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1
팔급마군을 보고 흠칫 놀란 봉란은 한제를 보며 또 한 차례 놀라고 말았다. 단 몇 년 만에 한제는 결단기에 이르러 있었다.
하지만 한제는 마량의 몸을 빼앗은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몸을 빼앗기 전에 이미 결단기에 이른 상태였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랬다면 다시 결단기에 이르는 것은 훨씬 수월하고 빠를 것이다.
봉란은 한참 침묵하다가 냉담하게 물었다.
“저 자가 3년 동안 찾아다닌 자가 너였던 것이냐?”
한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곧장 화제를 바꾸었다.
“봉란 선배님, 부탁이 있습니다. 꼭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봉란은 꺼리는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팔급마군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해 보아라.”
“신도술을 보고 싶습니다.”
한제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봉란은 한참이나 침묵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는 팔급마군을 살폈다. 지난 3년 동안 이 팔급마군의 수준에 대해 어느 정도 추측을 해왔던 그들은 지금 화분맹의 코앞에 이르러 있는 이 노인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봉란의 뒤에 있던 붉은 얼굴의 노인이 한제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우리 전신전의 제자라면 신도술을 봐도 상관없지. 따라오너라.”
말을 마친 그는 곁눈으로 팔급마군을 살폈다. 허나 팔급마군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여기서 한제와 갈등을 일으켜서 좋을 게 없었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도움을 주고서라도 관계를 원만하게 만드는 편이 자신에게 득이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노인이 말했다.
“난 여기서 기다리지. 조금의 손실이라도 끼쳤다간 이 산의 모든 생명을 자네와 함께 순장시켜 버릴 거야.”
붉은 얼굴의 노인은 살짝 몸서리를 치더니 산봉우리 쪽으로 향했고 한제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산봉우리 뒤쪽의 작은 동굴 밖에 멈추었다.
“한제라고 불러야겠지?”
붉은 얼굴의 노인이 침묵을 깨고 동굴 밖에서 한제를 응시하며 물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제야, 이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따지지 않겠다. 난 네가 얼마나 많은 말썽을 일으켰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전신전을 끌어들이지만 말아다오. 그 점에 대해서만 분명히 약속한다면 네게 신도술을 보여주겠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선배님, 걱정 마세요. 신도술만 확인하고 저는 곧장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노인은 한제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 에 옥패 하나가 나타났다. 그가 그 옥패로 돌벽을 치자 옥패에서 흰 빛이 발산되더니 빠르게 온 돌벽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돌벽에 나타난 한 층의 수정 빛이 점점 짙어지더니 돌벽을 거울처럼 만들어버렸다.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거울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물속에 가라앉는 듯 돌벽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한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가 돌벽 안쪽으로 들어선 순간, 외부에서 체내로 전해져 들어오는 듯한 서늘한 느낌이 났다. 마치 한 층의 축축한 천이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다. 서늘함이 지나간 뒤에 한제는 자신이 이미 돌벽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쪽을 돌아보니 바깥에서 봤던 것처럼 잔잔한 물결이 이는 돌벽이 있었다. 그 돌벽으로 손을 뻗어 집어넣자 서늘한 느낌이 다시 느껴졌다.
“이곳은 우리 전신전의 연기술로 제작한 수경문(水鏡門)이야. 옥패가 없다면 화신기 이상의 수준의 수련자가 아닌 이상 이 동굴 안으로 진입할 수 없지.”
붉은 얼굴의 노인이 덤덤하게 말했다.
연기술로 제작했다는 말에 흠칫 놀란 한제는 다시 돌벽을 자세히 한 번 살펴보다가 붉은 얼굴의 노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 안의 공간은 굉장히 넓었다. 중앙의 대청 외에도 1백 개가 넘는 석실이 사방으로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각 석실 밖에는 돌벽이 하나씩 붙어 있었다.
“이곳에는 총 365개의 석실이 있고 각 석실에는 수경문이 딸려 있지. 사실 이 수경문들은 연기전 제자들의 견습기가 만료됐다는 상징이야.”
