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21
이천매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더없이 창백한 얼굴과 피로 붉게 물든 옷이 대조를 이루었다.
지금 그녀는 법보와 단약이 거의 바닥 난데다가 원력도 모두 소모한 상태로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이 낯선 균열의 세상 속에서 그녀는 무력하고 외로웠다. 이곳에는 흉수가 너무도 많아 아무리 죽여도 끝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흉수들을 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녀석들은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지르며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지금껏 버틸 수 있게 해준 한 자락 의지뿐인가.’
그녀는 금빛 붓으로 하나하나의 문양을 그려 사방으로 퍼뜨렸다. 덕분에 흉수들의 공격에 가까스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문양의 힘도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1백 척 밖의 남색 빛이 무너져 내리면 더는 흉수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남색 빛은 끊임없이 경련하고 있었다. 언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흉수들과 채찍 같은 허상이 매섭게 달려들어 남색 빛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제 정말 끝인가? 그가 깨어났는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건만… 그럴 기회조차 없겠구나. 허나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이천매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회하지 않아⋯⋯.”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이천매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데 그 순간, 저 멀리서 믿을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천매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거대한 채찍의 허상이 매섭게 후려치며 남색 빛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흉수들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한제는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신통력의 파문이 느꼈다. 그에게는 익숙한 이천매의 기운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든 흉수들은 다시 질주하는 한제가 결인을 그려 휘두른 손에 피 안개로 터져나갔다. 1만 마리가 넘는 흡혈마수가 만들어낸 거대한 살육의 회오리가 지나친 곳에는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사방으로 튄 피에 모든 공간이 핏빛으로 물들 것만 같았다.
신통력의 파동이 발산된 곳에 가까워질수록 한제는 그 안의 미약한 기운을 통해 이천매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다급히 외친 한제는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려 체내의 원력을 손바닥에 응집시켰다.
원력은 눈부신 빛이 되어 쏘아져 나가더니 반경 1만 리를 뒤덮었다. 칠흑처럼 어두웠던 사방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순간 드러난 광경에 한제는 심신이 뒤흔들렸다.
“안 돼!”
우렁찬 고함을 내지른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떨렸다.
봉인을 열다
수만 척 앞, 까마득히 몰려드는 흉수들 틈으로 창백한 얼굴의 이천매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그녀를 보호하듯 감싼 남색 빛이 거대한 채찍의 허상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채찍의 허상과 흉수들이 곧장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한제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가 허상의 채찍을 가리키며 외쳤다.
“정(定)!”
그의 손이 내려옴과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가느다란 실이 옭아매면서 채찍의 속도가 느려졌다. 허나 거대한 채찍에는 기이한 힘이 어려 있어 규칙의 힘으로도 완전히 멈춰서지는 않았다.
한제는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발을 크게 내딛어 축지성촌을 발휘했다. 그러는 사이 정신술로 소환된 실들이 끊어져 나갔고 채찍은 점점 이천매를 향해 다가갔다.
이천매는 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생기가 거의 바닥난 상태라 채찍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미 내상으로 원신이 무너진 그녀가 아직 숨을 거두지 않은 것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굳고 단단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한제를 본 순간 미소를 지었다. 삶의 마지막 순간, 한제가 문제없이 깨어났음을 확인했고 그녀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하고 추웠다. 10년간 모든 것을 바쳐오면서 애써 참고 억눌러온 노곤함이 일순 그녀를 잠식하려는 듯 폭발했다.
손에 들고 있던 금색 붓은 빛으로 흩어졌고 채찍의 허상은 눈앞까지 다가왔다. 이천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멈춰!”
채찍이 그녀의 몸을 후려치려는 찰나, 커다란 외침과 함께 손바닥 하나가 나타나 채찍의 허상을 움켜쥐었다. 뒤이어 한제가 이천매의 앞에 나타나 막아섰다. 온몸에 푸른 핏줄이 잔뜩 돋아난 그의 두 눈은 붉은 빛으로 번득였다.
눈을 뜬 이천매는 자신을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고 죽음조차 막아줄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선 한제를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두 눈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한편, 한제는 채찍을 움켜쥔 순간 엄청난 힘을 느꼈다. 천만 마리의 말에 부딪히는 듯한 충격에 몸이 떨리고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천매를 뒤에 두고 비켜설 수는 없었다.
그는 평생 이모완만을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이천매에게는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이제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구해내야만 했다.
펑! 펑!
한제의 체내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채찍을 움켜쥔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이 회전하면서 고신의 힘이 생겨나 오른손에 모여들었다. 뒤편으로는 고신의 허상까지 나타났다.
“끊어져라!”
고신의 포효 같은 한제의 목소리가 터져나간 순간, 채찍이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한제를 휩쓸었다. 허나 한제는 물러나지 않았다.
“누구도 이 여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
한제가 피를 토해내면서도 단호하게 외쳤을 때, 이천매가 더욱 깊어진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말을 마친 순간, 그녀는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잠들 듯 두 눈을 감았다.
한제는 재빨리 결인을 그려 이천매의 몸 곳곳을 두드리며 자신의 원력을 그녀의 체내로 불어넣어 꺼져가는 생기를 봉인했다.
