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156)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156화(156/212)
156
버서커의 육신을 선택한 빙의자는 여럿일 수 있다.
그러나 ‘잘난체하던 버서커’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칠리새우가 최근 들어 빙의자들을 여럿 만났다고 한 말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확정이나 마찬가지다.
‘아행……. 역시나 여길- 아니, 아냐! 지금은 아행이 중요한 게 아냐!’
그가 이곳을 지나며 칠리새우와 접촉했다는 사실도 진성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으나 지금은 그런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칠리새우가 했던 말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단어와, 그 단어를 듣게 된 지금 이 순간까지 일련의 상황이 진성의 머릿속에서 짜맞춰졌기 때문이다.
“몇 번…… 패턴을 몇 번이나 겪었다? 이 상황을 여러 번, 반복해서?”
조금 전 칠리새우가 이 말을 하기 전에는 또 어떤 상황이 있었던가.
그는 트롬베 발전소에 들어와 황도군 기관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걱정거리 없게끔 싹~ 정리할 테니까.
카시야스도 말했다.
이제 이런 피래미 따위를 상대하진 않겠다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이 빌어먹을 녀석만 벌써-.
말을 하다 말았으나 그 뒤에 이어질 단어는 뻔했다.
‘이 빌어먹을 녀석만 벌써 ‘몇 번째’……로 이어지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소환수들을 향해 우렁차게 칠리새우는 외쳤다.
항상 하던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게 그저 온갖 상황에서 치렀던 전투를 뜻하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항상 상대해왔던’이라는 표현이라면?!
진성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칠리새우를 바라보았다.
“눈치도 꽤 빠르시네……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시간에 벌써 답을 내신겨?”
붉은 단발을 찰랑이며, 소녀는 말했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칠리새우였으나 진성에겐 웃을 여유 따위 없었다.
“어떻게 그럴……수 있죠? 아니, 말이 안 되는데? 물론! 인게임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 에픽퀘 [다시하기]가 있으니까! 피로도 소모도 없이 과거 클리어했던, 특히나 전투와 관련된 던전을 다시 한번 돌 수는 있어. 하지만 우리는!”
“빙의된 사람들이죠. 흐흐, 근데 벌써 놀라버리면 딱히 설득할 필요도 없겠네.”
몰아치듯 말을 던져도 칠리새우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진성이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를 더 내뱉을 뿐이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슨 설득을-.”
“우워어어어어어-!”
“아차차, 또 정신 팔려서는, 흠, 흠! 자, 잡담은 끝! 일단 일부터 끝냅시다!”
‘분도르’의 고함에 칠리새우는 다시금 채찍을 쥐었다.
휘이이이잇- 팟!
공기를 찢어 가르는 거센 파공음이 울리자마자 뭇 소환수들의 속도가 빨라졌다.
말로 인한 <환수 폭주> 독려뿐만이 아니다.
<채찍질> 스킬을 활용하여 소환수들의 힘이나 지능 같은 스탯, 공격/이동 속도, 나아가 적을 상대할 때 발휘되는 호전성까지.
게임 던전앤파이터 내에서라면 소환수들에게 직접 채찍을 휘둘러 맞춰야만 증가되는 버프 역시 칠리새우에게는 허공에 파공음을 내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인가.
‘설득이라… 뭘 설득한다는 걸까. 아니, 일단은 이런 오염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반복해서 할 수 있는 빙의자.
지금까지의 발언으로 보아 이번이 두 번째 반복 정도도 아닐 터, 몇 번씩이나 던전 지역:파워스테이션의 일반 던전들을 클리어했다고 봐야 한다.
진성 자신조차 헷갈리는 트롬베 발전소의 길을 줄줄 꿰고 있는 점, 본격적인 패턴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소환수들을 적절히 산개시키는 숙련도는 말 그대로 수없이 많은 반복을 통해 쌓을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더 이상 반복하지 못하게 끊어내는 거? 아직 나도 모르는 모종의 방법으로-. 빙의자임에도 에픽퀘를 반복하고 있는 거라면-.’
계속해서 진행하게끔 유도,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칠리새우라고 아무런 이유 없이 이곳에 있었을까?
진성 자신의 설득 정도로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 강제로 진행시킬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결국 칠리새우를 힘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오염은 그렇다 치고 적어도 진성 자신이 마주한, 앞으로의 오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칠리새우를 힘으로 제압한다, 바꿔 말하면…….
“나 없이도 하려면 잘 할 수 있으면서 말이지. 귀찮게 하는 데에 도가 텄다니까. 흥.”
