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22
콰콰콰쾅!
또다시 수백 마리의 흉수가 피할 틈도 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사라져갔다.
지금의 한제는 그야말로 살신(殺神)이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면서 왼손에 움켜쥔 채찍을 휘둘렀고 동시에 입을 벌려 한 줄기 붉은 빛을 뿜어냈다.
빛은 손바닥만 한 검이 되어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은 채 채찍을 타고 허공 끄트머리로 돌진했다.
쾅!
짧지만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균열계(龜裂界)에 격렬한 진동을 일으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였다.
그때, 채찍이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렸고 ‘윽’ 하는 신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허공에서는 핏빛이 번득였고 붉은 검이 돌아왔다. 검 끝에는 어두운 금색 피 한 방울이 묻어 있었다.
한제가 살기 어린 눈을 번득이며 왼손을 휘둘러 검은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호풍으로 형성된 여덟 마리 흑룡이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한제가 이동함에 따라 다시 한 번 수많은 흉수가 죽어나갔다. 특히 붉은 검이 파죽지세로 사방을 휩쓸면서 흉수들을 도륙했다. 검에 관통당한 흉수들은 바르르 몸을 떨면서 눈 깜짝할 새 비쩍 말라 뼈만 남았다.
피비린내에 더욱 흥분한 듯 날카로운 검명(劍鳴)까지 내던 붉은 검이 흉수와 흉수 사이를 빠르게 질주했다. 오랜만의 살육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처럼 들렸다.
검에서 발산되는 붉은 빛이 점점 짙어졌고 기운은 증폭됐으며, 날은 갈수록 예리해졌다.
그 무렵, 흡혈마수들도 짙은 피비린내에 자극을 받은 듯 흉수들에게 달려들었다.
수많은 흉수들은 흡혈마수와 붉은 검, 그리고 쇄열기 중기에 이른 수련자의 힘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한제의 옷은 이미 붉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 광기 어린 살육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잠시 후에는 흉수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왕수 이외에 무엇도 두려워한 적이 없던 흉수들이, 제아무리 강력한 수련자 앞에서도 거칠고 매서웠던 녀석들이 지금은 이 무지막지한 살육에 겁에 잔뜩 질려버렸다.
‘탁삼을 마주치게 되더라도 계외로 나가 남몽도존에게 가야 한다!’
남몽도존은 칠채계에서 이천매의 팔찌를 본 순간 한제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 여러 정황과 이천매가 고아라고 밝힌 점,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점으로 미루어 둘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남몽도존의 수준이라면 분명 이천매를 구할 수 있을 터!’
이것이 한제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자신의 육신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천매를 그에게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이천매에게 진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무렵, 1만 마리에 달했던 흡혈마수는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이곳의 흉수들보다 훨씬 거친 기운을 뿜어댔다. 자신들의 세상인 풍의 선계에서는 왕끼리의 교전만 있을 뿐이었기에 그곳에서는 좀처럼 진화할 기회가 없었다. 허나 이 잔혹하고 거친 균열 속, 녀석들은 요란한 살육을 자행하면서 자극을 받은 결과 전보다 한층 강해진 상태였다.
특히 흡혈마수의 왕은 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진동할 정도였다. 주둥이는 날카로웠고 두 눈은 무정했다.
피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붉은 검 역시 전보다 요사스럽게 번득였다. 검 안에 깃든 영혼이 흉수들의 피를 마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흉수들은 반경 수만 척 안으로는 다가오지 못하고 그 너머에 숨어 겁에 질린 눈으로 한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데 그때,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아홉 갈래의 채찍이 나타나 찢어발길 듯 한제에게 다가왔다.
뒤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는데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거대한 전갈의 허상이었다. 길이만 십만 척에 달하는 녀석에게서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전갈의 허상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있었다. 얼굴에 전갈 문신이 새겨진 여인은 어두운 눈빛으로 한제를 응시했다. 입가에는 피가 흐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난 원고 황제의 비 휘하의 자혈이다. 넌 누구냐!”
13급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13급 흉수!’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전갈의 허상 앞에 선 여인을 마주보았다. 그는 여인이 수련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변할 수 있게 된 흉수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천매의 남색 빛이 무너진 것은 바로 저 여인이 꼬리를 휘두른 탓이다. 만약 전갈이 없었다면 이천매가 이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을 터. 어쩌면 한제가 올 때까지 무사히 버틸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한제의 눈에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여인의 수준은 두 번째 천쇠를 겪은 수련자에 비할 만할 터였으나, 그는 머뭇거림 없이 달려들었다.
한제는 붉은 검을 매섭게 휘둘렀다.
흑의 여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이미 저 붉은 검에 부상을 입은 바 있었기에 그녀는 곧장 뒤로 물러나며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전갈이 몸을 바르르 떨면서 아홉 개의 꼬리를 동시에 움직였다.
꼬리들은 아홉 갈래의 채찍처럼 한제를 향해 뻗어왔다.
한제는 싸늘한 얼굴로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검은 붉은 빛이 되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홉 개의 채찍 같은 꼬리를 향해 날아갔다.
콰쾅!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붉은 검이 빛을 발산해 회오리를 형성했다. 붉은 회오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 갈래의 채찍을 무너뜨렸다.
“이잇!”
흑의의 여인이 분노한 듯 이를 가는 중에도 회오리는 한 번 더 붉은 빛을 번득여 네 개의 채찍을 더 끊어냈다. 남은 두 갈래의 채찍은 한제가 원력과 고신의 힘을 이용해 일으킨 광풍으로 막아냈다.
콰쾅!
마지막 두 개의 채찍도 붕괴했다.
