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71
한제는 일전에 한 번 오색 극의 경계를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래 전, 주작성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가 보았던 오색 극의 경계는 만표의 오행성(五行星)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사내의 왼쪽 눈에서 오색 빛을 본 순간, 한제는 그것이 만표의 오색 극의 경계와 같은 것임을 직감했다.
한제는 만표와의 만남을 통해 극의 경계의 문을 연 바 있다. 또한 만표는 한제에게 극의 경계에는 종류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님을 알려주기도 했다.
만표는 당시 사도환을 죽이려 했던 이들 중 한 명으로 주작성에서 시체가 되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제가 만표의 저물대를 빼앗아 달아나자 조나라에서 복수를 마친 그를 추격해오기도 했다.
한제는 자신이 엄청한 비밀 하나를 파악하게 됐음을 깨달았다.
‘그자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금색 선은 곤극 채찍이야. 섬뇌족 대장로가 했던 이야기와 좀 전의 그 기억을 더하고 거기에 만표의 오색 극의 경계까지 더하면…? 그 신비의 수련자들은 떠난 게 아니라 계내로 간 것인지도 몰라!’
계내에서 어떤 변고가 있었기에 그가 가지고 있던 오색 극의 경계가 만표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의 법보인 곤극 채찍이 어째서 주작성에 떨어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에 대해 아는 자가 있다면 만표일 것이다.
여섯 갈래의 천둥번개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한참 뒤 그는 여러 의문을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때 번개가 되어 있는 한제의 원신은 이전보다 몇 배로 커진 채 그의 온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왕성한 천둥번개의 본원은 거대한 하나의 회오리처럼 그의 체내에서 맹렬히 회전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온몸의 근육과 뼈에 번개의 힘이 스몄다. 지금의 그는 더 이상 수련자가 아니라 한 줄기 번개였다.
운명에 굴복하지 않으려 하는, 반항과 거역의 번개!
그의 수준 역시 기이한 변화를 시작한 상태였다. 계내에서도 계외에서도 단 한 번도 없었던 변화였다. 이제 그는 천둥번개의 힘만으로도 쇄열기 중기를 뛰어넘어 쇄열기 후기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천둥번개의 힘을 사용하는 대신 화염의 힘과 자체적인 경지, 원력만 이용한다면 그의 수준은 여전히 쇄열기 중기에 머물게 된다.
이는 그의 체내에 다섯 갈래의 본원이 있기 때문이다.
한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 밖에 걸려 있던, 온전치 못한 도롱이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번개가 내리치면서 칠흑처럼 어두운 길거리를 순간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비 때문에 먼 곳까지 또렷하게 보기는 힘들었다.
불을 밝혀놓은 집도 없는 것을 보니 다들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그저 이따금 천둥소리에 놀라 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길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묵묵히 걷는 한제의 유일한 동행은 비바람뿐이었다.
서쪽 구역 끄트머리, 북쪽 구역과 이어진 곳은 비교적 인파가 많았다. 평소에는 날씨가 좋기만 하면 객잔이나 도박장은 밤새 북적대곤 했다.
하지만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리는 지금은 매우 조용했다. 대충 지은 듯한 객잔이나 주점 간판에 달린 미약한 등불만이 비바람에 흔들렸다.
한제는 어느 객잔 앞에 이르렀다. 약하게 불을 밝힌 그 안에서는 두세 명만이 앉아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점원으로 보이는 녀석은 풀린 눈으로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보아하니 금방이라도 꾸벅꾸벅 졸 것 같았다.
객잔으로 들어간 한제는 졸고 있는 일꾼 앞에 술병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한 병 주게.”
한제가 들어왔을 때 들이닥친 서늘한 바람에 화들짝 깬 일꾼은 눈을 비비며 한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들고 어딘가로 가더니 잠시 후 나타나 졸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반정 세 개요.”
한제는 돈을 내려놓고 새로 채워진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알싸한 향이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뜨거운 기운이 되어 뱃속을 채웠다. 사람을 죽일 때 마시기에 좋은, 강력한 맛이었다. 한제는 이 술이 퍽 마음에 들었다.
술병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간 한제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왕왕 내리치는 번개가 길을 밝히는 동안 한제는 서쪽 구역으로 돌아가는 대신 북쪽으로 향했다.
