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77
원신이 분리되고 남은 노인의 육신은 호를 그리며 쾅 하고 대지에 처박히더니 피를 토해냈다. 모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또 도망칠 테냐?”
한제는 노인의 원신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물었다.
‘손가락 끝에 담긴 기운만으로 내 원신을 분리하고 육신을 파괴하다니. 손가락 하나에 담긴 힘만 전부 다 사용했더라면 난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을 거야! 이, 이자는… 네 번째 천쇠 그 이상의 수준을 갖춘 자다!’
노인의 원신은 바들바들 떨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더는 저항할 꿈도 꾸지 못했다.
“앞으로 너희 암갈족은 나를 주인으로 모시며 내 명령에 복종해라. 그러지 않으면 부족 전체가 소멸할 것이다!”
한제는 손을 거두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노인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의 땅에서는 본디 강자가 우선입니다. 주인님 같은 강자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면 저희 암갈족의 행운이지요! 176명의 암갈족 부족원은 전력을 다해 주인님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주인님, 그냥 믿으시면 안 됩니다. 부족의 낙인을 걸고 태고 성신의 맹세를 하게 하세요! 그러면 맹세를 지키지 않을 시 낙인에 의해 공격을 받아 죽게 됩니다!”
종대홍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노인은 종대홍의 말에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악에 받친 눈빛이 종대홍에게로 향했으나, 이내 눈길을 거둔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부족 낙인을 걸고 태고 성신의 맹세를 하겠습니다. 주인님을 배반한다면 암갈족 부족원 모두는 죽게 될 겁니다!”
그 순간, 그의 부족 낙인에서 어스름한 빛이 발산되었다. 네 개의 꼬리를 가진 전갈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듯 잔뜩 위축되는 동안 또 하나의 낙인이 나타나 그 전갈의 몸에 새겨졌다.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사방에 봉인해두었던 암갈족 구성원들을 풀어주었다. 소주를 포함해 두 눈으로 직접 지금의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두려운 마음에 감히 한제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봉인에서 풀려난 이들은 곧장 부족의 낙인을 걸고 맹세했다. 타락의 땅, 암갈족은 처음으로 한제에게 굴복한 태고 성신의 부족이 되었다.
한제의 동굴은 암갈족의 성지가 되었다. 암갈족 부족원들은 한제의 동굴을 에워싼 채 법술을 발휘해 주위를 사막으로 변화시켜 자신들의 새로운 영역으로 삼았다.
장 노인은 한제의 강력함을 직접 목격한 뒤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종대홍에게 붙어 그와 좀 더 친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한편, 의기양양해진 종대홍은 화신기 수련자라는 자신의 수준을 이용해 암갈족 사람들을 마음껏 호령했다.
“타락의 땅에는 372개의 부족이 있습니다. 저희 암갈족은 수도 적고 폐허가 된 수련성 하나만 겨우 통제하는 말단에 불과하지요.”
암갈족 장로는 타락의 땅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태고 성신에 장존회가 있다면 타락의 땅에는 낙생회(洛生會)가 있습니다. 낙생회에는 총 열세 명의 장로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타락의 땅의 집권자들 이지요. 타락의 땅의 대제는 낙생회의 통치자로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라고 하더군요. 타락의 땅이 장존회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의 존재 때문이지요.”
노인의 설명은 계속됐다.
“한데 낙생회의 장로는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1백 년마다 한 번씩 그들에게 도전할 기회가 열리는데 도전에서 승리한 자는 새로운 장로가 되지요. 장존회에서는 몇 번이나 몰래 수련자들을 보내 장로 지위를 차지하려 했는데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답니다. 매번 목숨을 잃었지요. 하지만 장로가 되실 생각만 아니라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말을 잇던 암갈족 장로는 고개를 들어 잠시 한제의 눈치를 보았다. 허나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한 채 다시 입을 열었다.