배를 벅벅 긁으며 칠리새우와 소환수들의 전투를 평가하는 존재.
비록 분신이지만 진성 자신이 현시점 지니고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해야 가까스로 비등하게 겨뤄볼 수 있는 존재.
<계약소환:정복자 카시야스>의 결과물이자 제4사도의 분신, 카시야스를 이겨야만 한다는 뜻이었으니.
‘그래도 얼추 비슷한- 아니, 아니다. 그땐 칠리새우가 없었어. <환수 폭주>나 <채찍질>도 없었고, 하물며 나머지 소환수들은 부르지도 않았다.’
분신 카시야스와의 1:1도 가까스로 해냈던 걸 생각하자면, 칠리새우의 모든 힘을 상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차라리 소환사 본체에 빠르게 접근해서 항복을 이끌어 내는 게-.’
그럼에도 포기 않고 칠리새우와의 가상 대결을 진성이 생각하고 있을 무렵.
“내…… 힘을-. 뛰어넘는가…….”
마침내 트롬베 발전소의 보스, 전율의 파트리스가 소멸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흩어지는 전격 에너지를 보며 칠리새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이미 몇 번이나 뛰어넘었는데 또 새삼스럽게시리.”
붉은 단발이 찰랑거릴 만큼 잽싼 움직임으로 뒤를 돌며, 소환사는 진성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띠 위로 튀어나온 속칭 ‘바보 더듬이’와 같은 머리카락이 주는 순수함?
앳된 외모만큼이나 맑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아마 이걸로 닼나님 퀘도 클리어 됐을 겁니다. 보통 때라면 딱 지금 말하기 시작하는데…… 파트리스 패턴 피하는 걸 보여준 놀라움의 대가로 여기까진 공짜로 해드릴게. 요 다음부터는 받을 거지만.”
“……뭘 공짜로 해준다는 거죠?”
마른 침을 삼키는 진성을 보며 칠리새우는 말했다.
“쩔이요. 제가 지금까지 여기서 안톤 쩔까지 끝내고 요 다음 지역, ‘죽은 자의 성’? 내가 거기로 보낸 빙의자를 줄세우면 연병장 두 바퀴 반이라니까?”
결코 소녀라면 쓰지 않을 표현과 함께.
“……쩔?”
뭇 MMORPG 게임이라면 존재하는 유저 간의 거래.
레벨이나 아이템 스펙 등 수준 높은 유저가, 그보다 낮은 유저에게 대가를 받고 해당 유저가 홀로 처리하지 못하는 몬스터 처치나 던전 클리어 등을 함께 해주는 것.
특히나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동반함에도 끝끝내 게임 시스템에 안착해버릴 정도로 많이 이루어졌고, 진성이 빙의되던 시점에도 무수히 많은 ‘쩔파티’가 운영될 정도로 유명한 일종의 서비스 거래 행위.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겠어요? 빙의된 것뿐이지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칠리새우는 바로 그 ‘쩔’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해온 것이다.
그것도 빙의자들끼리, 역시 몇 번이나 해본 경력자다운 말투로.
“…….”
진성은 진짜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 * *
니베르 중장은 기쁜 얼굴로 칠리새우와 진성을 맞이해주었다.
“전율의 파트리스를 쓰러뜨려 주셨군요. 훌륭하십니다.”
칠리새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기술자들이 트롬베 발전소를 파괴했던 것이 유효했던 거죠. 니베르 중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문제없이 잘 끝났습니다.”
이미 카시야스를 비롯해 소환수들을 모두 돌려보낸 칠리새우는 여유가 넘쳤다.
니베르는 그런 칠리새우의 행동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란디네 발전소뿐입니다. 모험가님의 활약 덕분에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졌고 작전 진행도 순조롭습니다. 모처럼 시원한-.”
“-콜라는 없지만 음료수는 제가 가져다 드리죠. 시원~한 놈으로다.”
칠리새우는 니베르의 말을 끊으며 먼저 제안했다.
니베르는 잠시 당황했으나 아직 당황해야 할 일은 더 있었다.
“예, 예?”
“그 대가라고 하긴 그렇고,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뭡……니까, 모험가님.”
“아마 저를 도와주려는 입장이시겠지만 비연이나 콘 님께는 다른 던전 쪽을 둘러봐줬으면 좋겠는데요. 허무의 퍼만이 워낙 강력한 상대라 두 분이 있으면 분명 도움은 되겠지만…… 역시 저 같은 경우는 혼자 움직이는 게 좋아서 말이죠.”
