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11
폐허가 되어버린 5급 성역. 한제와 수도자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에 이른 한 여인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늦은 건가.”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흘렀다.
비통함과 슬픔, 절망이 뒤섞인 눈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그녀는 마음이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한 줄기 사기(死氣)가 오래도록 주위를 맴돌았다.
그때였다.
“그자를 구하고 싶은가?”
한 노인의 목소리가 우주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여인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죽지 않았으나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석상이 된 그를 찾아라. 어쩌면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신 그 대가는 작지 않을 것이다.”
노인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다가 사라졌다.
여인의 두 눈에 맺혔던 눈물이 마르고 절망과 슬픔은 굳은 결심의 빛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 ★ ★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사흘, 열흘…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여인은 5급 성역의 어느 구석지에서 유유히 표류하고 있는, 상처가 가득한 석상을 발견했다.
재빨리 다가간 그녀는 석상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그녀는 참아왔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석상 위로 떨어졌다.
여인은 석상을 안은 채 누구도 찾을 수 없을 장소로 향했다. 운해성역의 짙은 안개 속, 몇 급 성역인지도 알 수 없는 곳의 어느 황량한 대륙이었다.
그곳에는 흉수가 매우 많았다. 수련자를 거의 보지 못한 것인지 흉수들은 여인을 보는 순간 포효를 내질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여인이 풍기는 어떤 기운에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대륙 북쪽의 동굴을 정리한 후 석상을 한쪽에 가지런히 놓았고 그곳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여인은 매일 자신의 피로 석상 곳곳을 닦았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석상을 바라보는 눈빛은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은 점점 커졌다.
여인이 바른 피를 흡수하면서 석상은 조금씩 표면에 광택이 돌기 시작했다. 특히 처음에는 석상 전체에 바른 피가 흡수되는 데 온종일 걸린 것과 달리 이제 다섯 시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여인의 피가 점점 더 많이 필요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그동안 여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피로 석상을 닦았다. 쌀 한 톨 크기의 빈틈도 없이 정성을 들여 닦는 그녀의 모습은 고귀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석상은 점점 광택을 찾아갔고 모습도 조금씩 젊어져갔다. 반면 여인의 모습이 조금씩 늙어가고 있었다. 대량의 피를 그것도 원력이 함유된 피를 잃은 탓이다.
“그는 일반적인 생기가 아니라 심신과 원신, 그리고 영혼의 생기를 잃었어. 다시 깨우려면 내 생기를 주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
여인은 그날도 묵묵히 자신의 피로 석상을 닦았다.
한편, 바로 그 시간에 한제는 잠든 채 꿈을 꾸고 있었다. 천역주로 인한 행운의 기회와 관련한 꿈이었다.
이 꿈에 빠진 사람은 현실과 허상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었다.
이때 한제의 눈앞에는 안개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기다란 띠 형태의 발광체가 뒤얽히며 빠른 속도로 번쩍번쩍 스쳐 갔다.
형태 없는 혼백인 한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점차 흩어졌다. 언젠가는 혼백마저 완전히 흩어져 사라질 터였다. 갈수록 강렬해지는 추위가 그의 혼백을 뒤덮었다.
봉계의 지존
얼마나 걸었을까? 낮과 밤이 없는 이곳에서는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한제는 안개 속을 오가는 발광체가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라는 다섯 종류의 원력을 품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데 한제에게는 이 오행의 요소가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다.
“여기는⋯⋯ 천역주의 세상인가?”
이후로 또다시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을까? 어쩌면 몇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때까지도 한제의 혼백은 흩어지지 않았다.
따뜻한 핏빛이 사방에서 침투하듯 스며들어 추위를 몰아내 주었다. 또한 이 핏빛으로 그의 형태 없는 영혼은 힘을 얻었고 혼백은 점차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초점 없던 눈빛 또한 총기를 되찾아갔다.
한제는 주위를 둘러보며 지난 2천 년간 보고 겪은 것들을 떠올렸다.
“이곳의 오행 요소들은 내가 모았던 것들이구나.”
이제 한제의 얼굴에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또렷한 표정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여전히 꿈속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묵묵히 사방의 모든 것들을 느끼던 한제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오랜 세월 걸어온 길. 그러나 이 천역주 세계에 너무 깊이 들어온 탓에 돌아갈 길은 찾기 힘들었다. 길을 찾는다 해도 출구가 없을 터였다. 그로서는 이곳에 갇힌 것과 다름없었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완도 이곳에 있겠지⋯⋯?”
