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61)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61화(61/212)
061
진성은 골몰히 생각하면서도 발놀림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을 읽는다는 듯 진성의 머릿속에 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 떠났던 여자의 표정이 걸리는가.]디레지에의 목소리를 들으며 진성은 순간 움찔했다.
현재 <검은 질병의 흑랑> 세트는 착용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면 [인벤토리] 안에 있으면서도 외부의 활동을 파악이 가능하다는 뜻.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진성은 디레지에의 말을 일축했지만, 오히려 그 웃음소리는 낮고 길게 퍼지기만 했다.
[클클클클…….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애정의 감정을 피울 수 있다니. 인간이란 역시 재밌군.]“무, 무슨 소리야? 아니, 그리고 애초에 너한테는 여자로 보이겠지만 그냥 캐릭터가 그렇지 실제로는-……아니다, 이런 얘기 해서 뭐 하냐.”
그것이 디레지에의 농담인지, 오해인지 진성으로선 판가름하기 쉽지 않았다.
하물며 순수가 여자라고 말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진성은 대꾸 자체를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외부의 활동은 파악이 가능하지만, 역시 눈에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게 한계야. 로터스였다면 혹시 몰랐겠지만, 역시 디레지에에게 그 정도 정신감응 능력 같은 건 없겠지. 애당초 차원의 균열에 있던 본체조차 나에 대해 몰랐으니-. 아직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심지어 성격까지 다른 이 녀석이 순수의 정체를 남자라고 이해할 리는 없는 건가.’
다만, 그렇게 포기한 이유 역시 진성의 오해였으니.
남자 마창사 캐릭터로 시작하여 남자 귀검사 캐릭터 그리고 여자 마법사 캐릭터까지 만나본 진성의 입장에서 ‘순수’는 결국 남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여자 마법사 캐릭터야 남자 유저들이 특히 ‘부캐릭터’로 많이 키우고 있으니 제외하더라도, ‘처음 만난 캐릭터의 성별’을 유저의 성별이라 받아들이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단순히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라 대화의 스타일을 생각하자면, 더더욱 여성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셈이다.
‘그래도 디레지에의 말이 맞긴 맞아. 순수가 떠나기 직전 보였던 그 표정…… 의심의 눈초리라고 해야 할까. 걱정이나 호기심 같은 게 아니었어. 언제나처럼 반짝거리며 나한테 관심을 갖는 그런 종류의 눈빛이 아니었다.’
물론 진성에게 중요한 건 순수의 성별이 아니었다
진성이 챙겨야만 하는 두 번째 아이템을 언급하며, 그것을 수십 개 구입하겠다고 말하자마자 변하기 시작한 얼굴.
정확하게는 눈빛.
언제나처럼 진성에게 장난을 치지 못해 안달이 났던 그 표정이 아니었다.
진성 자신의 정체에 대해 혹시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그러나 진성으로선 쉬이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더 끔찍한 건…….<8비트 가면>의 표정이 바뀌었다는 거지. 그냥 맨얼굴이었으면 그래도 뭔가 좀 추측해볼 만했는데, 하필이면 그런 아바타를 끼고 있어서 말이야!’
각 직업 캐릭터 얼굴을 마치 SD 캐릭터처럼 과장한 <8비트 가면>의 표정이 바뀐 것으로는 정확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눈빛이 바뀌었고, 말투도 평범해졌는데 그것이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정도의 결론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진성이었다.
휘유우우우……!
순수와 헤어진 후 엘븐가드를 지나 북쪽으로 나아가길 얼마나 되었을까.
<클론 레어 아바타>의 세트 옵션 중 하나인 ‘마을 이동속도 증가 +60%’가 적용되어, 가뜩이나 빨랐던 진성의 움직임은 이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가 스톰 패스 인근이라고 봐야 할 텐데.’
따라서 진성은 익숙한 지형을 보며 난감해해야 했다.
엘븐가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던전 지역:스톰 패스.
평소라면 여러 익숙한 NPC들이 보여야 할 만한 장소이며, 이제 진성의 발에도 살얼음처럼 눈 덮인 땅이 밟히기 시작했건만,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황량한 땅뿐이었다.
‘NPC들이 보이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반투족의 연맹을 이루고 있는 각 부족별 토템조차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직 여기까지 내려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지.’
진성은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눈으로 확인한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오염’이 벌어졌는지는 사실상 검증이 끝났다고 봐도 좋기 때문.
이곳에서 더 북측으로 나아가봐야 진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들여보내 주지도 않는데다 내가 끼어들어서 말빨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들도 아니다. 문제는 이 오염을 해결하기 위해선 더 북쪽으로 가야 한다는 건데.’
