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127)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127화(127/212)
127
“……뭐야? 어디, 어디에-.”
진성은 목이 꺾이라 뒤를 돌아보았다.
서측의 참가자 대기실 쪽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우락부락한 수염을 기른 자가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인지되는 정보였다.
그가 바로 기권을 선언한 자르갈 3세, 일반 유저의 입장에서도 진:청룡대회에 참가하면 볼 수 있는 NPC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즈키는……. 시즈키는-.’
진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진성의 눈동자는 한곳에 고정되었다.
서측에 있는 수많은 무인과 무투대회를 진행/정리하기 위한 진행요원들 사이에 선 여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차이나 드레스와 같은 의복을 입은 여성이었다.
이마엔 머리띠를 하고 있으나 그것은 엉덩이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은색 머리칼을 묶는다거나 고정하는 용도는 아니었다.
단정하게 정돈된 모습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건 피 한 방울,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은 그녀의 무투용 장갑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부전승만을 거둔 것뿐임에도 장갑 자체는 거의 흰색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이겠는가.
투술의 수준을 증명하는 깨끗한 옷매무새를 당당히 드러내며, 우뚝 선 그녀의 얼굴을 진성은 알아보았다.
‘진짜 그 시즈키네.’
격투, 무투, 싸움에 있어 이미 일종의 도를 깨달았다고 봐도 좋은 NPC.
그 설정은 무려 풍권류의 사범이자 모든 격투가들의 스승격 NPC인 풍진의 여동생이자 첫 번째 제자.
그리고 심판이 말한 것처럼 그녀 자신의 이름을 딴 ‘시즈키의 도장’을 운영하는 동시에…….
“결투장 전용 NPC잖아…….”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결투장]에서만 볼 수 있는 NPC다.
* * *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진성에게 아주 약간의 시간이 있다는 점이었다.
동측이 준결승을 마치고, 서측의 대결 순서에 부전승이 일어났으므로, 당연히 진성에게는 휴식 시간이 주어져야만 했다.
“으아아,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지? 왜?”
[클클클…… 간만에 해볼 만한 인간이 나왔는데 뭘 그리 당황하는 거지, 진성.]“해볼 만한- 그런 건 일단 제껴두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흑구는 기대된다는 음색으로 웃음을 흘렸으나 진성에게는 그리 쉽게 생각할 부분이 아니었다.
어째서 시즈키가 이곳에 있는가.
일반적인 NPC가 나타난다 해도 당황스럽거늘 하물며 결투장에서만 볼 수 있는 NPC가 이곳에 있다니?
‘오염? 이것도 오염의 일종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아니, 근데 또 오염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시즈키를 결투장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반대로 진성에게 납득이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가 [던전]과 [결투장]이라는 양대 시스템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것은 그저 게임의 특징 때문만은 아니다.
‘그냥 결투장용 스킬을 따로 찍거나…… 어느 정도 템, 렙 보정이 된다지만 그 와중에도 더, 조금이라도 유효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키우는, 그런 게임 내적으로만 차이가 있는 게 아냐.’
게임 내에서 유저가 제어할 수 있는 부분만 다른 게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라고 한다면?
‘서버가 달라. 결투장은 아예 별개의 채널, 별개의 서버라고 봐도 좋다.’
게임 구성상으로도 전혀 다른 시스템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당연히 같은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속해있으므로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애초에 서로 다른 서버 시스템을 운용하는 동시에, 화면을 통해 표시되는 해상도마저도 다르므로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던전]과 [결투장]은 다를 수밖에 없는 셈이다.
‘레이드로 유명한 타입의 너튜버가 있고…… 또 결투장으로 유명한 너튜버가 따로 있듯. 어느 한쪽의 고수가 다른 쪽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이라곤 하지만 극상의, 최상위 티어까지 가면 또 얘기가 달라지니까.’
장비가 얼마나 좋냐, 레이드를 얼마나 효율적이고 빠르게 클리어하느냐, 스토리를 얼마나 잘 꿰고 있느냐 따위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평가받는,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결투장 전문 너튜버’들을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시즈키가 온 걸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분명 인게임적으로 ‘다른 서버’에서만 마주 칠 수 있는 경우인데…….”
그것을 플레인:아라드로 통칭해서 볼 수 있는 것일까?
