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50
“이 옥패에는 공법이 하나 적혀 있다. 내게는 별다른 필요가 없으나 네가 수련한다면 부족 낙인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받거라.”
마지막으로 양의에 이른 노인은 미소를 띤 채 한제를 자세히 살폈다.
“내가 줄 것은 법보나 단약, 공법이 아닌 조언이다. 서문으로 가게 되면 염뇌(念雷) 임무를 선택해라. 그게 가장 빨리, 더 많은 뇌정을 얻는 길이다. 내 옥패를 가지고 간다면 그 임무를 받는 데 방해가 없을 것이다.”
노인은 오른손을 휘둘러 전광이 번득이는 옥패 하나를 한제에게 건넸다.
“염뇌?”
한제가 삼키고 뒤진 섬뇌족 사람들의 기억에는 없는 단어였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의 역대 선조들은 천둥번개의 도를 연구하신 끝에 세상에는 총 여섯 종류의 천둥번개가 존재함을 알아내셨다. 만약 이 여섯 종류의 천둥번개를 모두 흡수해 제련한다면 가히 두려울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될 터. 여섯 종류의 천둥번개라 함은 하늘, 땅, 원신, 자성, 도 그리고 영의 천둥번개를 뜻하는 바. 염뇌의 임무를 맡으면 많은 뇌정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섯 종류의 천둥번개와 접촉할 수 있다.”
노인의 설명에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렸다.
동문을 나서자 수련자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우비라는 자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여섯 종류의 천둥번개라⋯⋯. 천둥번개에 대한 통제력에 있어 섬뇌족은 나에 미치지 못한다. 허나 연구 수준은 상당하지. 염뇌⋯⋯ 영의 천둥번개. 그건 대체 뭘까?’
생각을 정리하며 남문으로 가려던 한제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방향을 틀어 곧장 서문으로 향했다.
서문 근처에는 수련자가 매우 적었다. 이따금 그 안에서 나오는 수련자들의 표정에서 한제는 낙담과 실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임무를 받지 못했거나 만족스러운 임무가 아닌 모양이었다.
한제는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서문 안으로 진입하자 텅 빈 공간이 나왔는데 마치 허무의 공간처럼 넓었다. 사방에서는 수많은 천둥번개가 흘렀는데 어째서인지 소리는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모종의 신통술로 소리를 막아놓은 듯했다.
여섯 모퉁이에는 음양이의에 이른 노인이 하나씩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이곳의 담당자임이 분명한 그들은 냉랭한 표정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공에는 백 개가 넘는 옥패가 푸른 빛을 발산하며 떠 있었다. 개중에는 빛이 강한 것도 부드러운 것도 있었다.
한제와 여섯 노인 외에도 열 명이 넘는 수련자가 곳곳에 서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고 신식을 펼치며 상공의 옥패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중이었다. 그중 누구도 한제의 등장에 신경 쓰지 않았다.
섬뇌족의 비밀
흑마법왕과 주천자의 모습도 보였다. 주천자는 덤덤한 얼굴로 가장 강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옥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제는 조용히 신식을 펼쳐 옥패를 하나하나 훑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각 옥패에는 임무가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섬뇌족 성역을 떠나 어떤 수련자를 죽이는 것도 매우 독특한 재료를 채집해오는 임무도 있었다. 옥패의 빛이 밝을수록 임무는 어려웠고 대신 완수했을 때 더 많은 원정을 받는 방식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한제의 눈은 주천자와 마찬가지로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옥패로 향했다.
‘칠백만 천지로 가서 천도가 되어 천벌을 강림시켜라.’
한제도 흠칫 놀랐고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천벌을 강림시켜 칠백만 천지 속 화신기 절정에 이른, 그리하여 선계로 가려 하는 수련자를 징벌하고 영의 천둥번개를 수집하라.’
옥패의 내용을 꼼꼼히 살핀 한제는 심신이 진동했다. 좀처럼 믿을 수가 없었다.
영의 번개에서 ‘영’이 의미하는 것은 만물의 영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풀과 나무, 흉수, 수련자 등의 생령. 이 생령은 수련을 통해 신통술을 제련해낼 수 있었고 화신기 절정에 이르도록 수련하면 선계로 올라가 선인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주작성의 수련자였던 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우의 선계가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면 화신기 절정에 이르른 수련자는 곧장 선계로 진입할 수 있었을 테고 이후 영변기에 이르면 실질적인 선인이 되었을 터였다. 영변기 수련자의 수련에 선옥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섬뇌족 역사상 최강자이자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섬뇌족 선조가 있었다. 그는 섬뇌족의 세력을 강화한 장본인이자 부족의 보물을 봉계의 진에 녹여 넣은 사람이기도 했다.
