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of Arad: Forerunner RAW novel - Chapter (77)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 아라드의 빛 먼저 걷는 자-77화(7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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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되었다고 모두 같은 게 아니다.
진성 자신은 어디까지나 <부집게의 사명>을 띈 ‘부집게’다.
칼날이 연단될 수 있도록, 더욱 날카롭고 튼튼하게 만들어질 수 있도록 그 칼날을 ‘옆에서 잡아주는 역할’이다.
즉, 칼날을 약화시키려는 ‘오염’을 찾아 바로잡아야 하는 게 진성 자신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바로 그 칼날이 되어야 하는 자들. 연단되어야 하는 칼날.’
바꿔 말하면 <캐릭터 모험가>로서 출중함을 인정받아 플레인:아라드에 빙의된 자들.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모험가>가 되기 위해 선별된, 그 과정에 있는 자들이라는 뜻.
진성은 무기를 거두며 천천히 행동했다.
“우선 진정하세요. 갑자기 그렇게 우르르 물어보시면 뭐부터 대답해야 하는지도 헷갈리잖아요?”
일단 확실한 점이라면 지금 불안에 떨고 있는 그녀가 진성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전 진성 자신에게 연달아 물어본 질문들만으로도 벌써 몇 가지를 유추할 수 있는지.
‘빙의된 모험가는 한둘이 아니야. 이 사람이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바깥이 몇 년’이라고 물어본 걸로 봐서는 온 지도 꽤 됐을 테고…… 그 사이에 ‘몇 사람’이나 되는 빙의자, 모험가들을 만났을 거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이곳, 천계를 벌써 거쳐 갔다는 뜻일 테고.’
또한 천계인 이곳에 당도하느라 얼마나 걸렸냐는 말 또한 ‘아라드에서의 초반부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기간에 대한 질문이라 이해할 수 있을 터, 그것을 굳이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그녀는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는 방증이 아닐까.
“잉? 그, 그러니까! 일단 정체부터-.”
“예, 맞습니다. 빙의된 사람입니다. 바깥의 시간이라면 제가 빙의되기 직전의 시간을 말씀하시는 걸 테니, 그때가 이천이십-.”
그녀의 질문을 전부 이해한 진성이었으나 몽땅 답해주진 않았다.
눈앞의 인물은 어떤 사람인지. 우선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말해주어도 상관없는 부분에 대해서만 스리슬쩍 언급한 채 상황을 살필 요량이었건만.
“이잉? 진짜요?! 바깥이 벌써 그렇게 됐다고요?”
연도를 듣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녀의 얼굴을 보며 진성은 잠시 당황해야만 했다.
“그……렇죠.”
“거짓말! 진짜로? 맞아요? 연도 확실해요!?”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그럼 2년이 아니라 사실상 3년이 되어가는 거네…… 히이잉…….”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똑,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 흐르던 눈물이 줄줄 흐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저, 저기요?”
“벌써, 벌써 빙의된 지, 흐읍, 빙의된 지…….”
그녀는 울먹이며 말을 삼켰다.
그녀의 말에서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
‘……빙의되고 3년 가까이 걸렸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 시간을 보내며 ‘고작’ 천계에 온 것인가?
진성 자신은 빙의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당도한 이곳에?!
‘-당연하게도…… 진眞 각성 일러스트랑 비슷한 저 안경은……’
그냥 어디선가 습득하여 착용한 안경이라는 것인가.
훌쩍거리며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자 메카닉 앞에서 진성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이라면 눈앞의 ‘진정한 모험가가 되어야 하는 자’ 또는 ‘연단된 칼날의 후보 중 하나’로 선별되어 빙의된 이 사람이 유해한 인물일 것 같지는 않다는 점.
오히려 무해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태도의 그녀를 보며 진성은 마음을 굳혔다.
“저기, 일단…… 가실까요?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네, 흐읍, 얘기 좀, 흐읍, 해요. 여긴 위험하니까.”
그 와중에도 빙의자다운 면이라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와중에도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는 점일까.
심지어 일반 유저가 접근할 수 없고, 당연히 그들을 위한 NPC 역시 배치되지 않은 거리를 향해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진성은 묵묵히 쫓았다.
* * *
천계의 황도 겐트의 골목, 부서진 의자에 마주 앉고도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진성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은 비비. 레벨은 57.
빙의 시점 나이는 스물한 살.
