고.”
“속상하시겠어요.”
“어. 그리고 얘가 얼마나 까칠한 줄 알아? 내공만 넣으면 아주 미쳐 날뛰어요. 돌아버려. 장이서까지 베어버릴 뻔했다니까.”
“정말요?”
“근데 이런 애랑 어떻게 친해지냐고. 장이서 말로는 계속 쥐고 있으면 뭐. 얘가 원하는 게 들린다나, 뭐라나.”
마오는 별 기대 없이 한 말이지만, 홍란은 제법 진지하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는 그녀도 어렴풋이나마 장이서의 말이 이해가 간 탓이었다.
모용세가는 오호십육국이 창궐했던 천 년도 더 된 시절부터 권세를 누린 뼈대 깊은 일족.
그래서 수많은 무공은 기본이고, 온갖 기물들도 가득했었다.
그중 기억에 가장 남는 건 조부가 사용한 파천필(破天筆)이라는 신병이기(神兵利器)였다.
‘란아, 쥐어보겠느냐?’
유년 시절 조부는 그녀를 무릎에 앉히곤 고사리 같은 손에 파천필을 쥐여줬었다.
그러자 미묘한 떨림이 일었고, 조부는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하하, 이 녀석은 란이 네가 마음에 쏙 드는가 보구나. 처음 내게 왔을 땐 그리도 무시하고 날뛰던 녀석이.’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신물은 직접 주인을 택하며, 이후에도 오랜 시간 합을 맞춰야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