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170)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170화(170/212)
170
치이이이이……!
고기를 올리자마자 철판 위에선 먹음직스러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나 지금 비비나 진성에게 스테이크 같은 음식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봉합니다이?”
“빨리요, 빨리!”
“설마설마 했는데…….”
약올리듯 말하는 칠리새우와 마주앉은 비비, 진성은 몸이 달아 들썩거릴 정도였기 때문.
칠리새우는 그 반응을 충분히 즐기다 식탁 위의 뚜껑을 훅, 열어젖혔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과 함께 비비, 진성 두 사람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대박! 냄새만 맡아도 벌써 맛있어!”
“설마 찌개용으로 장을 담가놨을 줄이야…… 진짜 대단하시네요.”
아라드 대륙에서도 제법 맛있는 음식들을 먹어보았다.
흑요정들의 왕국 펜네스나 무투인들의 국가 수쥬 역시 마찬가지.
천계의 황도가 카르텔로부터 수복된 이후에는 천계 특산 음식들 또한 맛본 적 있다.
그러나 지금의 감동에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님을, 비비와 진성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유, 한국 사람이 한국 입맛에 맞는 거 먹어야지. 거기 김치도 좀 찢어 드시고. 그래, 이렇게 음식도 좀 담그고 하려면 그래서 사람이 집이 필요한 거고, 돈이 필요한 거라니까. 어여들 드셔.”
칠리새우는 흐뭇한 표정으로 코밑을 쓱, 문질렀다.
외형으로 봤을 땐 여자 거너 직업군의 비비나 다크나이트인 진성에 비해 한참이나 어리건만 음식을 담고 내오는 태도부터 그것을 대하는 자세까지, 그녀는 말 그대로 연장자의 포스를 물씬 풍기는 중이었다.
“잘 먹을게요, 칠리새우 님.”
“예, 진성 씨도 맛있게 드십쇼. 비비 당신도 많이……먹으라는 말은 필요없겠네. 체하것다, 이사람아.”
“밈?”
“아니, 됐어. 말하지 말고 먹어요. 얼른.”
비비가 벌써 입안 한가득 음식을 넣고 씹으며 말하려하자 칠리새우는 그것을 말리곤 웃었다.
진성 역시 오랜만의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칠리새우의 만찬이야말로 헬릭스 연구소에서 다시금 슬라우 공업지대 인근으로 돌아왔을 때 진성이 느낀 가장 큰 변화였다.
‘진짜 연륜이 있는 분이긴 하시구만. 궁금한 걸 당장 물어보기보다…….’
따로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나 특별한 음식들을 제공해주다니.
비비는 이것을 100% 호의라고만 여기고 있겠지만 진성은 얼추 알 수 있었다.
‘맛있는 걸 일단 멕여놓고 불게 만들겠다. 흐흐, 딱히 특별할 것도, 말해줄 것도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대하는 칠리새우의 기술임을.
이것이야말로 그의 사회생활임을.
‘이런 것도 다 빙의 전 아저씨들이 하던 스킬이겠지? 일단 막 접대! 이런 건가?’
물론 진성은 여전히 그녀가 여성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의 눈엔 추정 나이 40대 후반 이상의 아저씨가, 소녀의 몸으로 빙의하여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으니.
“진~짜 맛있다! 대박이에요!”
“당연하지. 내가 이 중에서 빙의도 제일 먼저 했지만 애초에 빙의 전에도 혼자 오래 살았거든. 자취 생활 짬밥이 몇 년인데, 비비 당신은 아마 상상도 못 할걸.”
비비의 감탄에 칠리새우는 자랑스럽다는 듯 반응했지만, ‘혼자 오래 산 아저씨, 혼자 너무 오래 살아서 자취 요리에 익숙해진 아저씨’로 진성에게 더욱 깊이 인식되고 있다는 게 그녀에겐 안타까운 일이리라.
“근데 진짜 포탈은 이제 못 만들겠죠, 진상 님?”
“네. 지젤이 뭐 데이터 같은 거 챙기려 할 때 비비 씨가 쏴 맞췄다면서요.”
“엣헴, 그럼요. 아~무리 모르는 나라도 알 수 있다고요. 지젤이 막 마이스터의 실험실에서 요리조리 그거 써서 깽판을, 깽판을 쳐댔으면 뭔 일이 났을지. 그거 막은 게 결국 저라는 거 알죠?”
비비는 한껏 콧대를 드높이며 말했다.
진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데이터를 곧장 재구축할 수 없게 만든 점만으로도 훌륭합니다. 재료야 애초에 구하기 힘들고, 에너지원도 그 정도로 집약된 곳은 드물 테니까.”
“잉……? 전혀 칭찬으로 안 들리네.”