섬뇌족 성역 어딘가에는 그런 선조가 창조한 공간이 있다. 신비의 수련자 몇몇의 도움으로 만든 그곳을 섬뇌족 사람들은 칠백만 천지라 불렀다.
이름에도 드러나 있듯이 그곳에는 7백만 개의 세상이 있고 셀 수 없이 많은 생령이 있다. 이들은 모두 수련자인데 선계의 존재를 믿는 자들이었다. 다만 그들이 믿는 선계란 다름 아닌 섬뇌족이었다.
섬뇌족 사람들에게 이곳의 모든 생령은 개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강력한 수련자가 나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화신기 절정에 이른 수련자가 나타나면 천둥번개를 내려 소멸시켰다.
허나 칠백만 천지의 몇몇 수련자는 놀라울 정도의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이유로 체내에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힘은 천벌이 강림할 때 변이를 일으켜 섬뇌족이 파악한 여섯 종류의 천둥번개 중 영의 천둥번개를 응집시키면서 재난을 일으켰다.
한데 이 재난을 무사히 넘긴 수련자는 선계에 진입할 수 있었고 이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그곳의 후손들에게 칭송받았다.
허나 진실은 달랐다. 재앙을 견뎌낸 수련자는 곧장 소멸되어 섬뇌족이 가진 영의 천둥번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앙을 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섬뇌족 사람들이다. 즉, 칠백만 천지에 강림하는 천도와 천벌은 섬뇌족 사람들이 뇌정전에서 받은 임무에 불과했다.
정신을 추스른 한제는 옥패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태고의 성신에 들어온 이래 이곳의 강대함을 여러 차례 실감해왔다. 남몽도존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허나 지금만큼 태고 성신의 강력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망월과의 전투 때 처음으로 태고 성신의 사람을 보았지. 그는 스스로를 천도라 칭했다. 태고 성신의 여러 부족 중 하나에 불과한 섬뇌족에게조차 이런 믿을 수 없는 비밀이 있다니!’
한제는 자신이 섬뇌족을 얕잡아봤음을 인정했다.
‘허나 그렇다 해도 나는 섬뇌족의 불멸의 번개를 삼키고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다!’
평생을 저항과 반항의 길을 걸어온 그였다. 그 누구도 그의 발걸음을 저지하지 못했다. 주작자도 그랬고 천운자도 그랬으며, 수련자 연맹도 그랬다. 나천성역도 심지어 세 번째 단계 수련자인 수도자도 마찬가지였다.
섬뇌족의 비밀과 태고 성신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갈수록 그의 의지는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타올랐다.
‘영의 번개라고? 그게 대체 무엇인지 직접 봐야겠다!’
한제는 결정을 내리자마자 오른손을 들어 옥패를 움켜쥐려 했다. 한데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주천자가 한 발 앞서 그 옥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옥패는 조금 더 가까이 있던 주천자의 손에 들어갔다.
한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그런데 옥패를 쥔 주천자가 싸늘한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며 외쳤다.
“꺼져라!”
냉랭함과 오만한 표정 위로 위압감이 어려 있었다. 규열기 수련자로서의 고고함이었다. 그의 눈에 한제는 손짓 한 번으로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뭉그러뜨릴 수 있는 미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자가 감히 자신과 같은 임무를 두고 다투려 하다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한제는 눈에 누구도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찰나의 순간 서늘한 빛이 번득였다. 그가 사람을 죽이기 전에 보이는 징조였다.
한제가 수련자로서 살아온 2천 년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영특한 두뇌와 운명에 대한 저항심으로 생사의 위협 속에서 버텨낸 그는 하늘과도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세 번째 단계 수련자이자 신종의 대장로인 수도자와의 싸움도 피하지 않았다. 태고 성신에 들어온 이후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탁삼의 추격에 이어 남몽도존과의 만남에서 이곳의 예측 불가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눌러 참는 데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마지막 선을 넘는다면 그의 성격상 참지 않을 터였다.
더구나 전성야로부터 얻은 전(戰)의 본원까지 심신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지 않았던가. 그런 상황에서 고작 규열기 수준에 불과한 주천자가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자 한제는 마지막 선이 무너짐을 느꼈다.
한제가 싸늘한 눈으로 주천자를 바라보며 차게 웃었다. 그리고 그 눈빛과 미소를 마주한 순간, 주천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길함과 위기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나 그의 눈에 한제는 문정기 수련자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감히 방자한 모습을 보이다니! 주천자는 살심이 생겨났다.