‘이제 거의 3년이라 말할 정도였으니. 그럼 스물네 살 가까이 되었다고 봐야 하려나.’
그러나 현실에서의 24세라 해도 대학생 또는 사회 초년생 정도로, 고교 시절의 티를 이제야 조금쯤 벗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면인 내 앞에서 그렇게나 펑펑 운 것도 그렇고……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이러저러한 말들을 다 해주는 걸 보면-.’
21살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곧장 빙의가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어쩌면 고등학생 때의 마음가짐 그대로 이곳에서 버텨온 것은 아닐런지.
혼자 외떨어진 상태에서 독립심이나 자립심을 키우는 성향도 있지만, 그 반대의 성향 또한 있지 않은가.
‘겁을 먹고 안으로 움츠러든, 그런 유형의 사람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 나 또한 예전에는…… 던파를 하기 전에는 현실의 친구들도 거의 없을 지경이었으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게임 던전앤파이터에 빙의된 이후 어떤 고생을 했는지.
한숨을 내쉬는 비비를 보며 떠올린 진성은 가벼운 위로 한마디를 건넸다.
“힘들었겠네요.”
“……그쵸. 그리고 여메카가! 분명 이론상으로 계산했던 데이터값이 있는데도! 실제로 스킬을 돌려보니 최대치의 딜값을 뽑아내기가 어렵단 말이에요. 심지어 그런 메카들을 일일이 조종해야 하는 줄은 몰랐다구…… 나는 그냥 계수 분석이나 하고 퍼쿨로 따져봤을 때 여자 직업 중에는 메카가 제일 괜찮아 보여서 메카로 하겠다고 한 거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거 할 걸 그랬어요.”
그 말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듯 그녀는 쌓인 것들을 미주알고주알 말해주었다.
동시에 진성에게는 당황스러운 고백이기도 했다.
“음? ‘하겠다고 했다’? 비비 씨는 직업을 직접 골랐단 말이에요? 네메르한테서?”
진성 자신은 그냥 다크나이트가 되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툭, 불려왔었다.
그런데 비비는 직업을 스스로 골랐다고?
자신에게 유리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잉? 네메르? 몰라요. 날개 달리고 창 든 여자 있었잖아요. 난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네메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한테!?
진성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기억을 더듬어 맞춰볼 수 있었다.
“빙의…… 된 지 3년 정도 됐다고 했죠? 3년 약간 안 됐다고?”
“네.”
“그러면 마지막 업데이트가 뭐였어요? 빙의 전에 던파에서 마지막 업뎃 된 거.”
네메르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감도 잡지 못한 과거의 던전앤파이터만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추론에 의한 질문이었으나 진성은 더욱 당황해야 했다.
“시즌8 업데이트되고 좀 지나서였을 거예요. 만렙 110으로 확장되고 에픽 템 풀린 거 보고, 자잘한 업데이트 몇 개를 했고, 그렇게 템이나 스킬 밸패된 거 분석이나 하다가 갑자기 잡혀온 거라…….”
진성이 아라드에 떨어진 날을 기준으로 그리 오래 전은 아니다.
자신이 이곳에 끌려오게 된 계기였던 레인저 유저에 비하면, 오히려 극히 최근이다.
“으음? 그러면 스토리상으로는- 에픽 퀘 깰 때는 대마법사의 차원회랑까지 해본 거 아녜요?”
“그, 그게…… 저는 사실 스토리 그런 건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다 스킵했거든요.”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레기온에서 등장하니까 어쨌든 들어볼 수는 있었을 텐데요?”
일반적인 던전과 달리 오직 ‘보스 몬스터’와의 대결이 핵심인 던전, 레기온.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들이 특히 메인 시나리오 퀘스트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에, 기타 일반적인 몬스터 따위는 모두 배제한 채 그들과의 1:1 대결을 통하여 그 서사에 다시금 집중케 유도하는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시스템이다.
즉, 레기온 던전이 된 <대마법사의 차원회랑>에 등장할 정도로 초월자 네메르는 플레인:아라드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뜻이건만!
‘네메르라는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외모는 똑같아.’
진성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새로 나온 템 조합이나 그런 거 분석하는 게 재밌어서……. 딱히 몬스터 이름 같은 건 별로…….”
“아.”
그러나 진성은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진성 자신에게 있어 ‘상식’이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게 아닐 수 있다.
기간이 문제가 아니다.
