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13
“약속했잖아요. 배웅해주겠다고⋯⋯.”
이천매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지난 6년간 그녀는 한제와 함께했던 기억들을 떠올려왔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한제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머릿속에 더욱 깊이 남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가끔 스스로에게 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는지 묻곤 했다.
답은 알 수 없었지만 한제의 모습은 마음속에 더욱 깊이 새겨졌다.
하지만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하늘을 나는 새를 올려다보는 물고기였다. 새는 가끔 물가로 내려와 날개를 퍼덕이며 물을 마셨다. 그때면 물속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물고기를 힐끔 봤지만 그뿐이었다. 찰나에 불과한 그 짧은 눈 맞춤이 그녀에게는 영원이 된 듯 머릿속에 남았다.
“그게 정말… 전생일까?”
이천매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열 손가락 가득한 상처를 뜯어 한제의 석상에 피를 흡수시켰다.
★ ★ ★
그렇게 또다시 1년이 지나갔다.
한제의 석상이 피를 흡수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 이제 하루에 2각밖에 쉴 틈이 없었다. 이 1년간 석상이 흡수한 피는 이전 6년간 흡수한 피의 양과 비슷할 정도였다.
이천매는 더더욱 약해져갔고 몸을 회복할 시간도 없이 끊임없이 피와 생기를 소모했다.
저물공간에 있던 단약도 거의 다 써버린 상태라 소모되는 힘을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충분한 양의 단약이 있다 해도 이를 소화할 시간조차 없었다.
지금은 피를 흡수시키는 과정을 조금만 게을리해도 지난 7년간의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될 터였다.
이천매의 얼굴에서 이전과 같은 환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두 눈에는 집착의 빛이 번득였다.
이제 그녀는 이 일이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전력을 다해야만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천매는 저물공간에서 단약을 하나 꺼내 삼켰다. 고작 2각의 휴식시간 안에 단약을 완전히 흡수하기란 불가능했기에 그저 원력으로 전환해 생기로 삼았다. 이를 통해 더 많은 피를 이용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달, 두 달, 세 달⋯⋯. 그렇게 또다시 1년이 흘렀다.
그녀는 이모완처럼 수백 년을 홀로 외롭게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집만큼은 다를 바가 없었다. 자신의 삶이 다할 때까지 한제를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직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하지 않았잖아요.”
이제 한제의 석상이 피를 흡수하는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라져서 그녀에게는 하루에 1각의 휴식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피를 흡수시켜야만 할 정도였다.
이제 그녀는 매우 초췌해져 있었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쇄열기 수준에 기대어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한제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고 그것만이 지난 8년을 견디게 해준 힘이었다.
하지만 9년째에 접어들자 양손에 상처를 내 피를 칠하는데도 석상이 피를 흡수하는 속도를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절망스러운 순간이었으나, 이천매는 굳은 결심 끝에 혀끝을 깨물어 심신의 정혈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정혈은 수련자의 혀끝과 마음에만 있는 것으로 그 양이 수련자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 한 방울은 온몸의 피를 합친 것만큼이나 효과가 컸다.
이천매는 가부좌를 튼 채 혀끝에서 뿜어낸 정혈로 피 안개를 만들어 석상을 뒤덮었다. 그제야 석상이 피를 흡수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정혈을 뿜어낼 때마다 그녀는 더욱 창백해졌다. 운해성역을 떨쳐 울렸던 아름다움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허나 무정하게도 한제의 석상은 한 번의 변화를 일으켰고 흡수 속도 역시 한층 더 빨라져 혀끝의 정혈로도 따라잡지 못하게 됐다.
그 무렵, 이천매는 극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그녀는 절망스런 눈으로 한제의 석상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작은 검을 소환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팟!
상처를 통해 그녀의 마음속 정혈이 뿜어져 나왔다. 이천매는 끔찍한 고통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석상을 돌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10년째에 접어들었다.
“그 목소리가 그랬지. 이렇게… 10년을 버티면 그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 이제 1년 남았어.”
하지만 이제는 정혈로도 석상이 피를 흡수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천매는 결국 원신의 도혈(道血)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는 평생 수련을 해오면서 원신에 스며들어 그녀의 수준의 근본이 된 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피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귀한 도혈은 생기도 포함하고 있어, 말하자면 이천매가 가진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석상이 된 한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의 그녀는 마치 한제를 처음 봤던 그때처럼 벅차도록 아름다웠다.
“당신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이 있지요. 저는 당신을 빼앗을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세상에는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니… 고마워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아마 이렇게 변해버린 당신을 발견한 것이 그녀였다 해도… 또는 모은미였다 해도… 저처럼 했겠지요.”
그녀는 한제의 석상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아요. 그저 당신은 새였고 저는 물고기였던 전생의 그 상황을 완성하고 싶을 뿐. 그 기억에서 새가 된 당신은 제가 있던 물가에 두 번 내려왔지요. 한 번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 또 한 번은 다치고 추락해서⋯⋯. 저는 당신을 뭍으로 힘껏 떠밀었어요. 덕분에 당신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천매는 따뜻한 미소를 지은 채 석상이 된 한제를 바라보다가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체내의 원신이 가동되면서 미간에 회오리가 나타났고 그 안에서 피가 흘러나와 석상 위로 끼얹어졌다. 동시에 이천매는 꽃잎이 다 떨어진 꽃처럼 빠르게 시들어갔다.
