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23
그 순간, 아까부터 갈망하는 듯한 눈으로 전갈을 바라보던 흡혈마수의 왕이 튀어나가 거대한 주둥이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전갈의 피를 쭉 빨아들였다.
남은 5천여 마리의 흡혈마수들도 달려들어 전갈을 빽빽하게 에워싸고는 전갈의 피를 흡수했다.
“끄아아아아!”
전갈은 거칠게 비명을 내질렀으나 흡혈마수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제가 보기에도 머리가 저릿해지는 광경이었다.
전갈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말라버렸고 흡혈마수의 왕은 광기 어린 기쁨에 바르르 떨었다. 순간 녀석을 비롯한 모든 흡혈마수의 수준이 폭증했다.
녀석들은 그렇게 드높아진 수준으로 사방의 흉수들을 쫓았다. 따라잡힌 흉수들은 꼼짝없이 흡혈마수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한제는 거대한 전갈의 시체로 다가가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꼬리가 전부 떨어져 나가 한데 합쳐졌고 한 줄기 원기를 분출했다. 원기는 푸른 화염이 되어 타올랐다.
한제의 눈에 줄기줄기 금제의 빛이 번득이더니 불붙은 전갈 꼬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 하나가 된 아홉 개의 전갈 꼬리를 저물공간으로 거두었다.
한제는 주먹으로 전갈의 머리를 터뜨린 뒤 그 안에서 주먹만 한 검은색 단을 찾아냈다. 단에서는 두려움에 질린 여인의 얼굴이 언뜻언뜻 나타났다.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13급 흉수는 두 개의 목숨을 가진 것과 같아 흉수의 육신이 무너져 내려도 그 원신은 체내에 응집되어 있었다.
한제는 검은 단 안으로 신식을 집어넣어 여인의 원신을 뒤졌다.
아주 오래 전, 7급 흉수에 불과했던 전갈이 한 여인의 눈에 들었다. 여인은 오른손으로 전갈을 두드려 낙인을 남기며 말했다.
“똑똑한 흉수구나. 자혈이라고 부르마. 내 흉수가 되어 상처가 치료되도록 돕거라.”
여인의 모습은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제는 전갈이 그 여인을 매우 경외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기억을 통해 한제는 이 균열계에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흉수가 총 19마리 있음을 알게 됐다.
더불어 이곳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흉수들조차 이 공간에 끝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깊은 곳일수록 더욱 강한 흉수가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깊은 곳에 발을 들일 때마다 엄청난 파란이 일어났다.
균열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인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곳에서 살았을 뿐이다.
또한 이 균열 깊은 곳에는 금지된 구역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이 전갈이 경외한 여인이 상처를 치료하던 곳이었다.
한제는 신식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 균열을 통해 이를 수 있는 곳은 요종의 추측과 달리 계외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식을 검은 단으로부터 거두던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풍의 선계 깊은 곳에서 본, 거대한 흡혈마수의 왕이 버둥거리며 빠져나왔던 균열이 떠올랐다. 그 너머의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했고 셀 수 없이 많은 흡혈마수들도 어렴풋이 보였다.
“이 두 장소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생각을 잠시 미뤄둔 채 몸을 돌려 균열의 출구로 돌진했다. 흉수들은 더 이상 한제를 막지 않았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요종으로 가서 계외로 통하는 진을 뚫고 남몽도존을 찾아야 해!’
그가 타고 온 구유 심연의 용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자취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제는 점차 초조해졌다. 그러나 봉계의 진을 본 적 있는 그로서는 자신이 정말로 그것을 뚫고 계외로 나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균열의 세상에서는 천벌이 강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는 순간 강림해올 거야. 어쩌면⋯⋯ 천벌의 힘으로 그 진을 열 수 있지 않을까?”
한제가 생각에 잠긴 채 이동해 출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그때,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흉수를 죽이고도 유유히 떠나려 하다니. 이 상황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덤덤한 목소리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울렸다. 한제는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까지 어떤 존재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는 돌아서서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느새 한 여인이 나타나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은 침착하게 한제를 바라보았다. 별이 담긴 듯 반짝이는 두 눈은 회오리처럼 시선을 잡아 끌어들였다.
천벌의 강림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한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두 눈은 바짝 졸아든 상태였다.
그는 왼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며 붉은 검을 소환했다.
여인은 그 검을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검을 알고 있다. 일찍이 선황을 다치게 했던 검이지. 넌 왕족 고신이로군. 그러니 그 검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
한제의 경계심이 치솟았다. 여인에게서 강력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저것은 본체가 아니라 분신임이 틀림없었다.
“긴장할 것 없다. 내 본체는 상처를 치료 중이니까. 내 분신의 힘도 천쇠를 겪은 수련자와 비등하긴 하네, 네게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 게다가 너와 척을 질 마음은 없다.”
여인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한제는 말없이 검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난 원고 선황의 비 중 하나인 의월이다. 그 여인은 곧 숨을 거둘 것 같으나 네 표정을 보니 살릴 방법을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너를 붙잡아둘 수는 없으나 그 여인이 숨을 거둘 때까지 시간을 끌 수는 있지.”
여인의 말에 한제는 굳건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이 여인이 죽는다면 숨어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너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어디 한번 해봐라!”
여인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어떨까? 그 여인을 살릴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을 테니, 대신 약속 하나만 해다오.”