칠리새우는 말했다.
듣고 있던 진성조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전 지역:파워스테이션의 마지막 던전, 그란디네 발전소의 보스가 누구인가.
사도 안톤의 수하 중 ‘설정상’ 가장 강력한 개체로 꼽혀도 이상하지 않은 게 바로 그란디네 발전소에 있는 ‘허무의 퍼만’이다.
‘전능의 마테카가 안톤 그 자체라 치고 제외한다면, 허무의 퍼만은 그 다음이라고 봐도 좋을, 사실상 투톱, 쓰리톱 안에 들 정도로 강력한 설정이다. 던전의 구조상, 레벨링의 시스템상 이쪽에 있을 뿐이지, 원래라면 레이드 중간 보스급 이상이라 봐도 과언이 아닌 게 허무의 퍼만이야.’
하물며 빙의자들에게 있어선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클리어하듯 팍팍 치고 나갈 수 없는 난이도일 터, 그 와중에 이번 그란디네 발전소에 APC로 참여할 비연과 콘의 배제를 부탁한다고?
평소의 진성이라면 당장 뜯어말렸을 것이다.
칠리새우와 니베르의 대화에 끼어들어 비연과 콘을 어떻게든 함께 데리고 가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오염이 아닌 올바른 메인 시나리오 흐름’이니, 그때문에라도 반드시 바로잡으려 했겠으나…….
“그, 그건-.”
“여기 ‘이 사람’도 있으니, 쉽게 당할 일도 없을 테고요. 우리 모험가들이 뭉치면 얼마나 강한지 잘 아시면서 그런다.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칠리새우는 능숙하게 말했다.
진성은 쉽게 끼어들지 못했다.
‘이런 식의 제안도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을까.’
칠리새우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구간을 반복적으로 클리어해봤다는 말과, 또한 사도 안톤과 관련된 메인 시나리오를 ‘쩔’ 방식으로 클리어하며 몇 명의 빙의자를 다음 장소로 보내주었다는 말에 대해 조금 더 정황 파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니베르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진성 님이 함께하신다면 확실히 비연이나 콘의 도움보다는 힘이 되겠습니다만…….”
“……오호? 진성 님?”
칠리새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고개를 돌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소환사를 보면서도 진성은 당황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역시…… 저쪽에서 나한테 흥미를 갖게 만드는 게 우선.’
니베르의 말을 굳이 끊는다거나 먼저 나서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도 했다.
니베르는 진성 자신을 모험가라 부르지 않는다. 완전한 별개의 존재로 인지하고 있다.
그 사실에 대해 칠리새우는 눈치챌 수 있을까?
지금껏 몇 번이나 같은 패턴을 진행해왔다면, 이런 식으로 다른 빙의자들과 함께 해왔다면 그 위화감은 느낄 수 있을 터.
“예?”
“아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흐.”
적어도 그러한 관점에서 칠리새우야말로 진성의 테스트에는 합격했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소환사는 외모에 맞지 않게 흐흐, 거리며 노회한 웃음을 흘리는 중이었으니까.
니베르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란디네 발전소는 모험가님께 맡기겠습니다.”
“예, 준비가 되면 와서 바로 말씀드리고 출발하겠습니다. 그러면…… 가실까요, ‘진성’ 님?”
칠리새우는 진성을 바라보며 웃었다.
진성 또한 경계는 풀지 않은 채, 그러나 여유로운 미소로 되물었다.
“가시죠. 근데 어디로 가시려고?”
비비와는 다르다.
아행과도 다르다.
아직까지는 상대하기도 껄끄러운, 오히려 소환사 특유의 앳된 외모로 인해 더욱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빙의자, 칠리새우가 말했다.
“우리 집이요. 내 집 마련의 꿈을 여기서 이루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의외로 이튼 공업지대 쪽이 부동산이 싸긴 하더라고요. 아, 공장이 있어서 싸다는 뜻이 아니라 안톤 때문에 다들 불안하니까 헐값에 터는 거지. 근데 우리는 알잖아요? 어떻게 될지? 흐흐, 그래서 좋은 가격에 하나 장만해 놨습니다. 전기도 안 끊기고 좋아요. 진짜로. 역시 부동산은 정보가 전부야. 이걸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중얼거리면서 종종걸음으로 앞서는 소환사를 보며 진성은 생각했다.
칠리새우는 빙의되어 제법 오랜 기간 플레인:아라드에서 살아남은…….
‘말하자면 ‘진성븝미쟝’……인가.’
아저씨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