그때, 서문을 책임진 여섯 명의 섬뇌족 수련자가 일제히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제에게 물었다.
“네가 우비냐?”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한제는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동문에서 자신에게 옥패를 준 노인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한제는 말없이 오른손을 뒤집어 옥패 하나를 소환해 상대에게 건넸다.
상대는 굳은 눈빛으로 옥패를 살피더니 한제와 주천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주천자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제 오랜 벗이 이자에게 칠백만 천지에서의 임무를 맡겨달라고 부탁하는군요. 그 임무는 한 사람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니 함께 들어갈 수 있도록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주천자는 싸늘한 얼굴로 그 수련자를 훑어보았다. 서문의 책임자인 저자 역시 그에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나 상대는 섬뇌족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자였고 그 배후에는 섬뇌족 장로가 있었다. 주천자가 아무리 오만방자하다 해도 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누군가를 죽였다가는 장로님이 곤란해지시겠지. 허나 일단 백만 천지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햇병아리 하나 죽는다고 해도 알아차리는 사람조차 없을 터.’
사실 칠백만 천지에는 다양한 금제가 드리워져 있어 섬뇌족 선조의 신식조차 쉽게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섬뇌족 사이에서는 사적인 원한을 해결할 때 이곳을 이용하곤 했다. 섬뇌족은 서로를 죽이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으나, 그곳에서 일어나는 살인은 눈치채기도 힘든 것이다.
결심을 내린 주천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훌쩍 날려 사라졌다. 옥패를 통해 칠백만 천지로 들어간 것이다.
그가 사라진 뒤 옥패는 더욱 밝게 빛났다. 한제는 그제야 그 옥패를 움켜쥐고는 신식을 뻗었고 눈 깜짝할 사이 칠백만 천지 속으로 들어갔다.
한제가 사라지자 좀 전에 주천자에게 양해를 구한 수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자로군! 내 호연 도우의 부탁이라서 기껏 도와줬더니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도 없다니!”
“기분 풀게. 어차피 곧 죽을 자 아닌가. 사실 나는 저자를 말리고 싶었네. 주천자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거든.”
“한데 호연 도우가 저자를 상당히 칭찬하더군. 허나 나와는 관련 없는 일. 저자의 생사는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여섯 명의 수련자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는 다시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했다.
★ ★ ★
한편, 한제는 옥패를 통해 이동한 순간 눈앞이 이지러지는 것을 느꼈다.
허나 그의 원신은 워낙 강력했기에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길고 가느다란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통로는 눈부시게 빛났는데 신기하게도 그 통로 안에 있는 사람은 오장육부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해졌다. 또한 빛나는 통로 너머로는 강력한 기운이 요란하게 몰아쳤고 두꺼운 벽처럼 신식을 저지했다.
‘기이한 곳이군. 신식이 침투할 수 없게 막혀 있어. 그렇다는 건 여기서 사람을 죽인다 해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뜻이기도 하지.’
한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몸을 날렸다.
요란하게 몰아치던 기운이 거세지면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지만 그 무엇도 한제의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오히려 균열들이 한제와 충돌할 때마다 무너져 내렸다.
사실 한제 역시 주천자의 눈에서 번득이던 살기를 분명히 보았다.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허나 먼저 나를 건드리는 자 누구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통로 안으로 주천자가 보였다. 그는 매우 빠르게 이동했지만 혼란하고 거친 기운이 만들어낸 균열 때문에 서서히 느려졌다.
주천자는 전광이 번득이는 외투로 온몸을 덮은 상태라 그의 두 눈은 마치 구름 속의 번개처럼 냉랭하면서도 음침해 보였다.
통로는 길지 않아 잠시 후에는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호곤자와의 거래를 앞두고 있으니 대비를 해야 한다. 그자의 수준은 나보다 좀 더 높으니 정면 대결은 피해야 할 터. 허나 이미 몇몇 벗들과 약속을 해뒀으니 그들과 함께 찾아간다면 호곤자도 겁먹을 수밖에 없겠지.’
주천자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며 점차 속도를 높였다. 우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에게 우비는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기분을 망친 미물에 불과했다. 칠백만 천지의 광장에서 기다렸다가 나타나는 순간 죽여 없애면 이후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자였다.
한데 출구에 다다를 무렵, 주천자는 온몸에 솜털이 쭈뼛 섰다. 동시에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한 위기감이 치솟았다.
“날 죽일 생각이겠지?”
뒤에서 얼음처럼 서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우비의 목소리였으나 주천자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홱 고개를 돌려 떨리는 눈으로 상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