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41
“난비, 누란⋯⋯.”
여인은 한제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기이한 매력이 있는 목소리는 퍽 듣기 좋았다.
“원고 팔비!”
한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발 더 다가왔다.
“원래는 네 성신을 흡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네가 날 발견했고⋯⋯ 그래서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
백의의 여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흐릿했던 여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한데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한제의 두 눈동자는 바짝 졸아들었고 심신은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의 얼굴은 이모완과 똑같았다.
백의의 여인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숨을 내뱉었다가 가볍게 들이마셨다.
그 숨결에 한제의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이 급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금색 연기가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그때까지 덤덤했던 여인은 그 순간 흥분과 탐욕이 어린 표정으로 가느다란 연기를 흡수했다.
바로 그때, 한제의 눈빛이 또렷하면서도 차갑게 변했다.
“계(界)!”
서늘한 목소리로 외친 순간, 한제의 체내에서 어스름한 빛이 빠르게 번득이더니 한 줄기 검은 빛이 폭발하듯 튀어나와 그의 몸을 감쌌다.
호풍과 환우로 이루어진, 한제의 향불이 담긴 세계가 폭발한 것이다.
한제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여인은 호풍과 환우의 세상이 퍼져나가며 눈 깜짝할 사이 반경 1만 척 범위를 뒤덮자 그 기세에 밀려났다. 동시에 표정도 급변했다.
여인이 밀려나자 한제의 미간에서 흘러나오던 금색 연기가 수축해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인은 단 한 갈래도 흡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뒤이어 붉은 검이 나타나 한제의 주위를 빠르게 휩쓸었고 이에 한제를 움켜쥔 거대한 손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 모든 일은 여인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기 위한 한제의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한편, 호풍과 환우의 세계에 의해 1만 척이나 밀려난 백의의 여인은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손을 크게 휘둘렀다. 순간 그녀의 앞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여인 역시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한제는 침착하게 1만 척의 세상을 1백 척으로 수축해 보호막을 형성하는 동시에 한 손으로 우주를 가리키며 서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네 본체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허나 겨우 분신이라면 다르다!”
한제의 말을 들은 순간 백의의 여인은 표정이 급변했다. 자신이 분신임을 한제가 간파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남몽도존이 알려줬구나!”
여인이 한제에게 달려드며 날카롭게 외쳤다.
“번천인!”
한제는 우주를 가리켰던 오른손을 펼쳐 아래쪽으로 후려쳤다. 그의 두 눈동자에 비친 우주가 거꾸로 뒤집히기 시작했고 현실 세계에서도 똑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쾅!
짧은 굉음과 함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우주의 사방에서 무궁무진한 허상이 나타났다. 구름처럼 보이는 이 허상들은 순식간에 우주를 가득 채우면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어서 둘로 나뉜 허상 중 무거운 쪽은 아래로 가라앉아 대지가 되었고 가벼운 쪽은 위로 떠올라 하늘이 되었다.
본래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는 우주에 하늘과 땅이 등장한 것이다.
백의의 여인이 달려든 순간, 한제는 다시 오른손을 뒤집었다. 그러자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뒤집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이 뒤집혀 대지가 되었다.
백의의 여인도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뒤집혀 버렸다.
“지금껏 숨어서 날 쫓아온 것을 보면 분명 날 죽일 생각이겠지?”
한제가 아래로 향한 손을 꾹 누르자 콰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하늘이 된 대지가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허상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격렬하게 진동하면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을 발했다.
백의의 여인은 표정이 급변했다.
“남몽도존의 번천인! 그자가 네게 신통술도 전수해줬구나!”
여인은 돌진을 멈추더니 몸이 뒤집어지는 와중에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체내에서 하얀 빛이 발산되어 번천인의 힘에 대항했다.
하지만 번천인은 남몽도존의 강력한 신통술. 여인이 만들어낸 균열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하얀 빛도 순식간에 와해됐다.
표정이 급변한 여인은 곧장 입을 벌려 옥패를 토해냈다. 그 순간, 온 세상이 콰르릉 하고 진동했고 동시에 여인의 앞에 하얀 방어막이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 하강하던 대지는 이내 바닥을 이룬 하늘과 중첩되면서 형태 없는 압박감을 발산했다. 이에 전보다 더 격렬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우주에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대량의 균열이 일어났다.
잠시 후, 모든 안개와 구름이 흩어져 사라졌고 허상으로 나타났던 세상도 소멸됐다. 하지만 파괴력만큼은 여전히 사방에 맴돌았다.
