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157)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157화(157/212)
157
천계 지벤 황국의 황도가 위치하고 있는 이스핀즈 제도의 동쪽에 위치한 커다란 섬, 이튼.
그곳은 여러 발전소들의 집합체인 파워스테이션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생산된 전력을 손실 없이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산업단지 역시 조성되어 있다.
수많은 메카닉들이 일하는 산업단지가 있느니만큼 상업 역시 발달되어 있으며, 사도 안톤이 전이되기 전까지는 천계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공산품과 재료를 생산/유통하던 곳으로, 사실상 기계 문명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이튼이다.
사도 안톤이 전이된 초반에만 해도 난리가 났었으나, 안톤이 파워스테이션에서 다소 거리를 둔 지금은 치명적이라 할 정도의 위협은 사라진 상태.
그럼에도 여전히 직/간접적 위협은 남아있으나 전에 비하면 나름대로 수준을 회복했다는 뜻이며…….
“세상에…….”
그렇게 제법 활성화된 중심 상업 단지의 한가운데, 제법 높게 솟은 고층 건물의 앞에서 칠리새우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절망의 탑이나 하늘성에 비하면 턱없이 낮지만 이곳이 그러한 특수 공간이 아닌, 아파트 같은 일반적인 주거 공간이라는 점이 진성에게도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아라드에는 이런 거 업제? 업제? 으히히, 기계 문명이 이런 게 또 좋더라니까요. 엘리베이터도 잘 되어 있고.”
“용케 안톤이 전이됐을 때 파괴되지 않았네요.”
“이쪽은 공업지대에서 좀 떨어졌으니까요. 어차피 안톤이 원하는 건 에너지원이니…… 여기 살던 사람 같은 건 아무 관심도 없겠지. 그걸 알면서도 여기 사는 천계인들이야 버틸 수가 없을 테고. 원래 같았으면 그냥 공짜로도 살 수 있었는데, 아오. 도망치는 와중에도 등기부들 다 들고 튄 건지, 어쩐 건지……. 하여튼 이튼에서는 전망도 제일 좋은 곳이라는 것만 알아줘요. 한강 뷰? 남산 뷰? 서울숲 뷰? 그런 거 다 필요 없을 정도의-.”
띵-!
엘리베이터가 멈춘 곳은 약 20층 높이였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널찍한 거실의 창이나 가구의 배치, 구조 또한 미묘하게 빙의 전의 느낌을 주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것에 놀랄 수 없었다.
거실창 너머로 보이는 뷰, 칠리새우가 말하는 뷰야말로 진성에게 긴장감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안톤 뷰, 쨔쟌!”
높이 올라온 만큼 멀리 볼 수 있다.
먼 바다에서도 유독 그 상공이 우중충 어두운 지점을 진성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애당초 이튼 공업지대의 지상에서도 검은 연기가 보일 정도로 위압감을 자랑하고 있는 안톤이었는데, 20층까지 올라온 지금은 안톤의 압도적인 외형이 전반적으로 눈에 들어올 정도가 아닌가.
“보이죠, 저쪽 멀리 검은 연기 뭉쳐있는 느낌으로. 저게 안톤이에요. 여기서 하루 일과 마치고 안톤의 등딱지를 바라보며 와인 한 잔 마시는 게 요즘의 낙이지, 낙. 인생 뭐 있나.”
설정상 15~18세 사이의 앳된 외모와는 역시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늘어놓으며, 칠리새우는 푹신한 소파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낯선 이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함에 있어서 거리낌 없다는 점.
진성 자신의 무기를 미리 압수한다거나 하는 행위도 없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풀어진 모습을 보인다는 점.
‘자신감의 표출. 이 정도 일은 닳고 닳을 정도로 해봤다는 분위기, 게다가…….’
이곳을 방문한 이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네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 이 자세로도 네 난동을 제압할 수 있다고.
칠리새우는 버둥거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멋들어진 진열장 속 와인 한 병과 잔을 꺼내어 따랐다.
한껏 여유를 보인 다음 이어지는 일종의 과시 효과라고 해야 할까.
“여기까지 오느라 적잖이 고생했을 텐데, 한잔하세요. 아, 혹시 미성년자 때 빙의된 건 아니시고?”
“……제가 보기에는 칠리새우 님이야말로 미성년자의 육체가 아닌가 싶은데요.”
“데헷!?”
칠리새우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또다시 기묘한 포즈를 취해 보였다.
진성으로선 어쩐지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결국 못 참고 한마디 내뱉으려 했으나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기, 아까부터 여쭙고 싶었는데 혹시 빙의 전에-.”
