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36
집 밖에서는 피리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이끼 낀 바위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담은 음률이 집을 너머 산 아래까지 울려 퍼졌다.
한제가 그 피리 소리를 들은 것은 산의 중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얼굴에는 피로감이 역력했고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이제 저항력은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몇 개의 수련성이 한꺼번에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떼기조차 쉽지 않았다.
한제는 고신의 힘과 원력을 동시에 가동한 후에야 다시 힘을 내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마어마하게 땀을 흘렸는데 이 땀은 자세히 보면 핏빛이었다. 엄청난 압박감으로 인해 체내의 피가 급속도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한제는 산봉우리에 점점 가까워졌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사흘째에는 8부 능선을 올랐다. 이제 고개를 들면 산꼭대기를 볼 수 있을 정도였지만 이 무렵에는 끝없이 가해지는 압박에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한제의 머릿속에는 불현듯 그 옛날 대산파의 입문 시험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던 때가 떠올랐다.
묵직한 저항력은 온 세상을 다 으스러뜨릴 듯 사정없이 그를 짓눌렀다. 더구나 저항력은 점점 강해져 이제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자칫하면 쓰러져 저항력에 제압될 터였다.
한제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식은땀이 옷을 적셨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반드시 정상에 올라 이천매가 깨어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것만 확인하면 곧장 떠날 생각이지만 그전까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강력한 저항력에 몇 번이나 피를 토하고 온몸의 혈관이 다 터져 나가려 할 무렵, 9부 능선에 이르렀다.
한편, 그때 산꼭대기의 집 안에 있던 남몽도존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이천매의 칠규에서는 마지막 남은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어 그녀의 초췌한 얼굴이 빠르게 원래의 빛을 되찾더니 바르르 속눈썹을 떨다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천매를 보고는 흠칫 놀라더니 이내 남몽도존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가 곧 올라올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치를⋯⋯.”
“월아, 네가 가라. 가서 그자에게 네 이름을 알려주거라.”
남몽도존은 앞에 놓인 칠현금을 조용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천매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 하늘 끄트머리에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빛은 더욱 멍하게 변해갔다.
한편, 이때 한제는 끝없이 가해지는 저항력 아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어 산봉우리에 섰다.
정상의 저항력은 더욱 강해져 소리 없는 포효처럼 압박해왔다.
하지만 한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산봉우리에 선 순간 이천매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침 햇살 아래 그녀는 마치 선녀 같았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한제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닿은 순간, 한제가 미소를 지었다. 이천매가 깨어났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제 이름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저는 남월이라 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흠칫 놀란 한제는 이천매의 두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이한제요.”
말을 마친 그는 자신을 짓눌러오던 저항력에 맞서던 힘을 풀어버렸다. 그 순간, 엄청난 압박감이 그의 몸을 저 멀리로 떠밀었다. 동시에 이천매와의 거리도 멀어져 갔다.
“모든 것을 잊었구나. 차라리 다행이다. 다행이야.”
한제는 복잡한 심경을 안은 채 몸을 돌려 떠나갔다.
한편, 남월은 어째서인지 마음 한쪽이 아려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동시에 눈앞의 모든 것이 수면이 된 듯했다. 물속의 그녀가 바라보던 새는 점점 더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 저 사내를 보았을 때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았어요. 저자가 이전에 저와 무슨 연을 맺은 중요한 사람이었던 걸까요?”
남월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하늘과 바다 사이도 아니요, 음과 양의 사이도 아닌, 망각으로 격리된 것. 잘못된 시간 속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감정이 생겼으니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렇게 잊고도 두 사람의 연이 새롭게 시작된다면 그때는 막지 않으마. 그리 된다면 그가 원고 선역의 선택을 받은 자인 이상 이 아비는 너를 위해 선역과 싸울 것이다!’
남몽도존은 이천매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두 눈을 감고 칠현금을 쓰다듬었다.
‘가장 먼 거리는 망각으로 격리된 거리지. 몽아, 너는 언제쯤 나를 기억해낼 것이냐.’
슬픔은 매우 옅었으나 심신을 옭아맨 채 좀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가벼운 한숨을 내뱉은 한제는 이제 남산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 채였다. 마치 그 모든 것이 꿈이었고 이제 깨어난 것처럼.
이천매를 데리고 왔다가 혼자 떠나려니 외로움은 배가 되었다. 언제나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아왔으나 이번만큼은 뭔가 달랐다.
허나 그는 2천여 년간 수련을 해오며 세상만사를 겪었다. 외로움과 고독, 우울함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진즉 깨달았다.
“됐다. 됐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흐릿한 남산 꼭대기를 바라보던 한제는 이내 돌아서서 나아갔다. 그의 뒷모습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남사족의 넓디넓은 성역의 우주를 나아가며, 한제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슬픔에서 비롯된 피로였다.
그는 남사족 성역 가장자리에 이르러 속도를 늦추었다. 이제 곧 남사족 성역을 벗어날 참이었지만 그는 우뚝 멈춰 서더니 어딘가를 응시했다.
한제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낯설지 않은 어떤 느낌이 찾아왔다. 그리고 매번 이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생사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최근에는 수도자가 그를 찾아왔을 때 이런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탁삼이 나타날 때에도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지는 않았다.
