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137)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137화(137/212)
137
진성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제대로 앉아있질 못했다.
빙글빙글 같은 자리만 계속 도는 그의 발걸음만큼 그의 머릿속은 복잡다단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터졌을까. 오염……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오염은 아니겠지. 오염일 리는 없겠지.’
오염이었다면 카드가 나왔어야 할 테니까.
그러나 카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럼 지금까지 진성 자신이 처리해왔던 명시적 오염과는 분명 다르다고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을 저지른 건 <오염의 원인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 많은 황금을, 말 그대로 작은 언덕, 어디 꼬맹이용 눈썰매장에 쌓인 눈 언덕만큼의 금화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게 만드는 일을 이제 와서 누가 할 수 있겠냐고.’
지금껏 오염으로 판별되었던 사건들은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웠으나 그럭저럭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차원의 틈]이 오염되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스카사]가 오염되었으며 또한 [차원의 꼬임으로 길 잃은 자들]을 만났을 때에도 진성은 이해할 수 있었다.개념적인 면을 떠나 결국 <오염의 원인자>라는 작자가 저지른 일이며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카드 역시 진성 자신이 무사히 바로잡았음을 뜻하는 증표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카드가 나오지 않는 이런 형태의 문제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진성은 한숨을 내쉬며 그나마 비교해 볼 법한 유사 상황을 떠올렸다.
‘지금껏 나에게 문제가 터졌던 사건들. 내가 할 일을 막아서거나 강제하며 접촉해 온 경우는 두 번이었다.’
한 번은 클리파를 마주했을 때다.
갑자기 진성이 에픽로드:차원 침공의 공간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고생한 바가 있다.
그러나 당시 진성은 그때 일을 저지른 자는 <오염의 원인자>가 아닌, 진성 자신을 도우려는 [제3자]라는 결론을 도출해냈었다.
두 번째는 [차원의 꼬임으로 길 잃은 자들]을 만났을 때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자 현상. 그것을 마주하고 또 해결하게끔 만든 것과 게임 던전앤파이터 그리고 플레인:아라드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즉, 그들을 ‘보낸 행위’ 자체가 일종의 의도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 진성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염의 원인자>가 한 짓이었다.
‘그때는 카드가 나왔으니까. 에픽로드 때는 스카사 카드를 얻은 이후에 그쪽으로 불려간 거였지만, 어쨌든 그 정체 모를 인간들 때는 그들을 만나서 카드가 나온 거였지.’
세 번째가 바로 현재, 지금이다.
황금굴의 황금만 사라진, 다른 누구에게도 특별히 영향을 끼칠 일이 없는 이번 사건.
‘나에게만 큰 타격이 되는 사건…… 결국 나를 도우려는 [제3자]가 아니라 <오염의 원인자>가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진성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체 모를 제3자에게 직접적으로 한 번.
<오염의 원인자>에게 간접적으로 한 번.
그리고 지금은? <오염의 원인자>에게 ‘직접적’으로 겪었다고 분류할 수 있을 터.
“나를 말려 죽이려는 건가. 나라고 해도 돈이 없으면 역시 활동에 제약이 생기니 그 부분에서부터 조여들어오겠다? 내 몸을 당장 오염시킬 수 없으니 내 주변부터 갉아먹겠다는 뜻?”
꿀꺽.
괜스레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사무실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상상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툭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마저 들 정도로, 그러한 개념이 진성을 압박해오는 순간, 진성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크크크…… 금화가 부족해 제약을 받는다면 카시야스 같은 무식한 놈은 진작 죽었겠지.]흑구였다.
뜬금없이 카시야스를 들먹이는 그의 발언을 진성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부연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그 이상은 해줄 마음도 없다는 듯.
‘……갑자기 카시야스-…… 카시야스.’
제4사도, 정복자 카시야스.
귀면족의 일원으로서 결착되었던 마계에 올라타, 오직 강자를 찾고, 겨뤄, 이기는 것만을 염원하며 그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는 투귀鬪鬼이자 검귀劍鬼.
그 외에도 카시야스에 대한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배경설정을 비롯, 실제 게임 내 그의 행적 등에 대해서라면 ‘당연히’ 진성은 알고 있다.
따라서 진성은 흑구의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다.
당장 금고 안에 금화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자신의 자금 계획을 더 철저히 세우면 되는 일이다.
돈으로 해결한다는 선택지도 다른 방식을 궁리해내면 된다.
그런 관점에서 진성 자신에게 제약이 있는가?
“……푸핫, 그러네. 카시야스 정도의 사도였다면…….”
그렇지 않다.
