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54)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54화(54/212)
054
진성도 디레지에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기에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어야만 했다.
‘그래……저거야. 던파에서 유저들을 띵하게 만든 포인트 중 하나.’
디레지에가 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한 일은 없다.
그는 그저 존재했을 뿐이다.
심지어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병원균의 힘을 조절할 수도 없다.
‘애당초 노스마이어에 떨어진 것도 마찬가지야. 디레지에가 이 장소를 고른 게 아니다. 여기를 원해서 온 것도 아니야. 원래는 마계에 있었으니까.’
마계에서 지내던 디레지에는 영문도 모른 채 힐더에 의해 전이를 당해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노스마이어에 뚝 떨어져 버리게 된 상태다.
물론 이런 사태는 노스마이어에서만 일어났던 게 아니다.
‘내가 알기론 마계에서도 디레지에의 영향력 때문에 다른 사도들에게 핍박 아닌 핍박을 받는 수준이었으니까. 어디 구석지로 몰려나면서…… 거의 수모에 가까운 일들을 겪었다, 라는 설정도 있었을 텐데.’
마계의 사도들조차도 디레지에의 질병이 퍼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위협을 동시에 느껴 그를 몰아냈다.
그런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디레지에는 그냥 얌전히 쫓겨났고, 얌전히 마계의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디레지에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일이지. 같은 집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눈칫밥을 먹으며 구석에 가만히 있었건만…… 불시에 내쫓겨지는 일을 당하게 된데다- 하물며 버림받은 곳에서도 그냥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갑자기 존재 자체가 민폐라며, 찾아와 죽이려는 생명체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으니.’
이 모든 사태에서 디레지에가 스스로 한 일은 없다.
즉, 합리적으로만 생각해보자면 그가 미움받을 이유가 없다.
굳이 꼽자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퍼지는 역병의 기운이 비정상적으로 위험할 뿐이다.
그 태생적인 이유로 인해 죽어야만 한다?
과연 그 부조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지.
힐더에 의해 이곳으로 전이된 것만으로도 그는 분노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노스마이어에, 자신이 있는 곳에 찾아와 네가 나쁜 놈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인간들을 마주한 상태다.
“나 또한 이곳에 온 것이 매우 화가 나는 참이니.”
당연히 이쯤 되면 디레지에로서도 끓어오를 수밖에 없는 셈이었다.
그의 등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나는 검보랏빛의 아지랑이가 점차 강해지는 게 그 방증이리라.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건 그의 모습이 개와 비슷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대체 무슨…….”
미쉘은 중얼거렸다.
디레지에는 곧장 답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너희들은 그저 고통 속에서 녹아내리면 그뿐.”
저벅, 저벅, 저벅…….
몇 걸음을 걸으며 그의 아가리가 쩌억, 벌려졌다.
“이 땅을 모두 검게 물들이면 분이 조금 풀릴지도 모르겠군.”
그것이 신호였다.
현재 ‘캐릭터 모험가’인 여자 귀검사 유저와 제6사도, 검은 질병의 디레지에가 마침내 전투를 시작했다.
* * *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팔을 들어올려 호흡기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매서웠다.
위협적인 질병원을 마구잡이로 흩뿌리는 디레지에를 바라보는 진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예전 던전 때와 메인 시나리오 퀘에서는 역시 패턴이 다르군. 위협적인 건 똑같지만.’
디레지에의 전투 방식은 어떻게 되는가.
비교적 최근, 부캐릭터를 키우며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해 나갈 때에는 디레지에의 공격 패턴을 전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처치해버렸으므로, 진성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은 건 오히려 ‘과거의 디레지에’가 되어버렸기 때문.
당연히 진성이 이토록 디레지에의 공격 패턴을 관찰, 분석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까지 카드가 나오지 않았으니 결국 오염은…… 역시 남은 건 디레지에밖에 없어. 로터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면 분명 그럴 거다. 그것도 아마-.’
어쩌면 진성 자신이 디레지에와 맞서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점일까.
‘-디레지에가 약화되었을 때……겠지.’
사도 로터스 또한 모험가에게 어느 정도 공격당한 이후부터 오염의 증세를 보였다.