균열로 가득한 우주 속, 옥패의 보호막 덕에 겨우 목숨을 구한 백의의 여인은 창백한 얼굴에 살기를 번득였다.
“겨우 세 번째 천쇠를 통과한 수준의 투영 분신으로 나를 해하려 했다니. 처음 네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네가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라 의심해왔다. 허나 그랬다면 네가 본체였다면 그렇게 가까이에 접근할 때까지 네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한제의 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여인에게로 날아들었다.
이는 그가 여인의 존재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해왔던 추측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상대와 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만약 상대가 정말로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라면 축지성촌을 발휘한다 해도 도망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얼마든지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투영 분신 주제에 내 성신을 흡수하려 하고 내 여인의 모습을 흉내 낸 것만으로도 네가 죽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한제는 짧게 외치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순간 그를 중심으로 반경 1백 척 범위로 축소되었던 호풍과 환우의 세계가 1만 척으로 늘어났다.
그 안의 수많은 대륙 위에서 전혼들이 휙 날아오르더니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백의의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는 자신이 상대를 얕잡아봤음을 깨달았다.
사실 한제를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한데 그 한 번의 마주침으로 정체가 발각되고 두 번째 만남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본체가 아닌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구나. 그러지만 않았다면⋯⋯.”
백의의 여인은 분통한 듯 내뱉었다.
그때, 확장된 호풍과 환우의 세상에서 수없이 많은 전혼이 튀어나와 달려드는 것을 본 그녀의 표정이 또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건⋯⋯?”
수많은 전혼이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폭발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동안 여인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더니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한 줄기 검은 빛이 나타나 그녀의 손에서 번득였다.
“멸령광(滅靈光)!”
여인은 싸늘한 눈으로 전혼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검은 빛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퍼져나가다가 전혼들과 닿은 순간 수천수만 갈래로 흩어지며 각각의 전혼들을 뒤덮었다.
추격
쾅! 쾅!
연달아 굉음이 울려 퍼지는 사이 검은 빛에 뒤덮인 전혼들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다치거나 사라진 전혼은 없었다. 검은 빛의 공격이 호풍과 환우의 세계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백의의 여인은 끊임없이 뒤로 물러나 눈 깜짝할 사이 수만 척 밖으로 벗어났다.
한제는 그녀에게 돌진했다.
옥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인은 오른손을 다시 들어 올려 방금 전보다 몇 배나 짙은 검은 빛을 응집해 검을 형성하더니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한제를 죽일 듯 노려보면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다가오는 것을 본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광영순!”
순간 세상 모든 빛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 별의 빛, 우주의 빛, 심지어 한 점 먼지의 빛과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분명 실재하는 빛까지.
순식간에 거대한 빛 덩어리가 나타나 여인이 휘두른 검과 충돌했다.
쾅!
짧은 충돌음이 울려 퍼지면서 몰려든 빛의 절반 정도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 반발력에 여인이 휘두른 검은 방향을 바꾸어 그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헛!”
여인은 헛숨을 삼키며 다급하게 물러났지만 검이 더 빨랐다.
꽝!
우렁찬 소리와 함께 옥패의 빛은 한층 미약해졌고 여인의 얼굴은 그만큼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한제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붉은 검을 소환하더니 매섭게 휘두른 것이다.
“죽어라!”
붉은 빛이 하늘을 뒤덮을 듯 강하고 요란하게 번득이면서 도망치는 여인을 뒤쫓았다. 백의의 여인은 기겁한 얼굴로 열심히 결인을 그려댔다.
하지만 붉은 빛은 순식간에 보호막을 가르더니 옥패와 충돌했다.
쾅!
온 우주가 진동했고 옥패 위로 한 줄기 균열이 일었다.
“큭!”
백의의 여인은 한 움큼 피를 토해냈고 차츰 흐릿해지다가 사라졌다.
한데 그 모습을 본 한제는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여인이 투영 분신에 불과해 실체가 없는 존재라 생각했는데 피를 토했다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허나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한제는 살기를 가득 담아 붉은 검을 쥔 채 여인을 뒤쫓았다. 다섯 갈래의 본원이 회전하는 눈으로 주위를 훑던 그는 이내 여인을 찾아내고는 검을 다시 휘둘렀다.
“본체여, 나를 살려다오!”
여인은 다급히 울부짖으며 물러나면서 주문을 외웠고 두 손을 휘둘렀다.
순간 옥패가 빛을 사방으로 쏘아댔고 그 안에서 옥처럼 곱고 흰 손이 나타나 한제를 가리켰다.
모든 것이 빛을 잃고 멈춘 듯했다. 마치 온 우주가 이 순간 그 손으로 대체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