카시야스와 같은 사도에 비한다면 진성 자신은 훨씬 더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법.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서야 진성은 헛웃음을 흘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찾아라. 그리고 베어라. 그 투견 같은 녀석의 방식이야말로 가끔은 가장 확실할 수 있는 것이겠지.]흑구가 자신을 위로하고 또 독려하고 있음을 알았으니까.
진성은 감동한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코를 한 번 슥, 쓸어야 했다.
그러곤 재빨리 분위기를 바꿔야만 했다.
“맞는 말이야. 근데 투견이라…… 그럼 흑구 너랑 잘 싸웠겠는데. 성격도 둘 다 개 같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투견이랑 진짜 개랑-.”
[다, 닥쳐라! 기껏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데 감히 나를 능멸하려는가! 무엇보다 카시야스 같은 무식한 녀석조차 나를 두려워 피해다녔음을 꼭 일러줘야만 이해하는가, 진성!]흑구는 버럭 소리쳤다.
평소였다면 카시야스가 실제로 디레지에를 두려워 피한 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겠으나 지금은 달랐다.
진성은 낄낄거리면서도 흑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크흐흐, 농담이지, 농담. 어쨌든 뭐, 고맙네. 나도 생각이 좀 트였어.”
<오염의 원인자>가 당장 물리적인 타격을 가한 것도 아니다.
결국 그쪽에서도 진성 자신에게 개입하는 걸 부담스러워할 가능성이 있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죄어오는 거라면?
‘그 사이에 힘을 기르면 된다. 당장은 시간은 물론, 돈도 있으니까.’
대비하면 된다.
새로이 각오를 다지는 진성의 머릿속에 흑구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고마우면 갚아라.]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너무나 뻔뻔한 요구는 오히려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것.
진성은 그런 흑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다 무언가가 생각났다.
‘내가 알던 디레지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하긴, 마계는 물론이고 레쉬폰에서도 혼자 틀어박혀 지냈던 그 디레지에와 지금의 흑구는…….’
분명 같은 자아다. 뿌리는 같다.
그러나 검은 질병의 디레지에가 과연 진성 자신에게 먼저 나서 충고를 해주었을까.
그럼에도 흑구가 진성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는 이유는 결국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경험. 시간. 그 모든 것의 공유.
진성은 일부러 헛기침으로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크흠, 뭐, 그러면 어디 보자…… 뭘로 갚지?”
감사 인사는 한 번 했으니 됐다.
이제는 농담을 해도 될 터.
[그건 네가 직접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받고 싶은 걸 내 입으로 얘기하는 것만큼 이상한-.]“개껌 같은 게 없어서 그래. 그건 네가 좋아할 텐데 그게 없어서-.”
[놈! 감히 그딴 말을-.]“푸하하하핫!”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흑구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기대하는지에 대해서라면 진성 자신도 알고 있다. 마계의 어디 한구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그가 더욱 많은 것을 보고, 듣게끔 돕는 일은 계속할 것이다.
진성은 흑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자신의 금고를 열어 남은 골드를 확인했다.
그의 표정이 잠시 진지하게 변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다짐한 듯 심호흡을 연거푸 하고 나서야 진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메가폰](Ch. 1)진성 : 순수님 또는 순수님의 길드원 여러분 계신가요? 확인 한 번 부탁드립니다.
현재 게임에 접속한 모든 유저들에게 사용자의 채팅을 출력시켜주는 아이템, 메가폰을 통해서.
* * *
“진성님 ㅋㅋ ㅎㅇㅎㅇ”
진성은 다가오는 캐릭터를 보며 잠시 흠칫했다.
지금껏 정말 많은 순수의 캐릭터를 보았으나 이번만큼 위압감 있는 직업군과 아바타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요원인가. 진각압 입혀놓은 모습을 실제로 보니까 진짜 분위기 살벌하네.’
이번에 순수가 접속한 캐릭터는 총검사 직업군인 ‘요원’이었다.
중후한 중년 남성의 멋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비밀조직에서 속해 있는 듯한 캐릭터 컨셉에 어울리는 <진각성의 서 아바타 세트(요원, A타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무엇보다 웃는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꿰뚫어 보려는 저 눈빛은 과연 요원 캐릭터 때문일까, 캐릭터를 조종하는 순수 때문일까.
“안녕하세요, 순수 님. 오랜만이네요.”
진성은 조심스레 인사를 건넸다.
순수는 답했다.
역시 중년 남성 캐릭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말투였다.
“오랜?만? 인가? ㅋㅋ 천계에서 본지 얼마 안된것 같은데.”
“그때 그 분은 업네요? 비비 님이었나?”
“접속 안하심?”
