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79
한제의 앞에 나타난 붉은 옷차림의 노인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태고 성신에서 손꼽히는 세력인 화작족이 타락의 땅에 우두머리 격으로 보낸 자.
한제는 누각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에 상대의 등장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타락의 땅에서 화작족을 만나게 됐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2층으로 올라온 화작족 노인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더니 번득이는 눈으로 한제를 아래위로 살폈다. 그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사실 마음속으로는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한제 뒤에 선 암갈족 족장과 그 수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암갈족 족장이 저 청년을 모시듯 뒤에 기립해 있다.
게다가 상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경계심을 높인 가장 큰 이유였다. 아무리 신식을 펼쳐보아도 상대의 수준을 짐작할 수도 어느 부족 출신인지 알아낼 수도 없었다.
물론 태고 성신의 모든 사람이 미간에 낙인을 새겨놓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몇몇 수준 높은 수련자들은 부족 낙인을 숨길 수도 있었다.
“염화이정을 넘기라고?”
한제는 피식 웃으며 화작족 노인을 마주보았다.
그 순간, 노인은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심지어 감히 상대의 시선을 마주할 수도 없었다.
노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우리 화작족에서 염화이정을 긴히 쓸 데가 있네. 본좌가⋯⋯.”
“그건 화작족 사정이고.”
한제는 차가운 목소리로 노인의 말을 끊었다.
그의 목소리가 나온 순간, 누각의 2층에서는 백만 개의 천둥이 내리친 듯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를 안내해준 아름다운 여인은 기겁하며 몇 걸음 물러났고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작족 노인 역시 몸을 바르르 떨었다. 맹렬한 소리에 수백만 대의 마차에 치인 듯한 충격을 받은 그는 원신이 진동했고 피까지 한 움큼 토해냈다.
온몸을 가득 채운 화염의 힘은 순간 통제를 잃고 체내에서 폭발해 그가 깔고 앉은 의자를 삽시간에 불태웠다.
화염이 의자를 태운 후 더 퍼져 나가려 하자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러 바람을 소환하더니 가볍게 쏘아 보냈다.
그러자 노인의 체내에서 튀어나온 화염은 순식간에 제압되어 꺼져버렸다.
일부는 다시 노인의 체내로 돌아가기도 했다.
화작족 노인은 창백한 얼굴로 몸이 밀려나는 것을 멈추기 위해 세 번이나 발을 굴렀다. 한 번 구를 때마다 바닥에는 깊은 발자국이 남았고 발자국은 새카맣게 타버리면서 하얀 연기를 피워 올렸다.
“크으으…”
노인은 이를 악물고 화염의 힘을 가동해 멈추려 했다.
한데 그때, 한제의 서늘한 눈빛이 노인의 두 눈에 닿았다. 그 순간…
콰쾅!
노인의 심신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한제의 눈빛은 보이지 않는 칼날이 되어 노인의 원신을 곧장 파고들었다. 그 파멸적인 힘에 노인의 원력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재차 뒤로 밀려난 노인의 두 눈이 짙은 두려움으로 물들었을 무렵, 한제의 칼날 같은 눈빛은 노인의 원신 주위를 맴돌다가 점차 흩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화작족 노인에게는 악몽과 다를 바가 없는 순간이었다.
“다시 말해보아라. 지금 본좌라 했느냐?”
한제는 시선을 거두며 싸늘하게 물었다.
짧은 침묵과 적막이 흐른 후, 화작족 노인이 허리를 숙였다.
“제, 제가 방자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노인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상대가 마음만 먹었더라면 벌써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음을 알았기에 더는 오만하게 굴 수 없었다. 이에 공손하게 자리에 일어선 그는 감히 다시 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염화이정을 가져오게.”
한제는 화작족의 노인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운 여인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더니 옥패를 꺼내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옥패가 푸른 빛을 발했고 이내 전방의 벽으로 녹아들었다.
빛이 녹아든 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투명하게 변했다.
벽 너머에서는 주먹만 한 하얀 돌 세 개가 둥실 떠서 회전하고 있었다.
“선배님, 용갑족에서 판매가 허락된 염화이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 세 개뿐입니다. 원래는 하 도우가 먼저 사기로 했는데 선배님도 원하시니 저로서는 곤란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어느덧 말투도 변해 있었다.
벽 안의 하얀 돌 세 개를 바라보던 화작족의 노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포권을 했다.
“선배님이 원하시는데 제가 어찌 탐할 수 있겠습니까?”
한제는 투명한 벽을 한 번 훑어보았다. 허나 벽 안에 떠 있는 것은 진짜 염화이정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신통술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한제는 손을 크게 휘둘러 세 개의 단약을 소환했다. 그러자 단약 안에 담긴 화염의 힘이 주위를 감쌌다.
