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14
한편, 한제의 시선을 접한 노파는 표정이 급변해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방금 상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았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자신의 비밀까지도 낱낱이 드러난 상태였다. 상대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모든 기억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1천 년 전 당한 부상에 요종의 태상장로가 남겨준 봉인이 무너져 내릴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아물어가던 상처가 1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원상태로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난 9급 요종에서 혼혈을 전달해 너를 깨워달라는 이천매의 부탁을 받고 왔다. 그런데도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괴팍한 성격의 노파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낮게 호통을 쳤다.
“이천매?”
한제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노파는 그런 한제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이천매, 이 미련한 것아. 저자는 네가 했던 모든 일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아무렴 어떠랴! 난 약속을 지켰으니 더는 네게 빚이 없다!”
노파는 곧장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도우, 그리 급히 가지 말게!”
한제가 조용히 노파를 불러 세웠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에 마치 세상의 규칙이 바뀌기라도 한 듯 노파는 바르르 떨렸고 결국 떠날 수 없었다.
“어찌하여 내가 떠나지도 못하게 하는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탓에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겠네. 설명을 좀 해주겠나?”
한제의 부탁에 노파는 냉소하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알고 싶나? 좋아, 알려주지. 이천매를 알고 있겠지? 10년 전, 이천매는 요종 제자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례 없이 전쟁 도중에 전장을 떠났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라더군. 당연히 요종에서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달가워하지 않았지. 파천종에서도 만류했으나 듣지 않더군. 그녀가 도우를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알고나 있나?”
한제는 흠칫 놀랐다. 그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이천매는 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이 아닐세. 이천매는 스승의 명에 따라 다시 파천종으로 복귀했지. 한데 스승은 그녀를 감금했어. 그녀가 세 달 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 그 사이에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었거든! 그게 누구인지는 도우도 알고 있겠지?”
한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당연히 그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천매가 겪은 일에 대해서는 상상치도 못했다.
“이천매는 도우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와 다름없는 스승과의 연도 끊고 집도 문파도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네. 더욱이 도우를 되살리겠다고 지난 10년간 자신의 모든 피와, 정혈을 바쳤지. 그마저 바닥났을 때는 원신으로 대체했더군. 그 10년간 하루도 쉬지 못하고 그녀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느꼈을지 상상이라도 되는가?”
한제는 멍하니 노파의 질책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이야기는 이천매가 자신의 생기와 명혼으로도 부족하자 혼혈을 이용하고자 요종으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노파는 분노한 듯 외쳤다.
그제야 한제는 천역주 안에서 보았던, 끊임없이 번득이던 붉은 빛과 그 따스함이, 도경 안에서도 시종일관 자신의 영혼을 자양해주었던 핏빛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목에 걸린 옥을 보았다.
옥에서 발산되는 빛은 언제라도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어두웠다.
한제의 시선이 닿자 어째서인지 그 옥패에는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노파는 차게 웃으며 물었다. 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혼혈을 되찾기 위해 요종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모르겠지. 하긴, 사매로서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지켜본 나조차도 요종에서 그녀에게 무엇을 지시했는지 알아내기는 힘들었으니 당연히 모르겠지.”
“그녀는 어디 있지?”
침묵하던 한제가 물었다.
“어디에 있느냐고? 이천매가 어찌 요종의 혼혈을 되찾았겠는가! 그 아이는 10년 전 전장을 떠났어. 요종 입장에서는 탈영병이나 마찬가지지! 게다가 파천종에서 내쫓기기까지 했으니… 혼혈을 되찾기 위해 그 아이는 대가를 치러야 했어. 균열의 전장 가장 깊은 곳, 흉수가 넘쳐나는 그곳이 계외와 연결된 통로인지 직접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단 말일세.”
한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초연했던 그가 이처럼 감정에 격랑이 인 것은 드문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곳에 계외와 연결된 통로가 있다면 그 아이는 절대로 돌아올 수 없어. 게다가 생기가 거의 꺼지고 허약해진 상태니 통로가 없다 해도 흉수가 가득한 그곳에서 살아 돌아올 수는 없겠지. 요종은 그걸 알면서도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본을 보이기 위해 보낸 거라고!”
노파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마지막으로 내게 부탁했네. 자신의 혼혈을 도우에게 전해주라고. 그리고 도우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 하지만 난 도우가 모든 것을 똑똑히 알기를 바라네. 그 아이가 도우를 위해 어떤 희생을 감내했는지!”
노파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가시 같은 한 마디 한 마디가 한제의 가슴에 박혔다.
한제는 몸을 바르르 떨며 일어섰다. 돌조각들이 피부와 함께 떨어져 나간 탓에 한제는 혈인(血人)과도 같은 상태였다.
그 상태로 한제는 몸을 날려 동굴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체내에서 극강의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한제는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노파를 붙들어 매었다.
“앞장서! 요종의 전장으로 가겠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쇄열기 절정에 이른 노파조차도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위압감이었다.
“그 말은⋯⋯?”
노파는 한제가 내뿜는 엄청난 기운에 원신까지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이천매를 구하러 가겠다!”
이는 일종의 결심이자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다.
노파가 전해준 말은 수백만 개의 천둥처럼 하나하나 한제의 심신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었다.