허나 이는 임시방편일 뿐, 생기의 붕괴와 사기(死氣)의 확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원신은 이미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혼백조차 흩어질 조짐을 보였다. 육신 은 모든 빛을 잃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안 돼! 당신은 이대로 죽어서는 안 돼!”
한제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아주 오래 전, 한 여인을 자신의 품에 안고 떠나보낸 기억이 되살아나며 다시 한 번 무력감에 몸을 떨었다. 당시 그로서는 그녀의 남은 육체와 잠든 혼백을 보관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1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그는 또다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한 여인이 빠르게 시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 제가 죽으면 도우의 인생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 이천매라는 여인도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만약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더라도⋯⋯ 부디 기억해주세요.”
슬픔으로 가득 찬 한제의 눈에서 이모완이, 피천관 안에 남아 여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연인이 떠올라 이천매의 모습과 겹쳤다. 세상은 무심하게도 그에게 또다시 그런 슬픔을 안기려 했다.
“절대 죽게 둘 수 없다!”
한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오른손을 맹렬히 들어 올렸고 다시 이천매를 향해 뻗었다.
“세월!”
거대한 돌문이 불쑥 나타났다. 돌문은 오래되고 황량한 기운을 발산했다. 이 기운은 세월의 흐름이 되어 이천매의 몸을 감쌌다.
그 순간, 이천매 생기가 흩어지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허나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이대로는 머지않아 생기가 흩어져 없어질 것이고 이 세상에서 이천매라는 여인의 존재가 사라지게 될 터였다.
한제는 체내의 원력이 끊임없이 소모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이천매를 품에 안은 채 돌아섰다. 살기 어린 눈빛이 사방을 훑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두 갈래 거대한 채찍이 한제를 향해 매섭게 뻗어왔다.
저 멀리서는 셀 수 없이 많은 흉수가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더 먼 곳에서는 수십만 척에 달하는 흉수들이 서늘한 눈빛으로 한제를 노려보았다.
끝없이 넓은 공간이 흉수로 가득 찬 셈이었다.
“천매, 너를 데리고 여기를 나갈 것이다!”
한제는 두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미간에서는 복잡한 봉인의 금제 하나가 번득였다. 이어서 왼손으로 미간을 움켜쥔 뒤 강하게 뜯어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한제의 체내에서 폭발했다. 그 기운은 회오리가 되어 갈수록 거대해졌다. 이에 사방에서 몰려들던 흉수들의 눈에 두려움이 드러났다.
도과를 흡수한 뒤 한제의 수준은 봉인되어 정열기 절정과 쇄열기 사이로 억눌려져 있었다. 지금, 그는 자신만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포기한 이천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억눌러오던 모든 봉인을 열어버린 것이다.
봉인은 거울처럼 수많은 조각으로 깨져버렸다.
그 순간, 흉수들은 포효조차 잊은 듯했고 심지어 왕수의 기운을 내뿜던 녀석들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한제에게 응집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제를 휘갈기려던 두 개의 거대한 채찍도 일순 멈췄다. 허나 이내 다시 달려들었다.
펑!
채찍이 막 후려치려던 순간, 엄청난 기운이 한제의 체내에서 폭발했다. 이 광기 어린 기운은 곧장 회오리가 되어 사방을 휩쓸었다.
채찍 중 하나가 회오리에 닿자마자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남은 하나는 회오리 깊숙한 곳에 잠긴 순간 어떤 손에 붙들렸다.
이 무렵, 한제의 전신에서는 위험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그의 백발이 사방으로 나부꼈다. 오른손으로는 이천매를 끌어안고 왼손으로는 채찍을 움켜쥔 그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무궁무진한 원력이 끊임없이 한제의 체내로 밀려들어 응집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제는 마침내 한 수련자로서 뛰어넘기에 매우 힘든 난관을 돌파했다. 정열기 절정을 넘어 드디어 진정한 쇄열기 수준에 접어든 것이다.
그 순간, 한제의 눈에 비친 세상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크아아아!”
한제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포효했다. 포효는 강력한 기운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파멸적인 힘을 형성했다.
“캬아악!”
가까운 곳에 있던 수백 마리의 흉수가 칠규에서 피를 흘리며 비명을 내질렀고 육신이 무너져 내리더니 피 안개로 흩어져 버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흩어진 피 안개조차 곧바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 광경에 멀리 떨어져 있던 왕수들의 눈빛조차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한제의 수준은 쇄열기 초기 수준까지 치솟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도과의 힘은 아직 흩어지지 않은 상태로 한제는 지난 10년간 도경 안에서 깨달음까지 얻은 상태였다.
체내의 기운이 다시 한 번 폭발하듯 치솟았다. 이 기운은 갈수록 강해졌고 한제는 순식간에 쇄열기 중기 수련자로 거듭났다.
본래대로라면 지금쯤 하늘에서 재난이 내리 떨어졌을 터였다. 그가 지난 세월 마주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재난이.
허나 이곳은 천벌이 미치지 못하는 균열 안의 세상이었다.
한제가 서늘하게 번득이는 눈으로 순간이동을 하자 원력으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폭발하면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