한제는 단약이 아니라 세 개의 화염공 같은 그것을 여인에게 건넸다.
단약들을 받아 들고 자세히 살피던 여인이 이내 탄성을 내뱉듯 외쳤다.
“아! 이건 최고급 화수(火獸)의 혼으로 만들어진 혼단 아닙니까!”
“그 정도면 염화이정과 교환할 수 있겠나?”
한제의 물음에 여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합니다!”
그때, 화작족 노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조 도우, 나도 그 단약을 좀 볼 수 있겠나?”
노인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사실 그는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전 한제가 꺼낸 단약을 본 순간 그 안에서 심신을 진동하게 만드는 기운을 느낀 것이다.
조 도우라 불린 여인은 화작족 노인을 힐끔 보더니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세 개의 단약 중 하나를 화작족 노인에게 건넸다.
받아 든 단약 안에 신식을 녹여낸 순간, 노인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한참 뒤에야 감았던 눈을 뜨고는 단약을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노인의 심신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본원! 화염의 본원이다! 저 단약 안에 화염의 본원이 들어 있어! 다른 사람들은 저 단약 하나로 큰 효과를 보지 못하겠지만 우리 화작족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어! 한데 저 본원을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이란 말인가!’
한제는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며 화작족 노인을 슥 훑어보더니 옅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염화이정을 가져오게.”
여인은 얼른 세 개의 단약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누각 안은 고요했다. 화작족 노인 역시 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두 눈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번득였다.
한제는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여인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한 중년 남자가 있었다. 도포를 입은 그의 머리카락은 남색이었고 얼굴에서는 위엄이 흘렀다.
그의 뒤를 따라 올라온 여인의 표정에는 공손한 빛이 짙게 어려 있었다.
중년 남자를 보자 한제 뒤에 서 있던 암갈족 족장은 흠칫 놀라더니 허리를 숙여 한제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용갑족의 소족장입니다. 이상하네요. 그의 신분으로는 좀처럼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는데…”
사내는 크게 웃더니 곧장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하하하! 선배님의 단약, 용갑족이 잘 받겠습니다. 여기 세 개의 염화이정입니다.”
그는 말을 마친 뒤 오른손을 휘둘러 소환한 세 개의 하얀 돌조각을 한제에게로 살짝 밀어주었다.
한제가 염화이정을 받아 챙기자 사내는 눈을 번득이며 웃었다.
“그런데 방금 선배님께서 내놓으신 단약은 얼마나 더 갖고 계십니까? 혹시 더 원하시는 물건은 없습니까?”
“단약이야 많지만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한제가 미소를 지으며 즉답을 피하자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꼭두각시와 염화이정은 장로가 통제하는 주성이라면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저희 용갑족은 세 개의 보물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용갑족 외에는 그 어디에서도 갖지 못하는 보물이지요.”
한제는 말해보라는 듯 사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첫 번째 보물은 용갑린(龍甲鱗)입니다. 용의 비늘 3982개를 엮어야 한 벌을 만들 수 있지요. 거기에 용갑족 사람의 피까지 더해져, 신통력과 함께 사용하면 보통의 법보에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통력 또한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지요.”
한제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사내는 곧장 말을 이었다.
“두 번째 보물은 백골룡(白骨龍)입니다. 죽은 용갑족 사랍들의 뼈로 만든 영으로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하나하나가 엄청난 힘을 자랑하지요. 게다가 이미 죽어 있는 것이라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세 번째 보물은?”
한제가 웃으며 물었다.
나와 싸우겠는가!
용갑족의 소족장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용갑족이 자랑하는 최강의 보물이기도 한 세 번째 보물은 용붕단(龍崩丹)입니다. 섭취하는 게 아니라 폭발시켜 적을 공격하는 단약이지요. 하나의 용붕단을 터뜨렸을 때 발휘되는 위력은 크지 않지만 백 개, 천 개, 만 개를 사용할 경우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용갑린을 제외한 두 개의 보물은 우리 부족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제께서 하사하신 것으로 오직 우리 용갑족에서만 가지고 있지요!”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용갑린과 백골룡은 필요 없네. 하지만 용붕단은 좀 흥미가 가는군. 하나만 보여줄 수 있겠나?”
용갑족 소족장은 곧장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빛이 나타나더니 곧 하얀 단약이 소환됐다.
한제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자세히 살폈다.
용붕단에는 네 종류의 기운이 혼란스레 뒤섞인 가운데 일종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만약 이 평형이 깨진다면 곧장 폭발하면서 규열기 수준 수련자의 일격에 해당하는 폭발이 일어날 터였다.
“혼단 하나에 용붕단 백 개로 셈하도록 하지!”
한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