이번 1년은 그전의 어느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아홉 번째 달이 됐을 때, 이천매는 조용히 석상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물고기였던 전생에 저 하늘을 노닐던 새를 바라보던 그때처럼.
이내 그녀는 목에 걸려 있던, 자신의 명혼(命魂)이 담긴 옥을 풀어 석상의 목에 걸었다.
“모든 힘을 다했는데도 마지막 세 달은 버티기는 힘들 것 같네요. 그러나 요종의 전장에 나갔을 때 요종 태상장로의 도움으로 혼혈(魂血)을 저장해뒀지요. 그러면 전장에서 죽더라도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요. 이제 그 혼혈을 가져올 생각이에요. 그것만 있다면 나머지 세 달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천매는 석상이 된 한제를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는 저물공간에서 아홉 자루의 비검을 꺼내 산골짜기에 검진을 배치했다. 이는 그녀의 가장 강력한 법보로 전장에서 맹위를 떨치게 해준 것이었다.
검진으로 동굴을 지키게 한 그녀는 단약을 삼키고는 10년 만에 황량한 대륙을 벗어났다. 9급 성역의 요종으로 가는 길이었다.
“명혼이 담긴 옥으로는 한 달 정도밖에 버티지 못할 거야. 그 안에 혼혈을 찾아와야 해. 쉽지는 않겠지.”
깨어나다
세 달이 지났다.
한제의 석상이 놓인 황량한 대륙, 산골짜기 너머의 흉수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포악해졌다. 개중에는 산골짜기로 접근하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아홉 자루의 비검으로 이루어진 검진의 위력에 그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했다.
단숨에 몇 마리의 흉수가 목숨을 잃은 후로는 감히 더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또다시 열흘이 지나갔다.
석상에 걸린 이천매의 명혼의 옥은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그녀의 온기와 보살핌, 사랑이 한 줄기 힘이 되어 석상 곁에 머물러 있었다.
또다시 20일이 지났다.
이천매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산골짜기는 고요했다.
석상이 발하는 빛이 옥과 공명하듯 번득이며 어렴풋이 사방을 밝혔다.
하지만 옥의 빛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어 언제라도 꺼져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이천매가 떠나간 지 27일째 되는 날, 이 황량한 대륙 근처에 하얀 옷을 입은 노파 하나가 나타났다.
손에 옥패를 든 노파는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
그녀는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며 길을 헤맸다. 그리고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 노파는 이 황량한 대륙 앞에 이르렀다.
노파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모습이 사라졌고 다음 순간 대륙 위에서 나타났다. 그러더니 곧장 신식을 펼쳐 쇄열기 절정 수준의 기운을 폭발시키듯 뿜어내 황량한 대륙을 휩쓸었다.
“저기구나!”
그녀는 어느 산골짜기를 찾아내고는 몸을 날렸다. 그곳은 한제의 석상이 있는 산골짜기였다.
허나 산골짜기로 달려들던 노파는 갑자기 튀어나온 아홉 갈래의 검기에 우뚝 멈춰 서버렸다.
“헛!”
가까스로 검기의 공격을 피해낸 노파는 복잡한 눈빛으로 비검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옥패를 휘둘렀다.
옥패는 아홉 갈래의 검기와 충돌했다. 한데 놀랍게도 충돌음이 들리지 않았다. 부딪치는 순간, 옥패가 찬란한 빛과 부드러운 기운을 뿜어내 아홉 갈래의 검기를 감싼 것이다. 그러자 검기들은 바르르 진동하더니 저항을 포기하듯 흩어져 사라졌다.
노파는 다시 산골짜기로 들어섰다.
그녀는 한제의 석상과 그 목에 걸려 있는 옥을 복잡하고 씁쓸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천매, 그 많은 희생이 결국 이자를 위한 것이었더냐! 좋다, 너를 대신해 혼혈을 가져다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키마!”
노파는 저물공간에서 주먹만 한 피 구슬을 소환했다. 하지만 이는 진짜 피가 아니라 한 덩어리 혼백으로 이루어진 피 구슬이었다.
피 구슬은 노파의 손짓에 따라 한제의 석상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석상이 바르르 진동하면서 핏빛으로 번득였다. 하지만 살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짙은 생기와 따스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석상 내부에서 어떤 기운이 폭발하여 튀어나오려고 하는 듯하더니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눈 부분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리고…
한제는 10년 만에 눈을 떴다.
석상의 균열은 순식간에 전체로 퍼졌다.
한제의 눈은 꿈을 꾸고 있는 듯 멍했다. 꿈속에서 그는 기이한 경지인 도경에 진입한 상태였다.
“흥! 깨어났구나!”
냉랭한 목소리에 한제의 눈에는 초점이 돌아왔다. 뒤이어 저 멀리 서 있는 백의의 노파를 발견했다.
“당신은⋯⋯?”
한제는 상대의 체내에 한 줄기 원신이 맴돌면서 갖가지 신통력을 번득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데 그의 눈길 아래 그 신통력들이 우뚝 멈추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한제는 저 신통력들의 근본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터였다.
한제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는 노파의 심장에 봉인이 되어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봉인으로 적어도 1천 년은 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