데이터는 다시 쌓으면 되는 것, 그보다 재료와 에너지원처럼 물질적인 필수 요소를 구할 수 없도록, 그렇게 예방 활동을 한 건 진성의 활약이었으니.
진성은 풀 죽은 비비를 보며 말했다.
“잘했어요. 결과적으로 지젤이 그걸 한 번밖에 못 쓰도록 만든 게 중요한 거니까.”
그의 차원 이동 장치에 표기된 잔여 횟수는 1.
마지막 한 번을 사용하고 나면 그 기계는 이제 무용지물이 될 터.
“그게 죽은 자의 성인 거죠? 그래서 진성 님이 그냥 냅둔 거죠?”
비비는 물었다.
진성을 잠시 움찔하게 만든 질문이었다.
그녀에게 진성 자신의 역할을, <부집게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플레인:아라드에 빙의되었음을 말해준 적은 없다.
그러나 천계에서 함께 하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녀 역시 진성의 정체에 의문을 가졌고 나름대로 답을 내렸을 터.
그렇다면 여기서 굳이, 하물며 칠리새우가 듣고 있는 마당에 정직하게 답해 줄 필요는 없다는 게 진성의 판단이었다.
“진짜 많이 바뀌었네요, 비비 씨……. 어린애는 하룻밤마다 성장한다더니 눈치가, 눈치가-.”
“누, 누구보고 어린애래요!? 만 나이를 써도 이제 빼박 20대 중반이 다 되어가는 사람한테!”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진성과 그런 진성의 의도에 정확히 걸려든 비비.
게다가 나이 운운하는 비비의 발언에 움찔하며 끼어든 칠리새우까지 있었으니.
“허허, 만 나이로 20대 중반이라…… 비비 당신,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큰일 난다, 진짜로.”
“근데 진짜 언니는 몇 살-.”
“그만! 자, 식사합시다, 누가 밥상머리에서 버릇없이 떠들고 그러나? 조용히. 먹읍시다.”
덕분에 분위기를 즉각 환기시킬 수 있었던 진성은 웃으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비비의 말처럼 지젤이 자유자재로 포탈을 쓸 수 있었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마이스터의 실험실까지 갈 필요도 없어. 당장 데 로스 제국으로 가버린다거나……. 하여튼 그 기술에, 충분한 에너지원까지 채워져 있었으면 위험했겠지.’
지젤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던 이유는 역시 대규모 발전시설 때문일 터. 아직 가동되고 있던 헬릭스 연구소에서 에너지를 추출, 축적한 뒤 본격적으로 움직이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루이틀 정돈 아니었겠지만 한 달……어쩌면 일주일, 열흘만 늦었어도 큰일 났을 거야.’
말 그대로 큰 흐름의 축이 뒤틀릴 뻔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참사를 막아낸 것이다.
플레인:아라드에 끼칠 영향력은, 그 위험도만으로 따져보면 손가락에 꼽힐 만큼 위협적인 사건을 예방한 것이다.
‘그럼에도……. 오염이 없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것이 진성의 표정이 마냥 밝기만 할 수는 없는 이유였다.
이 정도의 사건을 끝내고 획득한 카드에 쓰인 문구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소실된 접촉의 기회]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이라면 (오염)이라는 부연설명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경우라도 (오염)된 카드가 나왔으며 그것을 (정화)하기 위해 모으고 있던 게 아니었나?
‘정화라는 작업 자체에는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그걸 네메르한테 보여주고, 네메르로 하여금 카드를 확인하게끔 하는 지점이 중요할 텐데. 이러이러한 것이 오염되어 있었습니다……같은 식으로.’
그런데 이번 카드는 오염이 없다.
극단적이고 직설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건 오염이 아니라는 뜻인가?’
오염이 아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접촉의 기회’가 ‘사라졌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카드가 나온 건 지젤이 튈 때가 아니었어. 헬릭스 연구소가 완전히 무너져내려 폭발할 때…… 연구소의 그 어떤 설비나 데이터도 재활용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카드가 나왔다는 점까지 감안해야 해.’
이 카드는 지젤과 관련된 게 아니라 헬릭스 연구소 그 자체와 연관이 있었을 수 있다.
그 안의 무언가를 활용하여 접촉의 기회를 잡았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하여 (오염)이 없다, 즉, 오염이 아니라는 점까지 녹여서 설명한다면?
‘헬릭스 연구소 안의 무언가를 내가 확보해야 했고, 그것을 활용해서…… 내가 누군가와 접촉을 할 수 있었거나 중개자로서 다른 두 존재를 접촉하게끔 만들었어야 했다……는 얘긴데.’
그러나 이제는 소실되었다. 기회는 사라졌다.
누가 누구랑 어떻게 접촉을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이제는 알 수 없다.