“쉿. 중요한 얘기만 합시다. 비즈니스적으로다가.”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한 게 누군데.
진성은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으나 일단은 칠리새우가 건넨 와인과 함께 삼켜야만 했다.
칠리새우 역시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푸하, 소주가 없는 게 아쉬워. 맥주도 천계에서는 은근 구하기가 힘드니-.”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하자고 하시지 않았나요?”
“-음? 프히힛, 그렇지, 그래요. 어디보자, 그러면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가격?”
“가격?”
칠리새우는 와인잔의 다리를 쥔 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처음 꺼내는 주제가 곧장 가격이라는 것은, 즉, 칠리새우는 이미 진성을 ‘쩔 손님’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안톤 쩔 가격이요. 말했다시피 이 집을 어떻게 샀겠습니까, 아무리 싸다 한들. 지금까지 빙의된 사람들한테 ‘쩔값’을 충~분히 받았으니 가능한 일이었지. 아! 당장 골드가 없으면 다른 것도 됩니다. 템으로 주셔도 되고~ 아니면 뭐,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으로 저에게 도움을 주셔도 되고. 뭘 만들어 준다던가.”
저렴했다지만 시세에 비해서였을 뿐 싼 집이 아니었다는 표현은 결국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게임 던전앤파이터 내에서 ‘쩔’을 받기 위해 주고받는 골드는 비교적 시세가 정해져 있는 편이라지만 지금 이 상황에는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자들이다.
여기까지 가까스로 온 숱한 빙의자들에게 한 사람의 도움, 그것도 능숙할 정도의 빙의자의 조력이라면 있는 돈, 없는 돈 전부 끌어모아서 바쳤을 테니까.
진성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쩔은 괜찮습니다.”
애초에 쩔 따위의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진성 자신이 궁금한 점은 따로 있는 것, 칠리새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갸웃거렸다.
“안 받으시게? 쉽지 않을 텐데요. 빙의된 사람들이 안톤을 잡고 넘어가려면 거의 레이드 급인데. 제 도움 없이는 힘들 겁니다.”
“그래봐야 줄곧 여기 있던 분 아닙니까?
빙글빙글 여유롭게 돌아가던 와인잔의 움직임이 멈췄다.
진성의 말은 질문이라기보단 일종의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칠리새우는 진성을 바라보았다.
여자 마법사 직업군 특유의 붉은 눈동자가 커다란 흰자 안에 있어 더욱 대비되는 그 눈동자의 눈빛이 진성을 향해 쏘아졌다.
“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일단 여기까지 어영부영이나마 왔다면 대략 75레벨 전후겠죠? 크흠, 일단 그 얘기부터 했어야 했나? 난 그보다 한~참 높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안톤 레이드가 최고난도의 도전 과제나 마찬가지였던 시절, 그때의 ‘만렙’은 85였다.
그 이후 86, 90처럼 ‘만렙’도 패치와 함께 상승하며 다음 지역이 열리고, 다음 레이드가 공개되고, 나아가 진眞 각성이 공개되며 ‘만렙’은 100, 110 그 너머로 차츰 상향된 것이 지금까지의 흐름이었다.
‘빙의 시점의 패치 버전을 추측해보자면 내 렙인 75와 ‘한~참’ 차이가 날 수는 없을텐데. 하지만 마냥 허세라고 볼 순 없어. 아직 시스템이 어떻게 적용되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 어쨌든 이런 집을 가지고 있고, NPC들을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 안톤 쩔을 해준 것도 거짓은 아닌 것 같고…….‘
2017년 패치 당시 사라졌던 스킬을 사용한다거나, 해당 리뉴얼 패치 당시 새로이 생긴 스킬을 쓰지 않는 점으로 보아 칠리새우에게는 빙의되었을 때 버전의 게임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 모든 가설을 일단은 보류하게끔 만드는 칠리새우의 발언이었다.
다시금 와인잔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하며 소환사는 말했다.
“그리고 공략에 대해서라면 믿어도 돼요. 원래도 겜할때 한두 번 쩔해본 게 아닌데다…… 크흠, 내 자랑 같아서 뭐한데, 이거, 아시려나 몰라.”
“뭘요?”
진성의 눈치를 슬며시 보며 칠리새우는 말했다.
“제가 던파 최초 안톤 2인쩔 성공시킨 사람이거든요.”
문자 그대로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쩔 역사’에 남을 정도의 인물, 그게 바로 자신임을 밝히는 것이다.
당연히 진성이 모를 리 없었다.
‘칠리새우……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안톤 2인쩔 한 게 엘마랑 소환사였다. 워낙 오래되어서 닉이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뭔가 그런 생선? 음식? 느낌의 이름이었어!’
