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43
여인의 주위를 맴돌던 유백색 기운이 회오리를 이루어 한제의 주먹에 맞섰다.
콰쾅!
온 우주가 진동했다.
백의의 여인은 피를 토하며 창백해진 얼굴로 나가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유백색 기운이 그녀를 휘감아 보호막을 형성했고 여인은 곧장 세상으로 녹아들었다.
한제는 오른손이 저릿한 느낌에 기이한 눈으로 여인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는 그 역시 몸을 날려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떠난 곳에는 수많은 시체와 넋이 나간 마갈족 수련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 ★ ★
태고 성신 동쪽 어딘가의 허공에 왜곡이 일어나 유백색 기운으로 뒤덮인 백의의 여인이 튀어나오더니 곧장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마지막 한 번! 이 한 번이면 살 수 있어!’
허나 그녀가 발을 내딛은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우주가 진동했다. 동시에 사방에서 붉은 빛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검들이 날아들었다.
여인은 이를 악물고는 저 멀리서 자신을 뒤쫓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독기와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수많은 검들에 꿰뚫렸을 때, 그녀의 몸은 투명해진 상태라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구나. 하지만 다음에는 죽여 주마. 그때까지 신성을 잘 가지고 있어라.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완전히 투명해질 무렵, 여인은 서늘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허나 한제는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린 채 짧은 한 글자로 답을 대신했다.
“정!”
정신술이 발휘된 순간, 세상이 그대로 멎어버렸다. 거의 투명해진 상태였던 백의의 여인도 우뚝 멈췄다. 심지어 두 눈에 담긴 서늘함과 비웃음의 빛도 그대로였다.
한제는 곧장 손을 들어 여인을 가리키더니 꽉 움켜쥐었다. 그의 두 눈에서 다섯 갈래의 본원이 급속도로 회전하면서 한 줄기 기운이 오른손에 응집됐다. 이 기운을 통해 한제의 오른손은 끊임없는 파문을 일으키면서 투명해진 여인의 몸을 틀어쥘 수 있었다.
“말했을 텐데. 도망치지 못한다고…”
한제는 여인을 거머쥔 상태에서 정신술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다시 실체를 갖춘 듯 또렷해졌다.
“이… 이건 말도 안…”
여인의 두 눈에 불신의 빛과 두려움의 빛이 어렸다.
이 무렵, 한제는 일반인의 크기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상대의 정수리를 눌러 수혼술을 발휘하려 했다. 한데 그때, 여인의 체내에서 짙은 유백색 기운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 기운은 한제가 아니라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한제는 붉은 검을 소환해 그녀의 정수리를 찔러 유백색 기운보다 한 발 앞서 원신을 무너뜨렸다. 이를 통해 그녀를 윤회의 굴레에서 빼내고 원고 난비로부터 향불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크으으…”
백의의 여인이 몸을 바르르 떨며 죽음을 맞이한 순간, 한제 체내의 풍우계에는 그녀의 혼백이 생겨났다. 그 혼에서 발산된 짙은 향불의 힘이 한제에게 그대로 흡수되었다.
한데 그때, 핏물로 녹아내리던 여인의 시체에서 한 줄기 금색 선이 번득이며 튀어나오더니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이는 원고 팔비의 난비가 여인의 체내에 남겨놓은 것으로 여인이 죽자마자 치료 중인 난비의 곁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한제는 굳은 얼굴로 붉은 검은 휘둘렀다. 허나 기이하게도 금선(金線)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 또는 실체를 갖추지 않은 듯, 어떤 신통술과 법보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때, 한제의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뒤이어 저물공간이 저절로 열리더니 그 안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은시(銀屍)였다.
그녀는 어디론가 날아가는 금선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금선이 모습을 감추었을 때, 오른손으로 가볍게 허공을 움켜쥐었다.
콰쾅!
짧은 굉음이 울리더니 허공으로 사라졌던 금선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끌려오더니 은시의 손에 쥐어졌다. 그 순간, 금선은 더욱 격렬하게 경련했다.
은시는 묵묵히 금선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뒤에야 살짝 움켜쥐었다. 이에 금선은 그대로 무너져 내려 금색 안개가 되더니 그녀의 칠규로 스며들었다.
한제는 바짝 졸아든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 은색 옷을 입은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해봤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수도자가 저물공간에서 저 여인을 봤을 때 경악과 두려움을 느꼈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 여인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닐 터였다.
‘저런 여인이 어찌 수련자 연맹의 손에 제련됐을까? 수련자 연맹은 또 어떻게 저런 여인을 손에 넣은 거지’
그 와중에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멍한 눈으로 허공에 떠 있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있나?”
한제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은시는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방금 그 금색 선의 힘… 어딘가 낯익어서⋯⋯.”
한제는 번득이는 눈으로 상대를 자세히 뜯어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가 원고 팔비 중 하나인가?”
여인은 원고 팔비라는 말을 들은 순간 눈빛이 더욱 멍해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깨어난 뒤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그녀는 점차 씁쓸하게 변한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저물공간으로 향했다.
하지만 저물공간에 들어선 순간, 우뚝 멈춰 섰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멍한 눈빛에 한 줄기 맑은 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네 체내에 향불의 힘이 있군. 향불은⋯⋯ 일종의 독이자⋯⋯ 엄청난 속임수⋯⋯. 나도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예감이 드는군.”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이 사라지자 저물공간도 수축해 사라졌다.