한제는 봉인을 열고 도과를 소화해 쇄열기 중기에 이르렀고 무극종에서 고신의 기운을 흡수하면서 진정한 6성급 고신이 됐다. 일곱 번째 반점도 형태를 갖추어가는 중이다.
게다가 고신의 피를 제련하여 만든 검 덕분에 한제는 지금 수도자와 싸웠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진 상태였다.
심지어 체내에서는 다섯 갈래의 본원도 깨어나 있었다. 그중 발산할 수 있는 힘은 약했지만 끊임없이 강해지는 중이었다.
지금의 그는 계내에서든 계외에서든 한 구역의 패주(霸主)로 군림할 수 있는 강자였다.
“흉수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옷도 머리도 붉게 물든 한제가 붉은 유성처럼 돌진했다.
흑의 여인의 창백한 얼굴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저 붉은 검만 조심하면 될 거라 생각했으나, 이제 보니 저 수련자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자신을 죽이기에 충분한 자 같았다.
그녀는 곧장 뒤로 물러나며 결인을 그린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검은 채찍이 나타났다. 이전과 달리 허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채찍으로 그 위에는 날카로운 가시까지 달려 있었고 끝에는 낫 같은 칼날도 붙어 있었다. 채찍이라기보다는 전갈의 꼬리에 가까워 보였다.
흑의의 여인은 곧장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공간까지 부숴버릴 듯이 한제에게로 달려들었다.
한제는 무심하게 왼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검이 흥분한 듯 환호하며 한 줄기 빛이 되어 채찍을 잘라냈다. 동시에 한제는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세상의 원력이 그의 다섯 손가락에 응집되더니 노부자로부터 배운 신통력을 발휘했다.
사방의 원력이 왼손으로 몰려들면서 파멸적인 힘을 형성했다. 그 안에는 고신의 힘까지 담겨 있었다.
한제는 여인을 향해 신통력을 날려 보냈다.
콰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바닥이 눈부신 빛이 되어 반경 수십만 리를 태양처럼 비추며 날아갔다.
“앗!”
여인은 겁에 질려 비명을 토해내며 혀끝을 깨물어 피를 토했다. 피는 붉은 안개가 되어 그녀를 감쌌고 여인은 그 상태로 맹렬히 후퇴했다.
여인의 옷이 갈가리 찢겨져 나가면서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동시에 낫과 같은 칼날들이 그녀의 체내에서 튀어나왔다. 마치 그녀의 체내에 숨어 있던 거대한 전갈이 몸을 찢고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한제가 쏘아 보낸 손바닥이 피 안개와 충돌했고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붉은 검이 휩쓸고 지나가자 전갈의 꼬리가 뚝 부러지면서 터져 버렸다.
여인은 한제에게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난 원고 의월 제비(帝妃)의 사람이다. 감히 날 죽인다면 제비께서 너와 네 가족까지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여인은 다급히 외쳤으나 한제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뒤쫓았다.
“내 가족은 이미 모두 죽었다. 이 여인을 다치게 한 네 목숨을 거둬 법보로 제련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끼게 해주마!”
한제는 싸늘하게 외치더니 왼손을 허공에 후려쳤다.
쾅!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한제는 굳은 얼굴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피 안개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지만 그 안에 있던 여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검은 전갈만이 남아 있었다.
전갈은 수십 척에 불과했는데 순식간에 십만 척까지 커지더니 뒤편에 있던 허상의 전갈과 겹쳐졌다.
그 순간, 비린내를 품은 강력한 바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수련자의 육신과 원신이 합쳐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전갈의 머리 부분이 꿀렁이더니 방금 그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악에 받친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전갈은 허공을 무너뜨릴 듯 강력한 기운을 담아 아홉 개의 꼬리를 휘두르며 두 개의 거대한 집게발을 앞세워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한제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저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이 빠르게 회전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고신의 힘이 흘러나와 한제의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그는 순식간에 1만 척에 달하는 거인이 됐다.
거친 피부, 어마어마한 위압감, 서늘한 기운.
“고신!”
상대의 미간에 맴도는 반점을 본 흑의의 여인이 경악한 듯 외쳤다.
한제의 두 눈은 우주를 담은 듯 반짝였다. 그는 손에 조심스레 이천매를 든 채 거대한 몸을 훌쩍 날리며 반대쪽 주먹을 휘둘렀다.
꽝!
짧은 충돌음. 허나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거대한 전갈이 바르르 진동했고 온몸에 균열이 일었다.
“끄아아아!”
극심한 고통에 전갈의 머리에 나타난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한제는 다시 한 번 달려들어 전갈의 등을 밟은 채 주먹을 마구 날렸다.
쾅! 쾅! 쾅!
“크아아악!”
전갈은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두 집게발이 무너져 내리며 피가 흘렀다.
거대한 전갈은 재빨리 아홉 개의 꼬리를 휘둘렀지만 한제는 그중 두 개를 움켜쥔 채 훌쩍 뛰어올랐다. 전갈의 꼬리는 한제의 그 엄청난 힘과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채 그대로 뽑혀나갔다.
한제는 다시 내려서며 두 발로 전갈을 짓밟았고 손에 들려 있던 두 개의 꼬리를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흉수들을 향해 내던졌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찬다는 듯 전갈의 남은 꼬리를 움켜쥔 채 돌진했다.
흉수들은 두려움에 가득 차 급히 도망쳤지만 한제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한제는 전갈을 휘둘러 닥치는 대로 흉수들을 두들겼다. 전갈은 그때마다 비명을 질렀으나, 그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이 여인을 다치게 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한제는 싸늘하게 외치며 전갈을 내던졌다. 전갈의 꼬리 두 개가 뜯겨 나왔고 허공에 처박힌 거대한 몸뚱이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