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12
★ ★ ★
운해 2급 성역의 무궁무진한 안개로 뒤덮인 어느 구석지 황량한 대륙.
가부좌를 튼 이천매의 앞에는 반짝이는 석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석상은 피로 잔뜩 물들어 있었지만 핏빛은 점점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 이천매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녀만의 파란 머리카락도 광택을 잃었고 슬픔에 잠긴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의 손은 상처로 가득했고 비쩍 말라 있어 젊은 여인이 아닌 노파의 그것과도 같았다.
채 아물지 않은 손가락의 상처를 뜯어낸 이천매는 다시 피로 석상을 닦았다.
어느덧 4년. 그동안 이천매는 동굴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석상만을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번만 피로 닦아내면 됐던 석상은 이제 하루에 네 번이나 닦아야 했다.
“반드시 당신을 깨울 거예요.”
이천매는 석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그간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렀는지 눈가 주름을 따라 눈물 자국이 있었다.
지난 4년간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정말 이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당시 스승에게는 그렇다고 답했으나, 사실 자신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멀어져가는 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물속의 물고기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 ★ ★
천역주의 거대한 문 너머로 한 발 들어선 한제는 전혀 다른 세상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그곳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였다.
안개 없이 반짝이는 별만이 가득한, 지극히 아름다운 우주. 더불어 매우 고요한 곳.
“너는 이 문 안으로 들어온 세 번째 사람이다⋯⋯.”
목소리가 고요한 우주를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그러자 우주 곳곳의 수없이 많은 별들이 번득였고 그 빛은 하나로 응집해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들어와라⋯⋯. 나와 연이 닿은 세 번째 사람이여⋯⋯.”
이왕 결심한 것이 있다 보니 한제는 망설임 없이 회오리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 순간, 그의 혼백은 흩어져 사라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한제의 눈앞에는 파란 하늘과 검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아까의 그 고요한 우주의 어느 별 중 하나였다.
검은 대지 위로는 가득한 풀들이 바람에 휩쓸리며 솨아아 소리를 냈다. 바다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저 멀리에는 하늘을 뚫을 듯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고신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푸른빛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여기저기 손상되고 균열로 뒤덮인 나무였다.
모든 생기를 잃은 듯한 나무는 운명의 흐름에 발버둥 치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내 목숨으로 만들어낸 나무다. 덕분에 내가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지.”
목소리는 거대한 나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제는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난 원고 시대 선역에서 왔다. 이곳 사람들은 나를 봉계의 주인, 봉계의 지존이라 불렀지. 너보다 앞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것은 나와 연이 닿았다는 뜻. 첫 번째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절륜(絶倫)한 도법과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다. 두 번째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규칙의 육신을 절반 내주어 자질을 드높여주었지. 자 세 번째 사람이여.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한제는 침묵한 채 한참 동안 거대한 나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도자는 네가 몰아낸 것인가?”
“그렇다. 잃어버린 나의 옥을 네가 찾아낸 덕에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 그놈은 나를 배반한 노예였다.”
“나를 도운 이유는?”
한제는 놀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덤덤하게 물었다.
거대한 나무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답했다.
“아주 오래 전, 태고 성신에 계내와 계외의 구분이 없었던 시절… 이 무궁무진한 우주에는 원고 선역이라는 성지(聖地)가 있었다. 원고 선역은 우주를 통솔하면서 수많은 종족을 교화시켰고 모든 생명이 일정 수준에 이르게 해 각자의 우주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왔지. 승급을 통해 그들이 원고 선역에 들어와 선역의 백성이 될 기회도 열어주었다.”
한제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허나 그 완벽한 순환은 외계에서 들어온 보물 하나로 완전히 뒤집히고야 말았다. 급작스러운 변화로 원고 선역은 둘로 분열되었고 결국에는 흩어졌지. 그곳으로 향하는 길도 전부 봉쇄되었다.
또한 그로 인해 태고의 성신은 계외와 계내로 갈라졌고 그 중심에는 진이 형성되었지. 둘로 나뉜 원고 선역 중 계외에 자리한 곳이 계외의 성지가 되었다. 반대로 계내에도 분열된 원고 선역의 한 부분이 있었지. 바로 내가 온 곳이다.”
원고 선역이 둘로 나뉜 탓에 태고의 성신이 분리되고 계외와 계내라는 두 개의 우주가 생겨났다니! 여태 계내와 계외가 그런 관계였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신비로운 이야기를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그 급작스러운 변화에 원고 선역에서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상이 처음 열렸을 당시부터 존재했던 원고 선황(仙皇)도 그 법보로 인해 중상을 입었지. 허나 분열되면서 계외로 나간 원고 선역 사람들은 아홉 선비(仙妃)의 통솔에 따라 계내를 호시탐탐 노렸어. 당시 나타난 그 법보와 계내에 자리한 원고 선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한 것이지.”
나무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난 원고 선역의 도선(道仙)으로서 이곳에 이른 뒤 계내의 모든 생명을 통솔해 계외의 침략에 대항하려 했다. 허나 뜻을 이루기도 전에 노예의 배신으로 습격당했고 계외 사람들과 계외의 원고 선역 사람들 손에 중상을 입었다. 결국 선비의 공격에 육신을 잃고 천역주 속에서 법보의 영혼으로 잔존하게 되었지.”