빗속에서도 한제는 이따금 술을 마셨다. 보폭은 넓지 않았지만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가 우뚝 멈추는 듯했다.
한편, 이 수련성의 북쪽 구역. 수도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 상공에는 아까 신통술로 한제가 있던 집을 탐색한 도포 차림의 노인이 어두운 얼굴로 걷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일곱 명의 수련자는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밤새 많은 곳을 뒤지고 다녔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섬뇌족을 멸한 그자는 이곳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장로님, 이 성역 모든 수련성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탐색을 하고도 여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것은… 그자가 이곳에 오지 않았⋯⋯.”
“그자가 이 수련성에 없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 성역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도포의 노인은 허공을 가르고 나아가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존회의 운락 대사가 이미 그자가 이 성역에 있음을 확인했다. 머지않아 구체적인 장소까지 밝혀질 거야. 우리가 운락 대사보다 앞서서 그자를 찾아낸다면 분명⋯⋯.”
그때, 돌연 번개가 내리치며 대지를 환하게 밝혔다. 확 밝아졌던 사방은 곧 다시 어둠에 뒤덮였지만 그 찰나의 순간 도롱이를 입은 누군가가 술병을 든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속도가 매우 빨라 누구도 그가 3척 거리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 존재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도포 노인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한데 미처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달려든 도롱이 차림의 사내는 오른손으로 술을 들이켜며 왼손으로는 노인의 미간을 툭 건드렸다.
콰르릉!
순간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동시에 노인의 원신 중 일부가 그대로 갈라져 나오며 뒤로 뻗어 나갔다. 그 순간, 한제는 앞으로 나서며 왼손으로 그 원신의 일부를 움켜쥐고 먼 곳으로 향했다.
노인의 뒤를 따르던 일곱 명의 수련자는 여태까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도포의 노인이 정신을 차리며 말을 이었다.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노인의 표정은 여전히 묵직했지만 안색은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걸었다.
도롱이 차림의 사내는 그들과 점점 멀어져갔다. 그의 왼손에는 한 갈래 찢겨저 나온 원신이 들려 있었다. 도포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원신은 구조 요청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내 집으로 돌아온 한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원신이 무너져 내렸고 모든 기억이 추출됐다.
무턱대고 도포 차림의 노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태고 성신 내에서 일어난 변화를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게 원신만을 순간적으로 잘라내 기억을 파악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역시 내 예상대로 태고 성신에서는 대대적인 탐색에 나섰군. 장존회의 운락 대사⋯⋯ 그자는 사람을 찾아내는 신통력을 가진 모양이군.”
태고 성신이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한제는 차갑게 웃더니 원신을 하나 소환해냈다. 섬뇌족 대장로의 원신이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원신에서는 짙은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영의 천둥번개를 제외한 다섯 개의 천둥번개는 이 장로의 원신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이자가 당시 소환해 사용한 여섯 갈래의 천둥번개는 비록 지금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소멸되지는 않았으니 다시 불러들일 수 있을 터! 허나 진정한 천둥번개는 총 아홉 종류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했지. 이것이 내 번개 문양을 완성해 천쇠를 뛰어넘게 하고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로 만들어줄 수 있을까?”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한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대장로의 원신으로부터 한 줄기 빛을 빨아들였다. 체내의 번개 원신은 곧장 그 빛을 부수어 흡수했다.
한데 섬뇌족 대장로를 삼키면서 한제의 원신이 꿈틀거리며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대장로의 모습이 되었다.
변신을 마친 한제의 원신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은 강렬한 전광으로 빛났다.
“나타나라, 하늘의 천둥번개, 땅의 천둥번개, 원신의 천둥번개, 자성의 천둥번개, 도의 천둥번개, 그리고 영의 천둥번개!”
한제가 의지를 발현한 순간, 원신에서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으나 육신에 가로막힌 채 밖으로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수련성 전체가 대낮처럼 밝혀졌을 터였다.
이 격렬한 빛 아래 한제의 원신에는 한 줄기 틈이 벌어졌다. 한제에게 해를 가하거나 고통을 입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틈 너머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어 마치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다.
한제의 의지에 따라 이 틈 너머의 어둠은 안개처럼 꿈틀거렸다.