“꼭두각시는 낙생회 장로의 통제를 받는 수련성에서만 팝니다. 저희가 팔던 꼭두각시도 그곳에서 사온 것들이지요. 물론 꼭두각시의 수준이 높을수록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보통의 수련자들은 구입할 수도 없지요. 오직 타락의 땅에 있는 부족만이 구입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한제는 여전히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소문으로는 꼭두각시를 만드는 방법이 대제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열세 명의 장로뿐이라 합니다. 암갈족이 가진 꼭두각시 중 수준이 가장 높은 녀석은 정열기 중기에 이르러 있습니다. 가격이 매우 높아 타락의 땅 밖으로 가져간다면 적지 않은 법보나 단약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을 겁니다.”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부족 낙인을 두드려 어스름한 빛을 번득였다. 순간 그의 곁에 중년 사내로 보이는 꼭두각시 하나가 소환되었다. 대충 보아서는 진짜 사람과 구분할 수가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생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온몸은 셀 수 없이 많은 봉인으로 덮여 있어 누구도 그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한제는 꼭두각시를 자세히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타락의 땅에는 쇄열기 수준의 꼭두각시도 있나?”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소리로 답했다.
“있습니다.”
한제의 심신이 바르르 떨렸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 그렇다면 천쇠에 이른 수준의 꼭두각시는?”
노인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천쇠에 이른 꼭두각시를 보았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요.”
한제의 두 눈이 번득였다. 천쇠에 이른 꼭두각시라니!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이곳 타락의 땅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 단계에 달하는 꼭두각시도 있지 않을까?’
한제의 이 질문까지는 하지 않았다. 자신조차도 믿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화작족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가?”
한제는 화제를 바꾸었다.
“화작족은 태고 성신에서도 세력이 상당한 곳이지요. 지난 몇 년간 적지 않은 화작족이 이곳에 왔고 지금은 수백 명에 달할 겁니다. 장로에 도전하는 이도 없이 조용히 지내고 있지요. 그들은 이곳의 각 부족과 연을 맺은 채 꼭두각시 거래에 참여하기도 하고 남몰래 염화이정을 모아 일정 기간마다 화작족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염화이정?”
한제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타락의 땅의 고유한 물건입니다. 대제가 가져오신 것이라고 하는데 꼭두각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 중 하나죠. 다만 그 수가 많지 않아 매우 희귀합니다. 저희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데 당연히 주인님 것입니다.”
노인은 오른손을 휘둘러 쌀알만 한 하얀 모래알을 꺼내 넘겼다.
한제는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순간 그의 두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지만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원상태로 되돌렸다.
“이제 내려가서 화작족에 관한 모든 소식을 수집해 내게 알리도록.”
한제가 손을 휘두르자 노인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곧장 물러났다.
그가 떠난 뒤 한제는 동굴의 출입구에 금제까지 건 뒤에야 손에 있는 염화이정을 더 자세히 살폈다. 두 눈에는 점차 기쁨과 놀라움의 기색이 드러났다.
“이게 염화이정이라는 것이었군! 당시 주작성황님이 사성종의 기원은 계외 태고 성신에 있다고 하셨지.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 한데 타락의 땅의 대제가 가져온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왜 이것을⋯⋯. 설마⋯⋯!”
반짝이는 한제의 두 눈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한제는 암갈족 족장으로부터 염화이정을 받아 든 순간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염화이정이 무척 낯이 익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이용해 몇 년간 부상을 회복하기도 했다. 주작성종 연소성역 깊은 곳, 주작성황이 좌선을 하던 거대한 하얀 바위와 똑같았다.
“설마 타락의 땅의 대제가 주작성종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한제는 주작성종에 별다른 애착은 없었으나, 주작성황에게는 큰 은혜를 입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의 은혜였다. 게다가 선대 성황의 지조와 수만 년간 이어져온 노력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다.
한제가 보기에 하나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대 성황과 봉계의 주인은 매우 비슷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사성종을 다른 한 사람은 계내를 지켰다는 차이만 있을 뿐.
염화이정을 바라보는 한제의 표정이 격앙됐다. 선대 성황이 유언처럼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이름은 노운. 아주 오래 전 연기사들의 시대에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4대 성황의 곁에서 약동(藥童)으로 살다가 성황으로부터 연기술을 배웠다. 1372살이 되던 해, 수련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성황을 보필하며 우리 주작성종의 가장 빛나는 때를 보았지.