진성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투족의 인물들은 진성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법사 길드 소속이니, 공국의 중요 인물이니 따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령 벨 마이어 공국의 스카디 여왕이 보낸 사절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들이지 않는 그들의 폐쇄적 습성이 적용된 배경 설정상 당연한 일일 터.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니 텔레포트 포션을 활용할 수도 없다. 적어도 ‘어디로 갈지’는 알고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
“그렇다고 하늘로 날아갈 수도 없고…….”
별다른 지식이 없는 진성 자신이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기상이 평온하지 않은 북부의 상공을 비행선으로 이동하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다, 반투족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끝까지 추격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크크크…… 저것이 눈雪인가.]“음? 아, 눈을 모르겠구나? 줄곧 마계에만 있었으니……. 흐흐, 신기하지? 차갑지?”
진성은 [인벤토리]에서 <검은 질병의 흑랑> 세트 중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바닥에 쌓인 눈을 한주먹 쥐어 묻혔다.
[크, 크흐크, 시, 신기하다는 게 아니다. 차갑-기는 하지만……]어쩐지 평소와 다른 웃음을 흘리는 <검은 질병의 흑랑> 세트의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으히히, 차가움도 느끼나? 그럼 계속 문지르고 있으면 뭔가 고통스럽게-.”
[그만! 클클,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거라.]더 장난을 치려는 진성 자신을 말리는 그 목소리 또한 평소의 중후함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지, 처음 겪는 일에 대한 당혹이라고 해야 할지.
진성은 장난을 멈추곤 말했다.
“오케이, 하여튼 나랑 있으면 앞으로도 더 신기하고 재미있는 곳을 많이 볼 수 있을 테니…… 너도 협조 좀 해. 눈에 띄지 않고 가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작 이런 말을 한다고 디레지에의 또 다른 자아이자 파편이 자신에게 순순히 협조할까, 싶은 의문이 들었으나 그런 생각은 곧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렇다면 차원의 틈을 이용하는 건 어떤가. 그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의 시야도 닿지 않는 곳에서.]오히려 <검은 질병의 흑랑>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심한 목소리로 말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진성 자신에게는 한숨이 나오는 대답인 게 문제일 뿐이었다.
“못 해. 그걸 내가 어떻게 한 건지 알았으면 진작-…… 아.”
애당초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말하던 진성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생각이 났나 보군? 클클, 그렇다면 열어-.]“아니, 그게 아냐. 그래, 어쨌든…… 그런 방법이 있어.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무슨 소리를-.]“쉿.”
만약 차원의 균열에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 디레지에가 이런 처지를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그가 기껏 떼어낸 기운이자 또 다른 자아, 진성과 함께 하는 <검은 질병의 흑랑> 디레지에는 연거푸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입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그사이, 진성은 이미 텔레포트 포션을 삼키는 중이었다.
스톰 패스까지 다다랐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곳은 공국의 어느 곳이었다.
낡은 스윙도어를 보자마자 어쩐지 진성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드는 장소.
끼이이익…… 진성은 헨돈마이어 뒷골목의 달빛 주점에 들어섰다.
* * *
슈시아는 진성을 순식간에 알아보곤 인사를 건넸다.
“뭘 드릴까요? 오늘도 우유?”
“하핫, 안녕하세요. 네, 그럼 오늘도 우유……로 일단 한 잔 부탁드립니다.”
진성은 멋쩍게 답하며 슈시아가 있는 카운터를 향했다.
굳이 자리를 잡고 앉지 않은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카운터 석에 앉았을 때 달빛 주점 안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가장 잘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성은 재빨리 다른 인원들을 훑어보았다.
슈시아의 카운터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는 하얀 코트의 중년과 달빛 주점의 가장 구석진 원형 테이블 앞에서 후드를 뒤집어 쓰고 앉아 있는 중년.
‘슈미트 그리고 아간조.’
남자 총검사 캐릭터와 관련이 있는 NPC 슈미트.
그리고 하늘성 당시 진성 자신도 만난 적이 있는 NPC 대검의 아간조.
당시 대외적으론 G.S.D의 제자라 인정받은 진성을 보며 아간조는 제법 큰 관심을 드러낸 바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아간조와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어차피 등을 돌리고 있어서 내 쪽은 보지도 않는 것 같고-.’
그 외에도 달빛 주점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진성이 게임 던전앤파이터 유저의 입장으로 주점을 찾았을 적엔 보이지도 않던, 실제 헨돈마이어를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냥 식사를 하러 온 사람부터 대낮임에도 벌써 거나하게 취한, 다소 불량해보이는 사람들까지.