“천역주는 대체 무엇인가!”
질문을 하면서도 한제는 심장이 쿵쾅댔다.
“당시 원고 선역의 분열과 급변을 야기한 법보다. 사실 다른 우주에서 온 진정한 보물은 천역나침반이었다. 거기에는 아홉 개의 보물이 붙어 있었지. 당시 우리가 천역나침반을 얻었을 때에는 그중 세 개만이 남아 있었고 그중 하나가 천역주였다. 분열 후 계내 원고 선역은 세 개의 보물 중 두 개를 거두었지. 선황께서는 도선으로서 계내를 통솔하여 계외와 싸워야 하는 내게 천역주를 하사하셨다.”
천역나침반이라는 말에 한제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역주만 해도 그로서는 가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보물인데 그런 보물을 아홉 가지나 지닌 나침반이라니!
천역주의 내력
“내가 천역주의 첫 번째 주인은 아니다. 난 수만 년의 연구 끝에 나 이전에 천역주의 주인이었던 존재가 두 명 더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보다 월등히 뛰어난 존재들⋯⋯. 다른 우주의 수련자겠지!”
봉계의 지존보다 월등한 존재라니, 도대체 어떤 자들이란 말인가!
“나는 천역주가 천역나침반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허나 안타깝게도 선황께서 폐관수련 중이시었기에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연구를 통해 천역주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내고 태고신경의 소재까지 찾아내셨을 것이다!”
한제는 태고신경(太古神境)이라는 말에 큰 충격과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원고 선역과 천역주의 유래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오래 전이 아닌데 태고신경이라는 존재까지 알게 되고 보니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태고신경은 분명 존재한다. 허나 나 역시 아는 바가 많지는 않지. 내 생기는 곧 완전히 꺼질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지. 선황님이 폐관수련 중이고 원고 선역은 봉인되어 있으니 계외가 침입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펼쳐질 것이야!”
봉계의 지존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자신의 생기가 완전히 꺼져가는 와중에도 계내가 몰락할 것을 걱정하는 모습에 한제는 왠지 숙연해졌다.
“앞서 이곳에 들어온 둘은 천역주의 다음 주인이 되지는 못했다. 그들은 그저 나의 장기 말로 살았을 뿐. 허나 너는 다르다. 너는 이미 천역주에 원신을 녹여 넣었으니 천역주의 새로운 주인이다. 내가 너를 도운 것도 그 때문이다. 난 너를 봉계의 지존으로 만들어 나를 대신해 봉계를 보호하고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게 할 것이다. 선황께서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와 계내 원고 선역의 봉인을 푸실 때까지.”
한제는 흠칫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를 돕고 나면 나는 완전히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봉계의 옥을 따라 열겁의 법보가 되어 계의 중심에 놓인 진에 녹아들어 진의 위력을 강화하고 네가 더 성장할 시간을 벌어주겠다. 네가 임무를 완수하고 선황께 천역주를 돌려드린다면 선황은 네게 상을 내리실 것이다. 피천관의 여인에게 새 삶을 주는 것도 선황이라면 가능하다!”
그 순간, 한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자는 나를 오랫동안 관찰했군. 내가 얼마나 간절히 모완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이를 이용해 선황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하고 있어! 허나 저자의 말대로 선황에게 천역주를 돌려주었다가는 어쩌면 그는 나와 모완을 죽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선 이곳을 벗어나려면 저자의 도움이 필요하니 거절할 수 없다.’
다행이라면 봉계의 지존은 한제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음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칙에 매우 충실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자신을 배신한 자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그를 죽일 기회를 세 번이나 버리지 않았는가?
한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지?”
그때, 거대한 나무기 바르르 진동하더니 엄청난 위압감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위압감은 폭풍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에 한제를 뒤덮었고 그를 감싸더니 거대한 나무 내부로 끌어갔다.
“난 천역주 안에 오랜 세월 머물면서 수많은 비밀을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으나 천역주에 존재하는 태고 외부 우주의 힘으로 네 혼백에 낙인을 남겨줄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 단번에 엄청난 수준의 수련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도경(道境)에 진입해 천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할 수는 있다.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을지는 네게 달렸다!”
목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지며 사방을 뒤흔들었다가 점차 흩어져 사라졌다. 동시에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서 세월의 나침반이 드러났다.
봄이 가고 가을이 오는가 하면 해와 달이 뒤바뀌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2년이 지났다.
★ ★ ★
이천매가 한제의 석상 곁을 지키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6년이 지났다. 6년이란 일반인에게는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수련자에게는 눈 한 번 깜빡이면 지나가는 찰나와도 같았다.
허나 쉬지 않고 석상을 돌봐 온 이천매에게 지난 6년은 일반인들이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길어, 마치 6백 년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매우 병약해 보였고 비쩍 마르기까지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눈빛은 굳건했다.
그녀는 하루에 한 시진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좌선을 통해 최대한 생기를 회복한 뒤 석상에 피를 주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꽃잎이 떨어져가는 꽃처럼 변해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쓸쓸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 ★ ★
6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한제의 석상은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석상이 되기 전의 모습과 흡사할 정도였다. 그럴수록 이천매는 석상을 볼 때마다 한제가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