이 사람은 순수와는 또 다른 이레귤러라 할 수 있었다.
‘순수 그 인간이 온갖 것을 동시에 하는…… 뭔가 산만한데다 정신없는 그런 느낌이었다면-.’
비비는 반대로 하나에만 꽂히는 타입이라는 걸까.
자기 관심사에 눈이 돌아간 나머지, 네메르를 직접 상대해본 경험이 있음에도 자신을 소환한 이가 누군지 제대로 못 알아볼 정도의 인간이라는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진성은 어쩐지 한숨을 내쉬고 싶어졌다.
‘……이런 사람까지 소환하는 게 맞느냐는 거지. 진정한 모험가이자 연단된 칼날의 후보! 맞아?’
네메르의 선구안에 슬쩍 의심까지 가는 진성이었다.
물론 게임 던전앤파이터의 모든 유저가 네메르를 곧장 알아볼 수 있는 것도, 그 이름을 즉각 떠올릴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多캐릭터 권장 게임인 던전앤파이터에서 여러 직업군의 캐릭터를 한 번씩 키워보는 건,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고수이거나 또는 일정 시간 이상 게임을 즐겨온 유저라면 거의 다 겪어보는 일이 아닌가?
‘나이트 직업군을 키워봤으면 캐릭터 만들자마자 나오는 프롤로그 컷씬에서도 등장하는데!’
진성이 당황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비비는 민망해하며 말을 돌렸다.
“벤팅크 잡는 것도 진짜 겨우겨우 했는데…… 하아.”
그리고 그 말은 다시금 진성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었다.
“벤팅크 잡는 퀘스트를 하셨나요?”
“네. 그거 끝내고 다음 퀘스트가 뭔지 고민하고 있는데 벤팅크를 직접 끌고 가시는 모습을 봐서…… 제가 쫓아간 거였거든요.”
비비는 수줍게 말했다.
역시나 퀘스트의 순서나 흐름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걸 고백한 게 부끄럽다는 말투였으나 지금 진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벤팅크가 이송되던 중 날뛰기 시작한 건 분명히 오염이었다. 그래서 내가 처리한 거였지.’
단순히 여자 거너 유저의 퀘스트가 오염되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
진성은 비비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아뇨. 벤팅크까지 했으면 그다음 퀘스트가 저희가 만났던 그거거든요. TMH 통신병 처리.”
“그……런가요?”
진성의 강렬한 눈빛을 받은 비비는 재빨리 금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게임으로 즐기는 유저가 아니라……. 진정한 모험가 후보들, 빙의된 사람들의 퀘스트도 오염될 수 있는 건가.’
『플레인:아라드에 스며들어 칼날을 부러뜨리려는 존재의 방해를 뿌리쳐야 하리니. 그대는 캐릭터 모험가들이 진정한 모험가로 거듭나는 연습을 마칠 수 있도록, 진정한 모험가 후보가 된 자들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질 칼날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 이것이 연단 중인 칼날을 부러뜨린 자의 책임이로다.』
네메르의 말이라면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기에, 진성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오염의 원인자>라는 존재가 칼날의 연단을 방해하려 한다면 그 우선순위의 측면에서만 봐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캐릭터 모험가를 방해하는 것보다 이미 빙의된, 진정한 모험가들…… 그들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질 칼날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게 먼저지. 칼날의 후보들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칼날이 된 자들을, 그들이 더욱 날카로워지기 전에 부러뜨리는 것도 중요할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합당한 추측이라도 생각만으로 알 수는 없는 법.
적어도 한 번은 확인을 해봐야 한다.
일반적인 유저가 아니라 빙의된 자들의 퀘스트가 오염되어 있다면, 그것은 또 진성 자신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사도 안톤을 상대하기 전에라도…… 천계의 황녀를 구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는 <시간의 문>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방향을 잡기 위해서라도.’
그나마 천계의 초반부인 이곳에서 어느 정도 단서를 잡아내야 한다.
한 번 보고 헤어질 일반적인 유저와 다르기에, 그들에게 부여된 사명은 진성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과 다르지만 어떤 의미로는 ‘같은 사람들’이나 다름없기에.
진성은 비비에게 스윽, 몸을 기울였다.
“그다음 퀘스트…… 저랑 한번 해보실래요, 비비 씨? 파티 맺고.“
그러곤 제안했다.
오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빙의된 자와 파티를 맺어볼 필요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