피처럼 붉었으나 살기가 아닌 슬픔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낙인. 가슴 한구석을 찌르다가 온몸으로 퍼지더니 이내 영혼 속까지 침투한 고통.
“약속하셨어요. 이번에는 꼭 배웅해주겠다고…”
문득 이천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녀의 바람은 한 번도 과한 적이 없었다.
떠날 때 배웅해달라는 부탁, 한 마디 축복, 영원히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약속. 그뿐이었다.
그녀는 한제의 마음속에 있는 이모완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지도 않았고 이모완을 대신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전생의 꿈을 꾼 뒤 그때와 같이 멀리서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이런 희생이, 되돌릴 수 없는 지난 10년간의 보살핌이 한제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심지어 그녀는 이 모든 일을 한제에게 알리려 하지도 않았다. 만약 대신 혼혈을 전해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노파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희생으로 한제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런 동정심에서 시작된 애정 따위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천매가 원한 것은 죽을 때까지 한제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 넓디넓은 세상에 이천매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제가 기억해주는 것뿐이었다. 자신이 살든 죽든,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그 여인을 구해야 한다. 만약 전장의 균열이 계외와 연결되어 있다 해도 그래서 탁삼에게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폐관수련을 통해 도경에서의 깨달음을 다듬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하지만… 이천매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그녀에게는 너무 큰 빚을 졌다.’
한 걸음 내딛은 순간 우주가 진동했다. 한제는 타오르는 유성처럼 전방으로 튀어 나갔고 그의 손에 붙들린 노파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 빠른 속도에 노파는 반쯤 넋이 나갔다. 우주에는 균열이 생길 것만 같은 속도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제의 결의를 느꼈다. 천만 명과 맞서더라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3급 성역 아래로는 전송진이 없어. 4급 성역 해혼종(海魂宗)에 가야 6급 성역으로 이어지는 진이 있지. 거기서 가장 가까운 전송진은 무극종 분종인 선음문에 있는데 그 진을 통과하면 곧장 무극종으로 갈 수 있어. 그 후 무극종의 전송진을 이용하면 9급 성역에 닿을 거야. 요종의 위치는 그때 알려주마.”
한제는 침묵을 지켰다. 이 침묵은 강력한 압박감이 되어 노파의 심신을 덜덜 떨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한제에게 상황을 알려준 것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저 백발 청년을 신선에서 악마로 바꿔버린 것만 같았다.
10년 전의 명성
한제는 점점 속도를 높였다. 넓디넓은 2급 성역의 안개마저 뒤로 밀려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흉수들도 살신(殺神)처럼 돌진하는 한제를 감히 막아서지 못했다.
한제의 뒤로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균열이 2급 성역을 가로질렀다. 그럼에도 3급 성역을 지나 4급 성역 해혼종에 이를 때까지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점점 높였다.
해혼종은 8급 성역 적혼도의 분종이었다. 적혼도는 8급 성역의 최강 종파였으므로 4급 성역에서는 감히 해혼종을 건드리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해혼종의 종주는 규열기 절정의 강자이기도 했다.
밤이 깊은 시각, 해혼종 종주는 밀실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다. 한데 별안간 하늘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더니 뒤이어 대륙이 진동했다.
이에 해혼종의 모든 수련자들은 벌떡 일어났고 종주 역시 재빨리 밀실을 나섰다. 뒤로는 장로들이 따랐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륙의 보호진이 눈부시게 번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마치 거대한 손에 찢겨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 나타난 백발의 청년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송진을 열고 원정을 내놓아라. 너희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다.”
그 목소리에는 기겁할 만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해혼종 종주는 바르르 떨었다. 상대의 수준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 고인이신지는 모르겠… 크헉!”
포권을 하며 앞으로 나서던 종누는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피를 토했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는 한제가 공격을 해서가 아니라 해혼종 종주가 상대적으로 너무 약한 탓이었다. 눈을 맞춘 것만으로도 심신이 불안정해진 상태라 다른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었다.
“예!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질겁한 해혼종 종주는 공손하게 답하고는 장로들을 이끌고 전송진을 연 뒤 가진 모든 원정을 꺼내 얌전히 바쳤다. 조금이라도 꾸물대거나 망설였다가는 해혼종은 오늘부로 세상에서 사라지리라.
‘수련자가 아니라 마치 원고 시대의 흉수 같구나. 저 짙은 살기는 일개 수련자가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해혼종 장로들은 전력을 다했으나, 진이 활성화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종주가 직접 나선다 해도 1각은 걸릴 터였다.
허나 한제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손바닥을 아래로 해 꾹 눌렀다.
콰쾅!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온 우주의 원력이 순간 응집되었다가 전송진을 향해 몰려들었다. 이는 전송진을 크게 손상시키는 방식이었으나, 한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송진이 활성화되자마자 한제는 해혼종에서 준비한 원정을 거두고는 노파와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곧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순간 전송진은 쩌적 하고 갈라졌다.
“급하게 떠나느라 전송진을 망가뜨려 미안하군. 이번에 취한 원정은 후에 열 배로 갚겠다!”
무너진 전송진 안으로부터 울려 퍼진 한제의 목소리가 해혼종 사람들의 심신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