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69
한제는 술병을 바라보았다. 술이 반 정도 남아 있었다.
멀어져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평온해진 한제는 빙긋 웃었다. 사실 그는 잔혹한 수련계보다는 이런 삶을 더 좋아했다.
달빛은 점점 짙어졌고 찬바람도 불어왔다. 길가의 집집마다 처마에 매달아 놓은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사라락 하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서늘한 바람에 달빛까지 더해지자 더욱 차게 느껴졌다. 거리의 작은 모래알들이 바람에 날려 꼭 안개 같은 모래 먼지가 일었다.
깊은 밤, 집집마다 밝힌 등불이 어스름한 운치를 더했다.
한제는 술병을 들고 몸을 일으키더니 말없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순간 바람 소리가 뚝 끊겨 다른 세상에 격리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림은 단출했지만 깔끔했다. 흔들리는 등불로 온기가 더해지면서 방을 채우고 있던 서늘함과 어둠은 구석으로 밀려났다.
“마음이 평온해지는군.”
한제는 술병을 등잔 옆에 놓고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체내의 원신이 급속도로 돌면서 마치 강력한 폭풍 같은 원력을 줄기줄기 방출했다. 허나 몸 밖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등불 아래 한제의 그림자가 마구 흔들렸다.
이때, 한제의 심신에서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덟 마리의 태고 뇌룡이 분노의 포효와 함께 몸을 뒤틀면서 원신 밖으로 튀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한제의 원신은 단단한 철창과 같아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 태고 뇌룡의 혼백들을 완전히 제련하고 흡수하는 것은 한제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제에게는 천둥번개의 본원만이 아니라 화염의 본원도 있었다.
여덟 마리의 뇌룡이 몸부림을 치는 동안 한제는 원신으로부터 남색 불바다를 일으켜 놈들을 감싼 뒤 제련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남색 불바다 안에서 나타난 주작의 허상이 수시로 대량의 화염을 토해냈고 그때마다 화력이 한층 강화됐다.
태고의 뇌룡 반 마리로 이루어진 한제의 원신 역시 함께 제련되면서 아홉 번째 뇌룡이 되더니 다른 녀석들을 삼킬 기회를 엿보듯 주위를 맴돌았다.
여덟 마리의 뇌룡은 남색 불바다 안에서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 소리는 한제의 원신에 막혀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겉으로 보기에 한제의 집은 한없이 고요했다.
★ ★ ★
밤이 깊어 집집마다 등불이 하나둘 꺼져갔다. 이따금 작은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하고 야경을 도는 이들의 기척도 느껴졌지만 귀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서늘한 기운이 오고 있습니다. 불을 끄고 문을 닫으십시오.”
야경꾼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가 곧 사라졌다.
하지만 야경꾼이 떠난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술병이 휙 날아왔다.
한제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알싸한 술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면서 온몸이 후끈해졌다.
한제는 다시 눈을 감고 원력을 가동했다. 뱃속의 뜨거운 기운을 빌려 더 강한 화염의 힘을 낼 수 있었다.
강해진 화염의 힘이 원신으로 몰려들어 남색 불바다를 더욱 맹렬하게 만들었다. 하늘을 뒤덮을 듯 요란한 기세의 화염은 술의 불순물을 제거하여 정화만 남겼고 이렇게 남은 정화는 원신으로 들어와 가랑비처럼 불바다 위에 뿌려졌다.
순간 불바다는 폭발하듯 기세가 더욱 강렬해졌고 이에 여덟 마리 뇌룡 중 한 마리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녀석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아홉 번째 뇌룡, 즉 한제의 원신이 곧장 달려들어 녀석을 흡수했다.
무너져 내리던 뇌룡은 저항하지 못하고 완전히 제련되어 분리해낼 수 없는 한제의 일부가 됐다.
그 무렵, 한제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산삼 몇 뿌리를 한꺼번에 먹기라도 한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른쪽 눈두덩이 안에서 어렴풋이 나타난 번개 낙인이 빠른 속도로 증폭됐다.
탁자 위의 등불이 격렬하게 흔들리면서 한제의 그림자가 요동을 쳤다.
잠시 후, 등불은 틱 하고 꺼져버렸고 집은 다시 어둠으로 뒤덮여 버렸다. 오직 한제의 오른쪽 눈두덩이 안에서 나타난 번개 낙인만이 미약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제의 원신 안, 남은 일곱 마리의 뇌룡은 여전히 맹렬한 화염 아래 발버둥쳤다. 하지만 불바다는 더욱 뜨거워졌고 한 마리가 줄어듯 탓에 각각이 견뎌야 하는 열기와 불길은 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였다.
그때부터는 한결 수월해졌다.
어느덧 밤을 지나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짙은 먹구름 때문에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먹먹한 천둥소리에 이어 가는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제가 두 눈을 떴다.
“일곱 마리를 삼켰다. 이제 마지막 한 마리만 남았어!”
그의 두 눈에서는 빛이 번득였다.
★ ★ ★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고 비를 뿌렸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빗물은 지붕과 대지와 행인들의 머리 위로 내렸고 처마를 타고 발처럼 흘러내렸다.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나뭇잎들은 빗물에 사라락거리며 흔들리기도 했다.
오랫동안 가물었던 땅이 촉촉해졌고 잠시 후 곳곳에 진창이 생겨났다.