“자…… 이제 배도 좀 찼겠다, 그러면 뭐, 무슨 일인지 한번 썰이라도 풀어볼 때 되지 않았나? 진성 씨?”
고민이 많은 진성의 눈앞에는 어느새 붉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음? 뭐가요?”
“뭘 또 새삼스럽게. 뭐가요라고 말하면 내가 뭐라고 말하겠어요.”
진성에게 바짝 다가선 칠리새우가 말했다.
진성은 잠시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러다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말 그대로예요. 레벨이 75가 되었고, 자각을 완료했고. 아참, 적어도 한 가지 의문도 해결은 했습니다.”
“뭔데, 뭔데?”
“칠리새우 님은 이제부터 더 강해질 수 있어요. 더 이상 과거에 멈춰있지 않아도 될 겁니다.”
“으, 응? 그거야말로 무슨 말이래요?”
지젤이 먼저 떠나버리고 홀로 남은 죽은 자의 성에서.
진성은 눈을 떴다.
검을 휘둘렀고 시공간을 베어내어 도착한 곳에서 경험했다.
* * *
“여긴…….”
진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하좌우로 검보랏빛이 무한하게 펼쳐진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서 있을 수 있는 건 발밑을 받쳐주는 육각형 타일 덕분.
더없이 불안해 보이는 공간 속에서도 진성이 정신을 잃지 않는 건 역시나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차원의 균열, 차원의 틈?”
[클클클…… 어떻게 된 일이지, 진성. 균열 속 나를 구하러 온 것인가.]진성뿐만 아니라 흑구에게도 낯익은 공간이었다.
제6사도, 검은 질병의 디레지에의 육신이 쉴 새 없이 해체되고 재구축되는 장소가 바로 이 무한한 공간의 어느 지점일 테니까.
물론 무한하게 펼쳐진 이곳에서 디레지에와 진성이 마주칠 일은, 우연적인 상황으로는 성립하지 않으리라.
“나, 나야말로 궁금한 상황인데. 어라라?”
[확신하고 검을 휘두른 게 아니었던가.]“그렇……기는 했지. 근데 내가 하려던 건 시공간을 베어서 헬릭스 연구소로 간다! 그런 개념이었다고. 포탈 대신, 차원 이동 장치를 사용하는 대신 다크나이트의 힘, 그걸 이용하려는 거였는데?”
애당초 진성의 목적이 디레지에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젤의 뒤를 쫓아 헬릭스 연구소로 가기 위함이었으니까.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배경 설정상 차원의 힘을 다루며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 다크나이트.
지금까지 차원의 틈과 관련된 온갖 문제가 벌어진 건 모두 자신의 육신이 다크나이트 때문이라고, 아직 힘이 부족하여 촉매제 수준이 되었을 뿐 스스로 작용하지 못하는 상태일 거라 진성은 추측했다.
충분한 힘을 얻고, 차원을 다루는 힘에 익숙해지면 언젠가 가능하리라 믿었던 일을, 진성은 죽은 자의 성에서 말 그대로 죽을 각오로 펼쳐냈고, 그 결과 시공간을 베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왜 여기로 온 거지? 게다가 나가는 문은 없어. 다시 한 번 공간을 찢어야 하는 건가?’
만에 하나 여기에 갇혀버린다면.
차원의 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더욱 큰일이 아닌가!
<솔도로스의 선택>을 쥔 진성의 손아귀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조바심이 드는 와중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역시 해 본 일을 다시 해내는 것.
‘렙업도 했어. 이제 75, 나도 자각을 할 수 있는 레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각을 마치고 헬릭스 연구소로 나가는 문을 열 수 있게 되는 건가? 설정상 자각을 마치면 시공간을 다루는 힘을 거의 되찾는다~ 뭐 이런 구성이었던 것 같은-.’
휘익-!
생각을 정리하던 진성의 귀에 들려온 것은 바람소리였다.
[진성!]“알고 있어! 카시야스보다 느린 기습에 당할 내……가……?”
그러나 다소 달랐다.
빠르게 공기를 가르며 다가왔던, 사도 카시야스의 분신이 진성 자신을 기습할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람 소리였다.
말하자면 구멍 난 창문으로 공기가 새어 나가는 또는 밀려들어 오는 소리.
진성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음의 정체를 알아챘다.
“뭐야?”
차원의 균열이 다시금 생겨나더니 누군가가 진성 자신의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진성 자신이었다.
다시 소리가 일었다.
휘잉, 하는 썰렁한 바람 소리와 함께 또 다른 차원의 균열이 열렸다.
역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진성 자신이었다.
────, ────, ────!
진성을 에워싸듯 차원의 틈이 열리고 열리고 또 열리고…….
“뭐, 뭐야!? 뭐야, 이건?”!
한 명이다.
그러나 여러 명이다.
진성은 진성을 보았다.
진성이 진성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