노인은 한제가의 궁금증을 눈치 챈 듯 설명했다.
한제는 동굴 안의 전경을 찬찬히 살핀 뒤 시선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이미 중앙 대청에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네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한 줄의 긴 선반이 있었는데 각 층에는 위패가 놓여 있었다.
맨 위층에는 하나의 위패만 있었고 나머지 층에는 매우 많은 위패가 있었다.
한제의 시선이 맨 위층의 위패에 닿았다. 그 위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신전의 시조(始祖), 궁묵
“궁묵 시조님은 우리 전신전의 시조야. 신도술 역시 그분께서 발견하셨지.”
붉은 얼굴의 노인이 위패를 향해 허리를 숙여 절하며 한제를 향해 돌아섰다. 한제도 잠시 망설이다가 위패를 향해 절을 했다.
신도술(神道術)
붉은 얼굴의 노인은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그 위패의 뒤쪽으로는 청옥으로 만들어진 돌벽 하나가 있었는데 그 돌벽에는 무수히 많은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돌벽의 가장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신도술’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적힌 글귀에 한제는 적잖이 실망했다.
제자 진충이 기억을 더듬어 쓰고 그리니 후대 사람들은 수련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라.
“실망했느냐?”
붉은 얼굴의 노인이 한제를 바라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궁묵 시조께서 신도술을 발견하신 다음 해에 우리 전신전에 배신자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신도술에 관련된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지. 얼마 지나지 않아 4성 수련국인 천강국에서 찾아와 궁묵 시조과 밀담을 나누더니 신도술 원본을 가지고 가버렸어. 그들이 떠난 사흘 뒤, 궁묵 시조께서도 떠나셨고 그 뒤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노인은 추억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도술은 내 평생 봐온 가장 기이한 술법이야. 어떤 사람은 보자마자 바로 깨달았지만 말로는 표현하지 못했지.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진충 시조님은 자질이 평범하여 궁묵 시조님의 문하 제자들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분이었지만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셨다.
신도술을 그리고 새겨 남기면서 진충 시조님은 후대 사람들에게 이 술법은 굉장히 신통하지만 자신의 수명이 부족하여 단 1할밖에 기록하지 못했으니 이를 수련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한제는 그의 말을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사실 진충 시조님은 과한 걱정을 하신 게야. 신도술이 어찌 간파하기 쉬운 술법이겠느냐. 우리 전신전에서 지난 수천 년 동안 이 술법을 간파한 사람은 서른 명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 절반 정도만 원영기에 이르는 데 성공했지. 화분국의 다른 문파 사람들이 보고 있는 신도술은 사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 중 신도술을 간파하는 사람은 더 적지.”
한제는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 묵묵히 청옥으로 만들어진 돌벽을 바라보았다. 허약한 남자 한 명이 수명이 끝에 달한 그 상황에서도 전력을 다해 벽에 그림과 글을 새기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난 밖에서 기다릴 테니 알아서 보도록 해라. 수경문으로 봉인되어 있는 곳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붉은 얼굴의 노인은 말을 마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갔다.
한제는 돌벽을 보면서 글자 한 자 한 자 살폈다. 벽에 새겨진 글자체는 굉장히 보기가 어려웠으며 심지어 군데군데 글자가 겹쳐 있기까지 했다. 글과 그림을 살피던 한제의 미간이 점점 구겨져갔다.
한참 뒤,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하지만 두 눈은 변함없이 청옥 벽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위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그의 머릿속에 떠다녔다.
글자는 보면 볼수록 아리송했다.
‘신도술이라는 것이 원래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가?’
한제의 미간은 잔뜩 구겨졌다.
끝까지 그 내용을 살핀 한제는 아예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빽빽하게 적혀 있던 낯설고 어색한 글을 되새김질했다.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제는 천천히 두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돌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로 그때, 한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안 돼!”