그 모두가 진성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으나 진성이 처음부터 줄곧 지켜보고 있는 건 한 사람이었다.
와인잔의 다리를 잡은 채 빙글빙글 여유롭게 돌리는 모습.
그보다 더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테이블 위에 다리를 턱, 걸친 자세라고 해야 할까.
시비 걸리기 딱 좋은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술에 취한 불량배들까지 슬금슬금 그를 피하는 이유는 있었다.
벌컥, 벌컥, 진성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남아있던 우유를 마저 다 마신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향하는 셈이었다.
“카라카스 님이시죠?”
진성이 찾아온 이는 카라카스였다.
별명은 ‘한숨의’ 카라카스. 그 실체는 모험가 길드의 길드장.
“……무슨 볼일인가?”
50세 남성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진성은 경계하는 카라카스를 보며 생글생글 미소를 보였다.
“카라카스 님의 모험담과 관련된 이야기를 풍문으로만 듣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실제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혹시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합석-.”
“선물이라기에는 좀 그렇고, 우선 이거……”
카라카스의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전, 진성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은 먼지가 소복하게 쌓인 병이자 언젠가 진성이 NPC 신다에게도 선물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언더풋 특제 다크 데킬라입니다.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아, 그럼 합석은……?”
“하시게. 배포가 큰 친구군. 이 좋은 걸 선물로 주다니. 잘 받겠네.”
그는 게임 던전앤파이터 내에서 주당으로 손꼽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카라카스의 특성 정도야 이미 꿰고 있던 진성에게, 그와 함께 자리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닌 셈이다.
다만, 슈시아가 찌릿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으니, 진성은 우선 그녀의 시선을 모른체해야 했다.
“그래,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나?”
“카라카스 님의 모험과 관련된 이야기죠. 보통 어디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뭘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진성의 포괄적인 질문에도 카라카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진성이 건넨 흑요정들의 다크 데킬라 뚜껑을 퐁, 하고 따곤 자신의 잔에 따르며 말했다.
“모험을 하다 보면 별 괴상한 일들이 벌어져서 더럽게 꼬이는 경우가 허다하지. 그때 어떤 강력한 무기보다 필요한 게 임기응변이라는 놈이야.”
“음, 음, 임기응변. 그렇군요.”
“무기는 놓치면 다시 잡으면 돼. 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상황을 놓치면……. 날아가는 건 내 목이다.”
그는 다크 데킬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진성은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카라카스 쪽으로 의자를 조금 더 당겼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부탁이라는 단어에 카라카스의 미간이 잠시 움찔거렸다.
잔 안의 술을 휘저으며 그는 말했다.
“일단, 말이나 한번 들어보지.”
진성에게 선물을 받았다지만 부탁을 받는 건 또 다른 이야기임을 그는 확실히 했다.
무엇보다 진성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카라카스가 부탁을 들어주기는 쉽지 않을 터.
그럼에도 진성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북부 지역으로……만년 설산이 있는 지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현시점의 진성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카라카스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카라카스는 아직 진성의 부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반투족과의 연결 고리가 되어달라는 뜻인가?”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구요. 반투족에게 가급적 비밀로……가고 싶거든요.”
“그건 쉽지 않겠군. 그들의 생활 터전에서, 그들의 경계를 뚫고 나아간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거야. 나 또한 북쪽 부족의 친구가 있다지만 그들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니까.”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제가 곰곰~이 생각을 하다 보니……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요. 그게 ‘사실’이라면 카라카스 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겠다 싶어 온 겁니다.”
카라카스는 안 된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것이었으나 진성은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무엇보다 카라카스가 가장 거슬려 하는 말, 그의 모든 모험담이 거짓이며 허풍이라는 소문 탓에 그는 그 누구보다도 ‘사실’에 집착하지 않는가.
“무슨……이야기지?”
카라카스는 물었다.
진성은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반투족의 거처로 가야만 한다. 반투족의 눈에 띄어선 안 된다.
육로는 안 되고 상공도 안 된다.
차원의 틈? 당연히 그런 일은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무엇인가.
[클클클……그렇군. 나에게서 힌트를 받은 건가.]진성은 <검은 질병의 흑랑>에 묻은 디레지에에게 단서를 얻은 셈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움직이는 법, 결국 남은 길은 하나다.
지하.
“두더지 등을 타고 땅속을 헤집어 본 적이 있으시죠?”
게임 던전앤파이터에서 NPC 카라카스에게 대화를 신청하다 보면 불쑥 튀어나오는 스크립트 한 줄.
그리고 과거 [스토리 북]에 짤막하게 언급된 한 문단.
진성이 기억하고 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