오염된 자의 행동양식, 즉,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흐름을 벗어나려 했다.
사도 정도의 실력자들이 처음, 즉 맨정신에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엔 오염을 발동시키지 못한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디레지에 또한 로터스처럼 충분한 피해를 입어야만 오염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이렇게 보자면…… 오염이라는 건 일종의 기생? 무언가를 미리 숙주에게 붙여놓은 다음 특정 상황에서 발동시키는, 그런 개념인가? 으음…….’
여전히 <오염의 원인자>가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어떻게 오염시키는지에 대한 알고리즘까지는 분석해낼 수 없었지만, 당장 진성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눈앞에 닥친 오염을 처리하고, 무사히 [카드]를 획득해나가는 것.
‘그러다 네메르를 찾아가거나…… 아니, 네메르 측에서 불쑥 나타날 수도 있지. 그때가 되면-.’
정화를 위해 오염된 카드를 내민다.
그리고?
‘-보상을 받아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대해 알게 된 지금이라면. 더 많은 보상을, 지금의 나한테 더 적합한 보상을 끌어낼 수 있을 거야.’
돌려보내 달라는 거래를 곧장 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도 지금 시점의 이야기일 뿐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디레지에를 비롯하여 앞으로 몇 번의 임무를 더 하고 나서 만나게 된다면, 어쩌면 그런 거래까지도 해볼 수 있지 않을지.
‘네메르는 분명 초월자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끼어드는 것 자체가 말이야, 응? 균형을! 왜곡을! 심하게 만드는 거면! 또 다른 초월자인 <균형의 중재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뭐, 이런 말로 삭 엮어가면서 어떻게 잘 좀 해보면 말이지.’
거의 공상에 가까운 희망으로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머금어진 진성이었으나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제6사도, 검은 질병의 디레지에를 직접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작금의 상황을 결코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진성은 머릿속에 차오르려는 두려움을 억제 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질병의 바람.”
디레지에가 앞발을 휘두르며 자신의 검보랏빛 기운들을 쏟아냈다.
진성은 호흡기를 막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눈살을 찌푸렸다.
“루이제 님, 제 보호막 뒤로!”
“크으, 정말 공격할 틈을 안 주는구만! 모험가, 괜찮겠어?!”
“지금 모험가는 대답할 여유도 없을 겁니다. 디레지에를 공격하기 위한 틈을- 어떻게든 제 염동력으로라도……!”
그러곤 진성 자신은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을 다시금 봐야만 했다.
디레지에의 공격에 피해를 받고 있는 건 유저만이 아니다.
유저, 모험가와 함께 왔던 NPC들 또한 공격의 범위 안에 들어가는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한 일.
‘모니터로 볼 때는 내 캐릭터밖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지만…… 그치, 이게 맞지. 하지만- 그 시점엔 유저에게 APC로도 보이지 않는 NPC들이잖아. 그래서 저런 대사 같은 건 스크립트로 출력이 안 되는 것뿐일 거야. 이건 오염이 아니다.’
모험가와 그 조력자들이 디레지에에게 함께 맞섰다, 라는 것은 오염이 아니다.
그저 유저에겐 모니터 화면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즉, 저런 식의 대화는 지금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상황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나다. 과연 나는 어떻게 될까.’
따라서 진성의 생각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염이 발현되기 시작한 던전 지역:노스마이어에 남아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디레지에밖에 없다.
디레지에에게서 오염이 나타나는 것은 이미 확정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오염 증세가 나타났을 때, 진성 자신이 알고 있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흐름과 다른 상황이 되었을 때.
‘내가 나서도 되는 거려나?’
눈앞의 NPC들과 함께 싸우는 게 유저의 모니터에 보이지 않는 일이나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본다면?
진성 자신의 개입도 그런 식으로 가려줄 수 있는 건 아닐지.
‘로터스 때는 유저 캐릭터 옆에 확실하게 아간조와 반의 모습이 있었으니까. 그때 내가 개입했으면 아마도 보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지금은…… 모니터에 본인 캐릭터와 디레지에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일 테니.’