외로움과 고독이 몸에 밴 그에게는 세상에 홀로 된 느낌도 낯설지 않았고 그렇기에 별다른 불편함은 없었다.
“분명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던 기억이 나는데… 한데 나는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한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의 몸을 살피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몸은 반투명한 상태였다. 그나마 사방에서 몰려드는 따듯한 핏빛이 체내로 녹아들면서 혼백이 점차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한데 이 핏빛은⋯⋯?”
한제는 체내로 녹아드는 핏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빛은 따스했고 편안했다. 그러나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천역주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혼백을 자양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볼 뿐이었다.
그때, 한제의 꿈 속 저 멀리서 아주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여기⋯⋯.”
순간 한제의 표정이 변했다. 속삭임은 그의 귀에 닿자마자 한 줄기 파동이 되어 혼백 안에서 울려 퍼졌다.
“이 천역주의 주인은 나다. 그런데도 천역주의 세계에서 나의 혼백을 진동시키는 목소리라니! 확인을 해봐야겠군.”
결정을 내린 한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혼백 형태인 관계로 그저 둥실둥실 떠갈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핏빛이 나타나 마치 그를 쫓아오듯 혼백으로 녹아들었고 점점 짙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종국에는 번개처럼 안개를 뚫고 이동했다. 이에 사방을 뒤덮은 안개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한제는 파죽지세로 돌진했다.
★ ★ ★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1년, 2년, 3년⋯⋯.
그동안 한제의 원력은 조금도 소모되지 않았다. 이곳은 천역주 세계였고 그는 천역주의 주인이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그는 물 만난 물고기와도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그동안에도 핏빛은 쉬지 않고 혼백에 스며들었다. 덕분에 그의 혼백은 이제 거의 실체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한제는 그 핏빛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점차 식어가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데 그때, 또다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했다.
“여기⋯⋯여기⋯⋯.”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우뚝 멈춰 섰다. 전방을 뒤덮은 옅은 안개 속에 하늘을 뚫을 듯 웅장하고 거대한 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스스로를 미물 같은 존재로 느끼게 것 같은 웅장한 문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는 문이로군.”
거대한 돌문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두 개의 문짝이 열리면서 그 사이로 한 줄기 거대한 틈이 드러났다.
“여기⋯⋯여기⋯⋯.”
그 틈이 드러난 순간, 속삭임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 속삭임은 파동이 되어 한제의 원신에 왜곡을 일으켰다.
한제는 바짝 졸아든 눈으로 거대한 돌문을 응시했다.
그 순간, 핏빛의 도움으로 혼백이 실체화된 한제는 더 많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수도자와의 전투와 갑작스레 나타났던 옥패까지.
수도자는 분명 그 옥패를 ‘봉계의 옥’이자 주인님의 물건이었다고 했다.
한제는 수도자의 그 말에서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찾아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백발 동자가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수도자의 주인이 봉계의 지존임을 그리고 천역주의 전 주인임을 확신하게 됐다.
“내가 그 주인의 환생이라 착각했던 것이지. 또한 나의 혼을 뒤져 천역주를 찾아내려 한 것도 자신의 주인을 찾아 없애기 위해서였을 테고.”
더불어 백발 동자가 봉계의 옥을 보고 대경실색한 이유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봉계의 지존은 진정한 죽음에 이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기억을 되찾은 한제는 옥에서 발산된, 금빛으로 이루어진 손가락이 백발 동자의 미간에 꽂혀 있던 칠채정을 완전히 박아 넣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로 인해 상대는 중상을 입고는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쳤다.
“여기⋯⋯ 들어와⋯⋯ 여기⋯⋯.”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의 귀로 전보다 더욱 또렷해진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그 목소리에 천역주 세계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누구냐!”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돌문 너머를 응시하며 물었다.
“나는 봉계의 주인… 봉계의 지존이다⋯⋯. 들어와라⋯⋯. 악의는 없다⋯⋯. 널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제는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저 문 너머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음이 분명했다. 천역주와 관련한 비밀도 이곳을 나가는 방법도 저 안에서는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한제는 거대한 돌문의 틈 너머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