2945살에는 주작성종의 장로가 되었고 4760살에는 대장로 중 하나가 되어 첫 번째 천쇠를 겪었다. 6215살, 주작의 표식을 얻어 처음으로 주작을 각성시켰고 다른 각성자와의 결투를 통해 후보 중 일인자에 등극했으며, 7912살에 4대 성황의 도움 아래 두 번째로 주작을 각성시킴으로써 차기 성황 후보로서 주작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11463살이 되었을 때 계외에서 들어온 부문족(符文族)이 세상을 어지럽히자 우리 주작성종은 선계와 함께 맞서기도 했지. 전쟁이 끝난 뒤 4대 성황은 나머지 세 성황들과 함께 계외로 나간 뒤 종적을 감췄다. 그전에 나를 5대 성황으로 임명했고⋯⋯.”
한제는 염화이정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선대 성황께서 그러셨지. 4대 성황과 나머지 세 성종의 성황이 함께 계외로 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그리고 타락의 땅의 대제는 주작성종에서 본 바위와 같은 재질의 돌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때 떠난 4대 성황이 이곳 타락의 땅에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시간상으로 맞지 않는데⋯⋯.”
한제는 격앙됐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생각을 이어갔다. 허나 한참을 생각해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이곳이 정말 4대 성황과 관련된 곳이라면 나의 주작을 네 번째로 각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의 화염은 허상으로 바뀔 테고 이는 분노의 화염이 되어 적들을 그대로 불태워버릴 수 있을 터! 그리 된다면 화염의 본원이 완성되지는 않더라도 위력만큼은 엄청날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주작을 세 차례나 각성시킨 지금이라면 염화이정을 이용해 온 세상을 파멸할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오른손을 휘둘러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염화이정을 저물공간으로 거두었다. 그리고는 저물공간에 든, 주작성황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석상을 한 번 훑어본 후 생각을 정리하더니 이내 곁에 있는 꼭두각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중년 사내로 보이는 꼭두각시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한제는 신식으로 완전히 감싸 신식을 꼭두각시 체내로 침투시켰다. 이어서 이 꼭두각시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끈질기게 구석구석을 살폈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표정은 점차 무거워졌다. 이 꼭두각시의 체내에는 피 한 방울 없이 그저 기이한 결정으로 차 있었다. 낟알처럼 생긴 결정들은 매우 부드러웠다.
뼈도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무궁무진한 원력이 발산되었다. 또한 체내는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빛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 빛은 한제의 신식이 닿자 앞을 가로막았다.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모든 신식을 발휘해 폭풍을 형성한 뒤 꼭두각시의 체내로 밀고 들어가 보호막을 뚫기 시작했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꼭두각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허나 그의 신식은 꼭두각시를 파괴할 듯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호막 안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즉각 신식을 거두지 않는다면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는 빛은 폭발할 터였다. 그 너머의 비밀은 남에게 발각되느니 차라리 소멸되기를 원하는 듯했다.
사묵자의 왕림
한제는 신식을 거둬들인 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흥미로운 꼭두각시로군.”
그는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어 꼭두각시를 끌어당기더니 그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상태에서 다시 한번 신식을 발산해 꼭두각시의 체내로 파고들었다.
신식이 꼭두각시의 체내 깊은 곳까지 파고든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꼭두각시의 체내에 경맥이 있다니!’
직접 손을 대고 신식을 펼쳤더니 좀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경맥은 꼭두각시 체내의 피와 살을 대체한 결정 사이사이에 숨듯이 파고들어 있었고 비쩍 마른 상태라 발견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건⋯⋯?’
한제는 두 눈을 번득이며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한번 자세히 관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건 꼭두각시가 아니라 수련자야!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수련자를 산 채로 제련해 응결시켜 꼭두각시처럼 만든 것이다!’
한제는 말없이 눈앞의 꼭두각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는 꼭두각시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이나 생기, 영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꼭두각시의 피와 살을 대체한 낟알도 왠지 익숙하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이 꼭두각시의 비밀은 분명 그 빛의 보호막 아래에 숨겨져 있을 터!’
한제는 신식을 동원하는 한편 오른쪽 눈으로 전광을 번득였다. 순간 그의 뒤로 번개 문양이 나타나면서 동굴 전체가 전광에 뒤덮였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퍼져나간 전광에 암갈족 수련자들은 창백하게 질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