당시에도 골수 유저였던 진성이다.
역시 안톤 레이드에서 일부 교육 공대를 운영해보기도 했던 진성이다.
돈을 받고 쩔을 해주는 소위 ‘쩔러’들과 진성은, 말하자면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 없는 사이였으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건 있었다.
‘돈에 미친 사람!’
그가 진성 자신이 기억하는 그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저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면, 지금까지 줄곧 쩔부터 부동산 이야기까지, 돈과 관련된 이야기만 꺼내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알긴 아시나 보네. 닉이야 당연히 다르게 정한 거지만 이해가 가죠? 내가 왜 여기서 안톤 쩔로 집도 사고-.”
“크흠, 근데…… 좀 아쉽긴 하네요. 이 집이 좋긴 좋은데.“
진성에게도 떠오른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음? 으히힛, 그렇게 말해도 방 한 칸 내 줄 일은 없으니까 욕심내지 마시고-.”
“아뇨, 아뇨, 진짜로 안타까워서 그래요. 이 집이 과연 오래 갈지…… 쩝, 보아하니 가구나 다른 것도 다 비싸게 주고 고급품으로 장만하신 것 같은데. 이게 전부 다 잿더미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게 좀 가슴이 아프-.”
쉬이이이이익-!
“-네요!?”
진성은 말을 하다 말고 자기도 모르게 검을 뽑아들 뻔했다.
순식간에 소파에서 달려든 칠리새우의 동작 때문이었다.
“무슨……소리? 그게 무슨 뜻? 무슨 의미?”
소환사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거리를 좁혀왔다.
진성은 여유작작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아뇨, 두 가지 측면에서 좀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걱정? 무슨 걱정요?”
칠리새우가 돈을 밝히는 자라면.
그토록 철저하게 돈에 집착하는 자라면.
“글쎄요…… 일단 첫 번째는 사람이겠죠? 어린 애들이야 귀신, 몬스터 이런 걸 무서워하지만 성인들은 알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이 집을 보고, 칠리새우 님께서 ‘직접’ 쩔을 해줘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 빙의자들…… 그 사람들이 돈이 궁해지면 어떤 스탠스를 취하려나~?”
바로 그것을 잃을 가능성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효과가 있음을 진성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칠리새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좌우로 빠르게 구르는 눈동자, 그러나 곧 소환사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와서 뭐? 온다 한들 제 돈을 뺏을 순 없어요. 내가 애초에 만만히 당할 사람도 아니고. 레벨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그들이 100레벨 넘어서, 110레벨 찍고, ‘진각성’에 ‘커스텀 에픽’까지 둘둘 맞춰와도 이길 자신 있나요? 분신 카시야스 정도로?”
“-…….”
분명 지금까지 칠리새우는 빙의자 중 스스로가 가장 강하다는 자각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현재 시점’일 뿐이다.
기껏해야 사도 안톤을 토벌하러 가는 당장일 뿐이다.
“분명 인게임 유저들이라면 에픽퀘의 타임라인이 달라지면서 지형도 변하고 NPC도 새로 생기고 하겠지만 우리는? 장담할 수 있습니까, 칠리새우 님?”
이후엔 어떻게 될까?
주도권을 쥐고 흔들려는 소환사의 어쩌면 유일한 약점이 될 수 있는 것.
실제 시스템상 적용이야 어찌 되었든, 실질적으로 본인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는 반드시 한계가 있으리란 것.
“뭐, 그거야 잘 이겨내신다 쳐도 두 번째 문제가 있죠. 그게 진~짜 중요하거든요.”
“……뭔데요?”
칠리새우는 모를 확률이 높다는 판단하에 진성은 입을 연 것이었다.
2018년 최초 업데이트 이후 완결 및 일부 수정을 포함하면 무려 2022년에 마무리가 된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
“천계에 내전이 발생할 겁니다. 그리고 여기 이튼 방면군 총사령관은…… 아~주 미묘한 선택을 하려고 하지요. 흐흐, 무슨 선택인지 당장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아마 추측은 되실 것 같은데. 크흠, 그렇게 됐을 때……. 이 집은, 이 지역은 어떻게 될까~요?”
진성이 칠리새우에게 무기로 꺼내어 든 것은 [천계전기]의 스토리 라인이었다.
“……전쟁? 내전? 이튼이- 내 집이 공격당해?”
칠리새우가 마냥 어린 빙의자였다면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겠으나 오히려 저 앳된 육신 안에 ‘누가’ 있는지 예상되는 지금.
소환사의 목소리가 쪼그라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