허나 그녀의 마지막 말에 한제는 심신이 요동쳤다. 한제는 봉계의 주인으로부터, 수도자와의 교전으로부터, 남몽도존의 말로부터 향불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기 위한 관건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한데 여인의 말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한제는 어째서인지 소름이 끼쳤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독⋯⋯ 속임수⋯⋯.”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이내 세상에 녹아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날 쫓던 여인도 죽였고 풍우계의 전혼으로 삼았다. 이제 태고 성신에서 나를 쫓을 사람은 당분간 없지. 그렇다면 이제 본원을 성공시킬 때다!’
한제는 계속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계외 수련자들의 기억에 따르면 섬뇌족에는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가 없다. 대신 그들에게는 세상이 열린 순간부터 존재해온 번개가 있지. 한순간도 사라진 적 없는 번개. 이는 섬뇌족의 성물이자 그들의 힘의 근원이다. 그 번개를 삼키면 번개의 본원을 진화시킬 수 있을 터! 그나저나 향불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잠시 후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해 어느 낯선 성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쨌든 조심해야겠군. 지금껏 나는 내 스스로의 깨달음에만 의지했다. 본원 역시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얻어냈지. 그런데 이제 와서 향불에 의지할 필요가 있을까?”
한제는 다시 한번 세상에 녹아들어 섬뇌족이 머무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
태고 성신의 드넓은 우주 속에는 번개로 뒤덮인 부락이 있다. 이곳은 태고 성신의 여러 부족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섬뇌족이 있는 곳이었다.
섬뇌족의 성역은 멀리서 보면 거대한 번개의 연못 같았다. 그 안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는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울릴 때면 주위를 지나던 흉수와 수련자는 멀찍이 피했다.
만약 그 근처에 이르렀을 때, 섬뇌족의 영패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번개에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만 개의 번개가 동시에 내리치는 위력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정도였다.
섬뇌족이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 없이도 태고 성신에서 큰 세력을 이루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섬뇌족에게는 그 옛날 봉계의 진 안에 법기를 남겨둔 부족 중 하나라는 명예로운 과거가 있다.
또한 이들에게는 영원히 흩어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한 줄기 번개가 있다. 섬뇌족은 그 번개가 있는 곳에 사당을 지어놓고 제를 올리곤 했다.
사당이 있는 곳은 섬뇌족의 금지(禁地)였다. 이곳을 지키는 자들은 섬뇌족의 역대 장로들로 섬뇌족 사람이라 해도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고서는 발도 들이지 못했다.
또한 섬뇌족에는 비록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가 없다 해도 다섯 번째 천쇠에 이른 사람은 있었다. 이는 두 번째 단계 수련자들 중 가장 높은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였다.
섬뇌족 사람들은 세상의 번개가 여섯 종류로 나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모두를 수련하면 세상이 처음 열렸을 때부터 전해 내려온 번개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게 되면 번개의 본원을 얻고 이를 통해 세 번째 단계로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나 섬뇌족에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가 지금껏 단 한 명, 이들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에 딱 한 명 있었을 뿐이다.
한제는 그런 섬뇌족 성역 밖에 있었다. 1백 리 앞에는 섬뇌족 성역의 경계선이 보였다. 그 안에서는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많은 번개가 마치 춤추는 은빛 뱀처럼 번득였다.
당시 나천성역에서 보았던 번개의 연못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강하고 커 보였다. 대부분의 수련자는 이 모습만으로도 감히 저 안으로 들어설 엄두는 내지 못하리라.
심지어 섬뇌족 성역 너머의 우주도 천둥번개의 힘으로 가득 차 있어 수시로 폭발하듯 번득이며 불꽃을 튀기곤 했다.
한제는 한참이나 묵묵히 경계선을 바라보다가 훌쩍 몸을 달려 섬뇌족의 성역에 진입했다.
누구도 막아서지 않았다. 이곳의 거대한 번개 자체가 그 어떤 보호진보다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섬뇌족의 누구도 한제의 진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1각에 걸쳐 1백 리를 이동한 한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줄기줄기 천둥번개의 힘이 체내에서 발산돼 솜털 하나하나에 맴도는 것 같았다.
시야에는 무한한 번개의 연못뿐이었다. 그 안에는 세상이 열렸을 때부터 지금껏 소멸되지 않은 번개 한 줄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섬뇌족의 성역에 진입한 순간, 흘러넘칠 듯한 번개의 연못이 콰르릉 하고 진동했다. 뒤이어 눈앞의 모든 것이 번개로 대체되면서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번개의 연못에서 번개가 줄기줄기 은빛 용처럼 흐르며 다가와 한제의 주위를 맴돌았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이 무렵, 한제는 왼쪽 발과 몸의 절반을 이미 번개의 연못에 들여놓은 상태였다.
은빛 뱀과 같은 전광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의 왼쪽 다리를 타고 몸을 뒤덮었다. 어지간한 수련자라면 순식간에 온몸이 터지고 원신까지 소멸했을 것이다.
한제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천둥번개는 입을 쩍 벌려 그를 집어삼켰고 한제의 몸은 무궁무진한 번개에 완전히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