비비의 안부에 대해 순수는 가볍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
진성이 잔뜩 굳은 요원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
‘역시…… 그때 천계에서 만난 이후부터 뭔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
진성 자신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을까.
그러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진성은 곧장 답했다.
“크크, 그냥 잠깐 만났던 건데요. 접속 중이기는 하네요.”
“ㅇㅇ? 그분이랑 친하지 않음요?”
“친하다기보다는 아는 사이죠. 흐흐”
“ㅎㅎ 아아 ㅇㅋㅇㅋ”
“근데 오늘은 왜 부르셧음? ㅋㅋㅋ”
분명 키읔과 히읗 등의 웃는 표현이 있다.
진성 자신과 마주하고 있던 캐릭터들, 유저들이 지금껏 저런 표현을 할 때면, 그들의 얼굴도 모두 그에 따라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의 순수는 말 그대로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다.
‘그때도 입만 웃고 있었을 뿐, 눈은 전혀 웃지 않더라니……. 게다가 오키오키 하며 넘어가는 저 미묘한 흘리기도 그렇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성은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우려를 털어내야 했다.
이미 각오한 바였다.
다른 사람들을 불러도 되지만 굳이 순수를 재호출해야만 했던 목적부터 달성해야 할 테니까.
“종결급 칭호와 오라를 구입하려 합니다.”
진성은 기억하고 있었다.
다소간의 등락이 있어도 소위 종결급이라 부를 수 있는 칭호와 오라의 가격은 한두 푼이 아니다.
‘오라는 1억 전후. 칭호도 6천 전후라고 봐야 한다. 대략 1억 6천만 골드짜리 구매대행이야.’
먼저 아이템을 사서 주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순순히 믿고 사줄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골드를 먼저 주는 것도 사기의 위험성이 있다.
황금굴에서 돈을 무한히 퍼다 쓸 수 있을 때라면 1억 6천만 골드 어치의 사기를 당해도 별반 타격이 없겠으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렇다면 진성이 택할 수 있는 카드는 하나, 순수밖에 없었으니.
“ㄷㄷㄷㄷ벌써 끼시게요? 아직 만렙도 안 댓는데? 렙업 천천히 하시는 거 보니까 종결 바뀌고 나서 구입하셔도 늦진 안을거에요 굳이 지금 필요없으심”
“아뇨, 제가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혹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대신 구입해주실 수 있을까요?”
진성은 말했다.
순수는 곧장 답했다.
“ㅇㅋ 알겟슴다 오라는 어차피 종결 성능급 중에 젤 싼거 사드리면 될거고 ㅋㅋ 칭호는요? 몇렙제 사드림? 닼나니까 45제?”
“아, 80레벨로 부탁드립니다.”
“80제?? 든담 딜 상승량으로는 45제가 젤 나을텐데요?? 닼나 랭커들 다 그거 씀”
“근데 저는 아직 커스텀 에픽 준비된 것도 없고 당장 45레벨 칭호를 쓴다해도 사설 사이트 딜량을 높이는 것보단 실전 딜을 얼마나 잘 욱여넣는지가 중요-.”
“잘 아시네요?”
“-하니까 80레벨을 써라……고 인터넷에서 이야기들을 하더라고요. 흐흐.”
진성은 강제로 입꼬리를 쭉 늘려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하마터면 아행이나 할 법한 실수를 할 뻔했다는 긴장감이 잠시 맴돌았으나 결과적으로 무사히 대처를 했다고 해야 할까.
‘음?’
그 와중에도 진성은 보았다.
요원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어딘가를 살피듯 눈동자만 굴리는 순수를 보며 진성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곳은 헨돈마이어, 웨스트코스트의 마법사 길드 앞이다.
NPC 조안 페레로를 비롯하여 엠블럼과 관련된 NPC 다프네, 아바타마켓의 NPC 힐스, 마법 부여 전문 NPC 아벨로 등이 줄지어 늘어선 구역이기도 하다.
많은 유저들이 오가는 게 당연한 장소므로, 진성은 알 리가 없는 셈이었다.
순수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길드] 순수에이전트 : 봤죠? 지금 말 바로 바뀌는 거 봤지? 나한테 걸릴까봐 바로 말 바꾸는 거 봤지? 다들 채팅창에 떴지??그녀의 모니터 안에는 다크나이트 캐릭터 진성과 자신의 요원 캐릭터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모니터 끄트머리에 겨우 표현될 정도로 거리가 떨어진 곳에는, 그녀와 같은 길드의 이름을 달고 있는 캐릭터들이 몇 명이나 더 있었다.
진성이 순수 자신을 찾았는데, 그녀라고 얌전히 혼자 오기만 할 리는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