결투장 서버에만 존재하는 NPC니까 일반 서버에서는 볼 수 없고 따라서 그녀는 플레인:아라드에 원래 존재치 않아야 정상인 인물이라고 여겨야 하는 걸까?
시즈키의 등장은 오염인가, 오염이 아닌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지만 그것을 오염으로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라드인으로서 겪을 수 있는 상황의 한 면모라고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오염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이런, 젠장.’
이겨야 하나? 져야 하나?
아니, 이기려고 한다고 그리 쉽게 이길 수 있나?
‘시즈키가 처음 업데이트 됐을 때 난리도 아니었지. 나야 진작부터 결투장식 스킬에 익숙했지만……. 결투장에 익숙해질 겸 시즈키가 부여하는 퀘스트는 지금도 못 깨는 유저들이 많을 정도야. 이벤트 때 클리어권, 같은 걸 뿌려주길 기다리는 유저들이 아직도 한가득이라고.’
게임 던전앤파이터 결투장의 AI는 결코 만만치 않다.
익숙지 않은 유저라면 AI에게 말 그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릴 정도로 강력한 적수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설정상 그들은 모두 ‘시즈키’가 키운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진성 자신이 이겨왔던, 진:청룡대회에 참가하는 일반 NPC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의미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이제 최후의 두 사람! 외부에서 왔다, 동측의 무투가들을 이기고 올라온 진성! 그리고 수쥬를 대표하는 풍권류식 스트라이커, 시즈키! 두 사람의 결승전을-.”
과연 그런 자를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하나.
더 이상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시자아아아아악, 하겠습니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성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를 향했다.
이미 그가 상대해야 할 시즈키는 무대 위로 올라와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된 이상…….”
진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것이 오염이든, 아니든 현시점에서 결국 중요한 건 아니다.
“부딪치는 수밖에 없겠지.”
더 후에 있을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
퀘스트와 관련하여 인연을 맺기 위해서라도.
결국 진:청룡대회에 진성 자신을 추천하며 강제로 집어넣은 수쥬국國의 왕, 쇼난 아스카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라도.
진성은 무기를 들어올렸다. 그러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구. 힘을 빌려줘.”
───────────……!!
검은 기운이 일순 진성의 몸을 휘감은 후 사라졌다.
* * *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돌로 된 무투대회의 경기장이 움푹 패였다.
사방으로 튀는 파편에 저마다의 관객들이 환호성과 걱정 섞인 감탄사를 내뱉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공격에 당한 자는 이미 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피어오른 먼지를 뚫고 달려나오는 실루엣, 그리고 그 실루엣보다 ‘뒤늦게’ 따라오는 기계의 소음.
위이이잉, 이 내는 기계음보다도 더욱 빠른 동작으로 진성은 검을 올려베었다.
도약하며 내려찍기를 끝낸 시즈키를 향한 거침없는 일격이었다.
만약 적중한다면 경상 정도로는 끝날 리가 없음이 분명했지만 공격하는 자도, 그 공격에 당하는 자도 머뭇거림 따위는 없었다.
“내빼기만 해쌌노! !”
─────────────!
공기를 찢어버리는 파공음만이 아니었다.
시즈키가 내지른 주먹의 뒤에서 수증기가 퍼지듯 흩뿌려진 건 분명 순간적이나마 그녀의 주먹이 음속을 초월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터.
그러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면서도 진성의 입꼬리는 올라간 상태였다.
“니 웃나? 웃기나? 그 웃음기 고마 싹 사라지게 해줄게. !”
아슬아슬하게 피한 진성을 뒤쫓듯 이어지는 1인치의 강권!
그 모습을 보면서도 진성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단순히 전투 상황으로 보자면 분명 유리할 게 없음에도 그가 웃을 수 있는 이유라면 하나뿐이었다.
‘사투리! 맞네, 내가 알던 시즈키와 달라. 결투장 NPC이긴 하지만……한국 서버의 그 시즈키가 아냐!’
NPC 시즈키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방식으로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적용되었던가.
가장 먼저 일본 서버에서 만들어졌던 그녀는 오히려 역수입의 형태로 진성이 즐기는 한국 서버에 도입되었다.
일본 서버에서 만들어질 당시의 설정상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되어있음에도 정작 국내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하는 일종의 괴리를 보여주었던 NPC 시즈키로 인해 몇몇 유저들이 아쉬움을 토로했음을 진성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결국 지금 저 시즈키는 ‘한국 서버’의 그 시즈키가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내가……!’