진성은 자신의 심박이 차츰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럴 각오까지 해둬야 한다.
‘디레지에가 뜬금없이 아젤리아를 죽이려 한다거나, 또는 루이제를 죽이려 한다거나. ‘오염’이 그런 식으로 나타났을 때 로터스의 공격을 막아냈을 때처럼 내가 끼어들어 디레지에의 공격 패턴을 파훼하고 재빨리 몸을 숨기면-.’
유저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형태가 되는 게 진성의 입장에서 최상의 결과가 아닐지.
진성의 상상을 마치 실현이라도 하듯 여자 귀검사 유저의 스킬이 디레지에의 육신을 꿰뚫었다.
디레지에는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서 말했다.
“이곳의 독기는 아직 옅구나. 제힘을 내기가 어려워. 하지만…….”
콰아아앙──────!
그러곤 땅을 내리찍으며 포효했다.
“네 놈들의 세상을 삼키기 전까지 질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단순히 목소리만 크게 내는 게 아니었다.
디레지에의 에너지 또한 음량만큼 증폭되었다.
“대체 어떻게…….”
“윽, 이대론-. 제 보호막도 버티지 못해요!”
루이제와 아젤리아도 디레지에의 발악에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물러섰다.
미쉘 또한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놈은 충분히 약해졌어요. 하지만 무언가…… 방법을 찾지 않으면 모두 끝이에요!”
미쉘의 그 발언을 들었을 때, 진성은 깨달았다.
세 명의 NPC가 다시 유저의 눈에 보이게 된 시점임을.
‘시스템적으로는 디레지에의 처치 판정이다. 이제 유저의 모니터에는 스크립트도 다 뜰 거고, 보일 거다……. 그러면-.’
오염은?
진성 자신이 지금까지 분석한 경우의 수는 다 끝장이 났다는 것인가?
‘-남은 건 하나밖에 없는데. 균열……. 디레지에는 그 스스로도 죽는 방법을 모르는 불사의 몸이니까, 혹시 균열이 생기지 않는 거면-.’
진성이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는 순간, 디레지에의 뒤편 공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유리에 금이 가듯, 공간에 금이 가며 쩌적-! 소리가 울렸다.
“이건- 힐더, 네년……! 이걸 노리고 있었는가!”
황급히 뒤를 돌아본 디레지에는 일갈했다.
벗어나려 발버둥을 치는 것도 잠시였다.
디레지에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크흐흐, 그래, 차원의 균열이라면 날 갈기갈기 찢어놓을지도 모르겠구나. 이 순간을 기억하겠다! 반드시 살아남아 기필코 네년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말 그대로 세포 하나하나가 쪼개져 나뉘며 디레지에의 육신은 차원의 틈에 발생한 균열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진성의 표정은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결말이다. 원래의 흐름이야.’
진성 자신이 기억하는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의 흐름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일이 잘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끝난 건가?”
루이제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처럼 이제 모든 것이 끝나야 했다. 단 한 가지의 사건만 빼면.
진성은 간절한 마음으로 디레지에가 빨려들어 갔던 공간을 살폈다.
유리에 금이 가듯 생겼던 공간은 어느새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안돼, 이런 미친, 나오라고! 디레지에!’
그 공간은 한 번 더 깨져야만 한다.
최후의 발악을 통해 디레지에는 자신을 빨아들였던 차원의 균열을 일시적으로 열어내야 한다.
그리고 모험가, 즉, 유저를 함께 데려가야 한다.
‘유저의 1차 각성 퀘스트! 그게 1차 각성 스토리니까 거기까지 가야만 하는 건데-.’
그런 일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오염된 퀘스트의 흐름에서 아직 카드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진성의 추측이 맞았다.
디레지에는 오염되었다.
그러나 디레지에가 공격하는 대상이 바뀌거나 하는 오염이 아니었다.
차원의 틈이 다시 열리지 않는 것. 그것이 오염이라면.
‘차원의 틈을…… 열어야 해. 내가.’
후우우우우……
진성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안절부절못하던 잡념은 모두 날아가 버렸다.
단 하나의 공간, 단 하나의 목표로, 진성의 모든 정신력이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