“무슨 약속?”
한제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 여인을 살린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내가 상처를 치료하도록 도와라. 물론 대가는 지불할 것이다. 이 균열과 이어진 곳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곳에 고신의 제단이 하나 있다는 것은 안다. 네가 나를 돕는다면 너를 그곳으로 안내하마. 고신의 제단이 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또한 나는 너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다.”
여인의 말에 한제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고신의 제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구미를 당길 만한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왜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넌 왕족 고신이니까! 당시 선황을 다치게 했던 붉은 검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 네 체내에 다섯 갈래의 본원이 있으니까! 그 본원을 모두 크게 성공시킨다면 너는 심지어 선황과도 맞붙을 수 있게 될 거다. 그게 바로 내가 너와 연맹을 맺으려는 이유다. 대신 네게도 그만한 이득을 주지.”
여인은 한제의 표정을 살폈으나, 그 얼굴에서 어떠한 생각도 읽을 수가 없자 가볍게 웃더니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하얀 빛이 번쩍 하고 나타나 한제에게로 날아들었다.
“이 옥패가 있으면 이 균열의 어디로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 순식간에 출구에 이를 수도 있지. 기다리마.”
여인은 말을 마친 뒤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한제에게 이 옥패를 건네러 온 것처럼.
한제는 여인이 떠나간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목적이 뭐지? 고신의 제단은 또 뭘까?”
생각해볼 만한 문제였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한제는 신식으로 옥패를 훑어보았다. 안에 든 것은 전송진으로 구조는 매우 복잡했지만 금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제는 아무런 위험도 없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신식 한 갈래를 옥패의 진으로 흘려보냈다. 그러자 신식은 번쩍 하고 사라졌다가 균열의 출구 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문제도 없음을 재차 확인한 한제는 그 여인에 대한 의혹과 의심은 억누른 채 옥패의 전송진으로 들어섰다.
★ ★ ★
균열의 세상 속 어딘가에 떠 있는 육각형의 붉은 결정. 1백 척 정도의 크기에 얼음처럼 투명한 그 결정 안에는 한 여인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한제가 전송진으로 사라진 순간, 여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결정 너머의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운해성역, 요종 근처의 균열 앞. 수천 명의 수련자가 균열 주위에 가부좌를 튼 채 원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두 눈은 균열 너머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런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안개에 몸을 감싼 요종의 세 수련자도 가부좌를 틀고 멀찍이 앉아 균열을 훑어보고 있었다.
한제가 균열 안으로 들어간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 익숙한 균열은 그 한 달 동안 기이한 변화를 보였다.
균열 안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지내온 수련자들에게는 좀처럼 적응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평소 균열이 끊임없이 흉수들을 토해내는 바람에 녀석들의 포효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으니까.
한데 저 짙은 적막에 이어 피비린내라니. 짙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느껴지는 피비린내는 꼭 그 안에서 엄청난 살육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균열 안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할 정도의 살육이.
이런 적막과 피비린내는 밖으로 흘러나오며 형태 없는 압력이 됐다. 압력은 갈수록 짙어져서 균열 밖의 수련자들을 짓눌러 누구도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다.
한데 갑자기 균열 안쪽에서 한 줄기 초록색 빛이 번득였다. 순간 모든 수련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빛은 균열 밖으로 튀어나오더니 번쩍 하고 한 노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명의 수련자들 중 두각을 드러낸 여섯 고수 중의 한 명으로 그는 균열 안의 상황을 알아보겠다며 며칠 전에 떠났다. 모두가 궁금해 했던 바이기에 누구도 노인을 말리지 않았다.
한데 지금 노인의 표정은 충격과 짙은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어서 그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죽었어! 흉수의 시체투성이라고! 녀석들은 조각난 채 균열 깊은 곳으로부터 밀려나고 있어! 심지어는 왕수까지 죽었더군! 전부 일격에 숨을 거둬서 육신이 무너져 내린 상태야! 더 깊은 곳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으나 안쪽의 피비린내는 훨씬 짙었어.”
노인의 말에 수련자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직접 확인하고 온 사람이 증언하자 충격이 컸다.
“그가 한 게 분명해! 짐작할 수 없는 정도의 수준이었으니… 허나 이해가 안 가는군. 아무리 수준이 높다 해도 혼자서 어떻게…?”
“요종의 장로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하지 않았나. 강한 자야. 하지만 나 역시 그가 혼자 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어찌 혼자서 그렇게 많은 흉수들을 죽였겠는가!”
“어쩌면 새로운 황수(皇獸)가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지. 그런 흉수의 등장으로 자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으니까.”
수련자들이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충격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요종의 세 수련자 역시 신중한 표정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옥패를 들어 이 소식을 요종에 전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 균열 밖의 우주에서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칠흑처럼 어두운 우주는 반짝이는 별로 가득해 시야가 다 가려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곳곳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 순간, 우주가 돌연 어두워지더니 엄청난 위압감이 몰려들었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느껴진 그때, 쩌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위압감이 우주마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수천 명의 수련자 중 수준이 높지 않은 자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체내에서는 펑, 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의 뼈가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심신에 중상을 입고 피를 토하는 이들도 있었다.
“저건…?”
수많은 수련자가 놀란 얼굴로 위압감에 저항하며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