그가 돌벽을 본 그 순간, 기억했던 글자들이 갑자기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돌벽에 새겨진 글자들은 방금 봤던 것들이었으므로 굉장히 익숙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마치 기억 속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한제의 얼굴은 한층 어두워졌다. 몇 년 전 그가 주자홍에게 신도술을 탁본해오게 했을 때 그녀는 신도술이란 본디 탁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답한 바 있었다. 당시에도 그 말이 거짓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이제 보니 말 그대로 누구도 탁본해낼 수 없는 것인 모양이었다.
다시 청옥으로 된 벽을 살핀 한제의 눈빛이 「제자 진충이 기억을 더듬어 쓰고 그리니 후대 사람들은 수련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라」는 구절에 닿았을 때, 그는 이전과 달리 진충이라는 이름이 거대하게 느껴졌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신도술의 내용을 살폈다. 2각 후, 한제는 다시 한 번 신도술의 내용을 모두 기억 속에 새겼지만 곧바로 아까와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한제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져갔다. 그는 청옥 벽을 노려본 채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용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끊임없이 눈으로 훑어보기만 했다.
맨 처음으로 신도술의 내용을 다 살필 때까지는 두 시진 가까이 걸렸지만 지금은 단 2각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고 급기야는 1각 만에 내용을 다 훑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속도는 점점 빨라져, 이제 1각 안에 세 번이나 훑을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제의 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청옥으로 만들어진 벽이 있는 것처럼 하나하나의 글자들이 끊임없이 눈앞에서 떠다녔다.
또한 그 글자들이 떠다니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져, 이제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에서는 여전히 통증이 느껴졌다. 급기야는 피눈물까지 흘렀다.
바로 그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 찰나의 순간, 한제는 눈앞에 있던 청옥 벽에 새겨진 글자들이 천천히 사라지더니 그 벽 안에서 하얀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천천히 나타났다.
얼굴은 흐릿해서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두 손은 잔영을 그려낼 정도로 빠르게 몇 개의 결인을 만들어냈다. 잠시 후 그는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불어났다.
이는 팔급마군의 분신과는 달랐다. 팔급마군의 분신들은 실력은 같아도 동작 하나하나는 본체에 비해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영이 만들어낸 분신은 모두 민첩하게 움직이면서도 조금의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본체와 분신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팔급마군의 분신은 강대한 법술을 통해 억지로 분리시켜낸 것일 뿐, 분신술이라는 신통한 법술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제는 이를 몰랐다.
천천히, 하얀 옷을 입은 인영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결국 흩어져 사라졌다.
한제는 다시 두 눈을 감고 창백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몇 개의 구결이 늘어나 있었다. 하나하나 분석을 거친 한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눈을 떴다. 그는 이미 이 신도술에 대해 이해를 마쳤다.
신도술은 분신을 만들어내는 술법이었다. 원영기에 이를 확률을 높여주는 것도 사실 분신을 만들어내 동시에 수련하여 수련 속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영기에 진입하는 순간에 분신과 본체를 합체시키면 성공률은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다만 이 술법에는 분신의 수련에 대해 큰 단점이 있었다. 만들어낸 분신의 수준은 바닥이었으며 수명도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 술법은 계륵 같은 존재였다.
진충은 수명이 부족하여 신도술을 완벽하게 기록하지 못하겠다는 말뿐만 아니라 이 신도술의 단점에 대해 고민하여 도출해낸 해결 방법에 대해서도 남겨두었다.
사전에 대량의 단약을 준비해놓고 분신을 만들어낸 뒤 30년간 단약을 먹여 빠르게 분신의 수준을 올리면 없는 것보다는 좀 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만약 단약이 충분하다면 30년 만에 분신의 수준을 결단기로 올려놓을 수 있고 그렇다면 그 분신과 결합한 순간 원영기로 진입할 확률은 분명 훨씬 높아질 것이었다.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신도술을 수련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그에게는 분신에게 먹일 만큼 많은 단약이 없었다. 자신이 먹을 단약도 부족한 상황에 분신에게 먹일 단약이 어디 있겠는가?
이 신도술을 익히느니 원영기로 진입할 확률을 높여주는 단약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