도롱이를 입은 행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서둘렀다. 폭우에 가까운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어쨌든 날이 밝았으니 일은 해야 했다.
아이들은 창가에 매달려 손을 뻗어 비를 만져보기도 했다. 녀석들의 까르르 웃음소리는 퍽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
사실 이 비가 내리는 것은 한제 때문이었다.
한제는 방문을 열자마자 습한 바람이 훅 와 닿았다. 무척 상쾌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과 새카만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한 줄기 번개가 하늘을 가르며 내리쳤고 뒤를 이어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먼 곳에 있는 것 같더니 눈 깜짝할 사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 감히 창가로 다가오지도 못했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비 내리는 익숙한 광경과 아이들의 모습에서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주 오래 전, 주작성에 있었을 당시 그 역시 창가에 매달린 채 손을 뻗어 빗방울을 움켜쥐며 앳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벌써 2천 년이 지났구나. 수련자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어렸던 자신만 기억하지. 난 이제 정확한 나이조차 알지 못한다.”
또 한 모금 술을 들이켜는 한제의 표정이 다소 슬퍼 보였다.
비 때문인지 날씨는 더욱 쌀쌀해져 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듯했다.
한제는 말없이 문을 닫으려다가 갑자기 표정이 급변하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빗물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한제의 시야를 가리지는 못했다. 그는 검은 구름 너머로 맑은 하늘과 두 갈래의 검기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검기에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남색 옷을 입은 준수한 사내는 규열기 수준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고 곁에는 봉황처럼 붉은 옷을 입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아래를 뒤덮은 먹구름에 흐르는 전광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월현, 부족에서 급히 소환 명령을 내린 것을 보니 큰일이 생긴 모양이야. 허나 네 수준은 충분치 않으니 앞으로 나서지는 마.”
여인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알았어.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일까? 장로님이 이렇게 긴급하게 소집 명령을 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잖아.”
신중한 얼굴로 뭔가 말을 하려던 사내는 돌연 고개를 휙 돌리며 어딘가를 내다보더니 한 손으로 여인의 앞을 막았다. 두 사람은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한 줄기 검은 바람이 저 위에서 휙 날아왔다. 본래 이 한 쌍의 남녀와 같은 방향으로 가던 중 두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고 방향을 튼 듯했다.
눈 깜짝할 사이 가까이 다가온 검은 바람 안에서 흑의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말없이 싸늘한 눈으로 월현이라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주 형을 뵙습니다!”
여인의 앞을 가로막았던 사내는 눈동자가 바짝 졸아든 채 포권을 했다.
“주 형을 뵙습니다.”
여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렸다.
흑의의 청년은 복잡한 얼굴로 여인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남색 옷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섬뇌족이 몰살당하고 대장로는 실종됐다는군. 장존이 직접 확인하시고 모든 부족에게 태고성신령을 내리셨네. 긴급 소집령도 장존회의 명이야. 또한 장존회는 대사 운락에게 천지성신술(天地星辰術)로 섬뇌족을 멸하고 대장로를 죽인 자의 초상과 신식을 찾게 했고 태고만령봉살(太古萬靈封殺)을 출동시켰어. 어쩌면 우리도 출동해야 할지 몰라. 이 수련성도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지. 몸조심하도록!”
“예?”
남색 옷의 사내와 월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섬뇌족은 그 수만 해도 수십만에 달하는 데다가 강력한 고수도 많았고 다섯 번째 천쇠에 이른 섬뇌족 대장로와 불멸의 번개까지 있다. 그런 그들이 몰살당하고 대장로가 실종됐다니, 믿기 힘들 만도 했다.
흑의의 청년은 몸을 돌려 떠나려다가 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세한 것은 나 역시 알 수 없으나 장존회의 말에 따르면 흉수는 불멸의 번개까지 삼켰다는군. 태고 성신의 모든 이들은 물론 장존회의 장로까지 나서서 그자를 찾고 있네.”
한편, 한제는 하늘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는 덤덤한 얼굴로 문을 닫은 뒤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이렇게 빨리 발각될 줄이야⋯⋯. 장존회라⋯⋯. 시간이 많지 않군. 최대한 빨리 남은 뇌룡을 제련하고 불멸의 번개와 융합해야 한다!”
한제는 다시 두 눈을 감고 원신의 화염으로 마지막 뇌룡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는 점점 거세졌고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심지어 정오가 됐는데도 햇빛은 한 점도 없었다.
그 무렵, 마지막 뇌룡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한제의 원신에 흡수됐다.
여덟 마리의 태고 뇌룡을 모두 흡수해 자신의 일부로 만든 순간, 한제의 원신은 불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안의 화염이 흩어져 사라지면서 무궁무진한 천둥번개로 대체됐다.
한제의 체내에 존재하는 다섯 갈래의 본원 중 모습을 드러낸 이 천둥번개의 본원은 부풀어 오르면서 끊임없이 거대해졌다. 그리고 한제의 원신은 뇌룡에서 한 줄기 번개의 형태로 천천히 바뀌어 갔다.
한제의 머리부터 발까지 뻗은 거대한 이 번개는 불멸의 번개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꺼지거나 스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번개가 응집되어 완전한 모습을 갖춘 찰나, 하늘을 뒤덮은 구름은 콰쾅 소리와 함께 더 많은 빗물을 쏟아부었다. 구름 안에서 흐르던 천둥번개 또한 발광하듯 더욱 요란하게 내리쳤다.
세 개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