이겨도 되는 거겠지!
진성의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뭐, 뭐꼬? 갑자기 이래뿐다고?”
당황한 시즈키의 목소리가 무투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 * *
그리고 그 모습을, 발이 내려진 심사위원석의 몇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보는 중이었다.
“……지금. 또 흐름이 뒤섞였어요. 보셨나요, 우?”
“아, 아뇨, 저는 아직……모르겠습니다.”
칙사 우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유년기의 쇼난 아스카를 가르쳤을 만큼 뛰어난 칙사 우조차도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아스카는 실망치 않았다.
그녀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보기에는 어떤가요?”
“어, 음…….”
쇼난 아스카나 칙사 우보다도 키가 껑충하게 큰 자가 턱을 긁적거리는 중이었다.
말총머리로 묶은 머리카락의 곁에서 불길을 태우는 무언가가 휘리릭, 휘리릭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었으나 남성은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잠기더니 쇼난 아스카의 질문에 답할 뿐이었다.
“넨의 흐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신수에 가까운 기운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군요.”
“그렇죠? 아무리 봐도 불길한-.”
“그러나 퇴마까지 필요할는지에 대해서는 잘……확신이 서지 않는데요. 그렇지, 주작?”
화르르르륵…..!
주작이라 불린 붉은 무언가가 한순간 불길을 강하게 올렸다.
칙사 우는 흠칫했으나 쇼난 아스카는 꿈쩍도 않았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주작이라 불린 존재를 데리고 다니는 자.
“4인의 대신관 중 한 사람의 공식 의견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저자의 기운이 유해하지 않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그는 현 아라드 대륙의 4인의 대신관 중 한 사람.
수쥬국國 출신의 퇴마사, 신장을 향한 질문이었다.
신장은 쇼난 아스카의 매서운 질문에 곤란하다는 듯 다시금 턱을 긁적거렸다.
“여러 기운의 흐름이 뒤섞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것이 과연 해를 끼칠 정도냐……는 점에 대해서는 속단할 수 없다는 의미지요. 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사신수四神獸와 사흉수四凶獸는 명확하게 도드라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저 외의 다른 항마단 인원들을 데려와도 같은 답변일 겁니다.”
수쥬 항마단.
공식적으로 지정된 식신 사신수를 다루는 퇴마사들과 검사, 금강역사 등이 속한 수쥬국國 소속의 단체이자, 수쥬국 교구의 조직.
쇼난 아스카가 수쥬 항마단 소속인 동시에 아라드 대륙 4인의 대신관에 속한 신장을 데려와 확인하려 했던 건 바로 이것이었다.
“사흉수에 속하지 않는다……. 저 사람과 함께하는 저 기운이…….”
진성과 함께하는 또 다른 넨念,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러나 신장이 공식적으로 사흉수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상 수쥬국國의 왕이라 할지라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장은 말했다.
“뭐, 테이다 베오나르 님이나……. 레미디아 카펠라의 이단심문관들이었다면 더 ‘철저한 조사’를 했을 수도 있겠죠. 다만, 신수나 흉수냐로 따졌을 때, 저자가 휘감고 있는 기운은 사신수의 기운도, 사흉수의 기운도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흉수가 아니니 퇴마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결론이고요.”
“하지만 위험한 건 맞다는 뜻이죠?”
“……저자가 통제를 잘하고 있기에 아직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도 미묘하군요. 적어도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면 확실히 위험해질 겁니다.”
신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쇼난 아스카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 했다.
“그렇다면-.”
“하핫, 그러니 고민이 깊어지시긴 하겠죠.”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죠?”
그러나 신장이 어느새 웃음을 터뜨렸다.
쇼난 아스카는 물었다.
그가 어째서 웃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아───────ㅇ!
굉음과 함께 시즈키가 멀찍이 튕겨 나갔다.
풍진류의 첫 번째 제자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지, 진:청룡대회……최종 우승자-! 지이이이이인, 서어어어어어엉-!”
승리한 진성의 육신으로 금빛 광휘가 잠시 번쩍였다.
신장은 멀찍이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스윽, 쇼난 아스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말했다.
“진:청룡대회의 우승자는 왕실 친위대로 특채할 수 있다는 관습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어쩌실 건지요, 수쥬의 왕이시여.”
그것이 그가 미묘한 웃음을 흘려야 했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