잠시 후, 여섯 갈래의 천둥번개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틈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섬뇌족이 수만 년간 수집한 이 두꺼운 천둥번개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제의 원신을 에워싼 채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한제는 체내로부터 고양감을 느꼈다. 그가 고신의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망정이지 보통의 수련자였다면 육신이 터져버리고 말았을 터였다.
천둥번개가 온몸의 모공을 통해 흘러나오면서 한제의 옷은 마구 펄럭였고 집 내부에도 번개가 흘렀다. 이로 인해 하늘에 흐르던 천둥번개의 움직임은 한층 맹렬해졌고 천둥소리와 함께 비 또한 더욱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이 격렬한 변화에 한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판단 실수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을 훌쩍 날려 방에서 사라지더니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순간, 이 수련성의 남쪽 구역 끄트머리에 나타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맥이 있는 곳이었다.
10만 개의 거대한 산으로 이어진 이 산맥은 한눈에 그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안에는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들과 거친 짐승들로 가득했다.
한제는 다시 한번 몸을 훌쩍 날려 산맥 깊은 곳의 어느 산골짜기로 이동했다.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그가 오른손을 한 번 휘두르자 체외로 발산된 빛이 왜곡되면서 주위에 녹아들었다.
그 빛 아래 몸을 숨긴 한제는 가부좌를 튼 채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기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까지 여섯 갈래의 천둥번개를 몸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원신만으로 그것을 충분히 가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환하고 보니 원신으로 삼키기는커녕 전광을 몸 안에 가둬두는 것조차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수많은 수련자들의 눈길을 끌게 될 터였다.
한제가 방에서 떠난 순간, 도시의 황성 누각에 있던 몇몇 수련자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서쪽 구역에서 한 줄기의 놀랄 만한 천둥번개의 힘이 폭발했음을 어렴풋이 느낀 것이다. 허나 신식으로 훑고 살펴도 여전히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개중 똑똑한 이들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그가 섬뇌족을 멸한 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숨어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쇄열기 수준의 노인이 몸을 훌쩍 날리자 나머지 수련자들이 뒤를 따랐다.
일전에 한제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 원신의 일부가 갈라진 도포 노인도 막 떠날 준비를 하던 중 갑작스런 변화를 느끼고는 몸을 홱 돌렸다. 그는 곧장 방향을 틀고 신식을 펼쳐 다시 한번 면밀한 탐색에 나섰다.
한편, 수련성의 서쪽 구역에서는 신식으로 사방을 살피고도 아무것도 찾지 못한 백의의 수련자 무리가 자리를 뜨려 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우두머리인 중년 사내가 돌연 급변한 표정으로 방향을 홱 틀었다.
★ ★ ★
태고 성신 내의 안개로 뒤덮인 어느 성역. 태고 성신의 강대한 세력 중 하나인 표묘족(飄緲族) 거주지로 그 깊은 곳 남색 수련성에는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호수의 중앙에는 섬이 하나 서 있는데 그 위로 우아한 누각 여러 개가 세워져 있었다. 주위로는 향기로운 꽃과 풀들이 가득했다.
부드러운 바람 한 줄기에도 호수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꽃과 풀의 향기가 멀리까지 실려 갔다.
누각 중 하나에는 흑의의 여인이 홀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얼굴을 가린 탓에 외모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두 손은 옥처럼 고왔다. 그녀의 앞에는 호수의 물로 만든 공이 하나 뜬 채 돌면서 수증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공 안쪽의 빛은 왜곡되고 비틀리면서 백의의 사내 한 명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내에게서는 극도의 고독함이 느껴졌다.
물로 이루어진 공은 계속해서 일렁였고 이내 그 안에서 드러난 사내의 모습이 점차 또렷졌다. 그것은 한제의 모습이었다.
그때,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던 여인의 두 눈이 기이한 빛을 번득였다. 순간 그녀의 앞에 떠 있던 물로 이루어진 공이 터져나가면서 수막(水幕)이 됐다.
수막 위로 우주 어딘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우주에는 수련성이 오직 하나뿐이었다.
“장존회의 모든 장로께 알려라. 이 운락이 섬뇌족을 멸한 그자의 소재를 파악했다고!”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그녀가 있던 작은 섬의 상공에서 세 사람의 인영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이들은 여인에게 포권을 한 뒤 흩어져 사라졌다.
잠시 후, 태고 성신 내의 모든 수련자는 장존회의 명을 받아 한제가 숨어 있는 수련성 근처에 운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