묵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고요한 우주를 바라보던 한제는 이내 두 눈을 감고 신식을 펼쳤다. 허나 적막한 우주를 휩쓴 신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심장은 갈수록 격렬하게 뛰었다.
살며시 감긴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한 줄기 파란 화염이 피어올랐고 그 바깥으로는 번개도 나타났다. 뒤이어 삶과 죽음, 원인과 결과 진실과 거짓의 본원도 속속 튀어나왔다.
다섯 갈래의 본원이 퍼져 나와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한제는 그제야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안개가 걷힌 듯,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이는 나천성역에서 무의식중에 발휘했던 도염(道魘)의 눈과 비슷한 능력이었다.
백의의 여인
눈앞의 광경을 목격한 순간, 한제의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었고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으며, 체내의 원력은 맹렬하게 요동쳤다.
그곳에는 백의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유령이기라도 되는 것인지 아무런 생기나 기척도 없었다. 신식으로도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길고 검은 머리를 어깨 위로 드리운 그녀는 몸에서 발산되는 미미한 빛 때문에 또렷하지는 않았다. 마치 그녀를 둘러싼 기이한 힘이 모든 시야를 가로막는 것 같았다.
한제는 신중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 역시 묵묵히 선 채 마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죽음과 같은 침묵이 맴돌았다.
여인을 본 순간 한제는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강력한 위기감을 느꼈다.
‘저 여인은 사람이 아니다!’
어째서인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참 후, 한제는 뒤로 몸을 물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른손을 휘둘러 붉은 검을 소환했다.
여인은 한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제가 사라진 뒤에야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를 볼 수 있다니⋯⋯.”
한제는 여인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고 안색은 어두웠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탁삼의 미간에서 발산되던 눈부신 빛이 떠올랐다.
놀란 얼굴로 다급하게 도망치던 탁삼의 모습과 무슨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제는 우선 가까운 남사족 성역의 수련성으로 들어섰다. 그곳 역시 남색을 띠었고 절반은 바다였다.
그중 한 산봉우리 정상에 내려선 한제의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다섯 갈래의 본원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한참이나 주위를 살핀 한제는 더 이상 그 여인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가부좌를 틀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한제는 무거운 마음으로 호흡을 시작했다. 하지만 눈동자의 본원은 흩어지지 않은 채 경계 태세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7일이 지난 후에야 한제는 두 눈을 떴다. 어느새 그는 평온함을 되찾았으나, 그 여인의 모습만은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내가 남사족 성역을 벗어나기 전에 자신을 발견할 거라고는 그 여인도 예측하지 못했을 거야. 그곳은 남사족 성역 밖이었지. 그녀가 남사족 성역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은 남몽도존 때문일 수도…”
지난 7일간 좌선하는 동안 태고의 성신에 이른 때부터의 일들을 찬찬히 떠올려본 그는 탁삼을 만난 뒤부터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하기 시작할 조짐을 보였음을 깨달았다.
당시 그 요란한 심장 박동의 조짐은 탁삼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남몽도존을 만날 때까지도 그 느낌은 분명 존재했다. 다만 너무도 미약했던 데다가 그때 그는 이천매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에 조급했던 상태라 확실히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여인은 내내 나를 쫓아다니고 있었어. 내가 남사족 성역에 진입한 뒤에야 추적을 멈추었던 거야!”
한제의 표정은 한층 어두워졌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뒤를 밟힌 적은 적지 않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데 다섯 갈래의 본원 아래 그 여인의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이전보다 강력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그녀가 나를 쫓아다니는 내내 확실히 인지하지 못했건만 어째서 남사족 성역을 벗어나려는 순간 그토록 확실한 느낌을 받았단 말인가?”
생각을 정리하면서 원력을 가동해 체내를 맴돌게 하자 뒤이어 고신의 힘도 함께 온몸을 맴돌았다. 순간 한제의 눈에서 밝은 빛이 발산되었다.
“이전보다 원력이 늘었어. 고신의 힘은 비록 커지지는 않았지만 전보다 짙어졌지. 마치 응축된 것처럼. 원신과 영혼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모종의 변화를 겪으면서 더 예리해진 거야.”
이내 그의 시선은 남몽도존의 수련성에 있는 남산으로 향했다. 어렴풋이 답을 찾아낸 듯했으나, 표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지난 며칠간 산을 오르면서 끝없는 저항력을 견뎌낸 그는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수준을 드높일 정도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 전보다 몇 배는 더 예리해져 있었다.
“남몽도존⋯⋯. 만약 이 모든 것이 그가 의도한 바라면 그 여인은 남몽도존이 두려워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던 게 맞겠군. 그리고 남몽도존은 내가 남사족을 떠날 경우 닥칠 위험을 이렇게 간접적으로 알린 거야!”
한제는 몇 가지 단서로 상황을 완벽하게 꿰뚫었다.
“그 여인의 뒷배도 만만치 않을 테지. 그러니 남몽도존도 내게 직접 알려주지는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누구지? 내 생각이 맞다면 남몽도존은 내가 남사족 성역에 남기로 했음을 알고 있다는 건데…”
한제의 마음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결국 그는 곧장 떠나려던 계획을 접고 산봉우리에 가부좌를 튼 채 좌선을 이어갔다. 심신의 피로와 부상도 점차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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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간이 흘러 한제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한 달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