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90
그 혼단에 들어 있던 뜨거운 열과 본원의 기운 한 줄기를 품은 피는 한제를 제외한 어느 누구의 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혈맥의 연계를 통해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피 안의 한 줄기 본원이 화작족에 이르면 분명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터. 때가 되면 그들이 가진 화염의 본원을 차지할 수 있을 거야. 슬슬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겠군.’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균열이 하나 생겨났는데 그 안에서는 찢어질 듯한 비명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끔찍한지 듣는 사람의 심신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허 영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제발 놓아주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아악!”
또 한 번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사이에는 허이국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네가 이 허이국의 손에 떨어진 건 행운이다. 적막 속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내가 어찌 너를 죽이겠느냐. 걱정마라, 유금표. 너무 아프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비참한 비명이 기복을 이루며 터져 나왔다.
한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 그러자 저물공간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잠시 후 기쁨에 찬 목소리와 함께 허이국이 튀어나왔다.
“주인님! 제게 또 뭔가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제대로 해내겠습니다!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절대 없을 겁니다!”
허이국은 유금표를 한쪽으로 던져놓고는 뒤 손을 비비며 말했다.
한제는 옆에 나동그라진 유금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금표는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바르르 떨었다.
저물공간으로 거둬진 뒤 줄곧 허이국에게 시달려온 그에게 지난 시간은 악몽이었으나 그보다는 한제의 존재가 훨씬 두려웠다.
“유금표, 네 잘못을 알고 있느냐?”
한제의 싸늘한 물음에 유금표는 더욱 격렬하게 몸을 떨더니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꿇었다. 그의 두 뺨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새 삶을 살 기회를 한 번만 주신다면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가부좌를 튼 한제는 고민하는 것처럼 오른손 검지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기이한 눈으로 유금표를 바라보았다.
“그 옥패가 없이도 너는 기만술을 쓸 수 있느냐?”
유금표는 얼른 눈물을 훔쳐내더니 통탄에 잠긴 표정으로 얼른 대답했다.
“저처럼 약하고 보잘것없는 녀석이 옥패마저 없으면 어찌 기만술을 쓸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저는 누구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놓아주신다면 앞으로는 어느 누구도 속이지 않겠습니다.”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만술을 쓸 수 없다면 넌 쓰레기와 다를 바가 없다.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겠지.”
싸늘한 목소리에 유금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와들와들 떨면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말이 헛나온 것뿐입니다! 저는 옥패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기만술을 펼칠 수 있습니다! 운해성역에서 기만술로는 저를 따를 자가 없을 겁니다. 저는 옥패 없이도 펼칠 수 있는 기만술을 고안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연습해온 탓에 지금은 기만술의 제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6대 주작
“그래? 그렇다면 말해봐라. 기만술에 대한 네 의견은 어떻지?”
한제는 여전히 오른손 검지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며 덤덤하게 물었다. 반면 유금표는 잔뜩 긴장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기만술이란 다른 사람을 속이는 방법입니다. 모종의 수단, 특히 타인의 얕은 신용, 오해, 편견을 이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지요. 필요하다면 위장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도 믿어야 합니다!”
신중하게 말을 이어나던 유금표는 고개를 살짝 흔드는 한제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제가 연구한 기만술은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남을 속이고 두 번째, 자기 자신을 속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순수함과 순박함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세 번째 단계는 산을 산처럼 보고 다시 산을 산이 아닌 것처럼 보는 것으로 첫 번째 단계와 비슷하지요. 허나 이는 간단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첫 번째 단계, 즉 오직 남을 속이기 위해 자신조차 믿지 않는 거짓말을 하는, 아주 조악한 수준과 기술에 머물러 있습니다.”
유금표는 안정을 찾았는지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여전히 신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일정한 정도에 이르러 기만술을 충분히 깨달은 후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야만 스스로를 속일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방법과 그간의 경험을 이용해 언제라도 스스로를 속이면서 자신조차 자신의 거짓말을 믿게 되지요. 여기에 이르면 기만술은 절반 정도 완성된 셈입니다.”
유금표는 점차 스스로의 이야기에 빠져든 듯 표정까지 엄숙해졌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른 자가 없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게 됐지요 허나 그 대부분은 두 번째 단계조차 깊이 깨우치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자신을 속이다가 완전히 길을 잃고 헤어나지 못할 위험이 있으니까요. 자칫하면 정신을 잃고 미칠 수가 있습니다.”
한제는 말없이 유금표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표정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단계의 깊은 곳에 지나치게 빠져든 사람 중에는 자신이 사기꾼이라는 것조차 잊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볼 때마다 저는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지요. 정말로 슬픈 일입니다!”
유금표는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은 듯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허이국은 유금표의 말에 입을 쩍 벌리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 조소했다.
“허! 그저 사기꾼인 줄 알았더니 꼭 무슨 수련자처럼 말을 하는군?”
한데 그때, 유금표가 벌떡 일어나더니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이국을 노려보았다. 고고한, 한 분야의 정점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의 외로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문외한이 어찌 높은 곳에 이른 이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허이국이 더 어처구니없어 하는 동안에도 유금표의 설명은 이어졌다.
“저는 네 살 때부터 남을 속이기 시작해 아홉 살에는 신동 소리를 들었고 일반인의 몸으로 축기기 수련자인 척을 했습니다. 열여섯 살이 됐을 때에는 눈빛만 스쳐도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지요. 그때부터 기만의 정점을 찾아 곳곳을 유람했습니다. 세상에는 무려 3천 개의 도가 있다는데 제가 수련하는 것이라고 해서 왜 도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점차 고양되었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의 자부심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생령이 있을 것이며, 또 사라진 생령은 몇이나 될까요? 세상이 처음 열리고 만물이 태어났을 때, 그중에는 분명 기만술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기만술이 무용했더라면 진즉 사라졌겠지요. 세상에 존재한다는 3천 개의 도에서 기만의 도는 과연 몇 번째나 될까? 그게 제 화두입니다. 그리고!”
유금표의 목소리에 한층 힘이 실렸다.
“만약 그 3천 개의 도에 기만의 도가 없다면 저는 3001번째 도를 만들어낼 겁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허이국은 입을 쩍 벌렸다. 한제 역시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유금표는 더 이상 유약하거나 처량해 보이지 않았다. 의복은 엉망이었으나, 지금 그에게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세가 짙게 풍겼다.
“이것이 바로 저의 도 기만책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자신을 한 번 속이기는 쉬우나 평생 속이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시로 스스로를 속이다 보면 결국 원신은 물론 기억에도 영향을 미치지요. 그래서 진정한 기억이 완전히 파괴된 경우, 수혼술로도 진짜 기억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수혼술로도 진짜 기억을 찾을 수 없다는 말에 한제는 흠칫 놀랐다.
“두 번째 단계의 절정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데 이 단계를 돌파하면 열반에 이르러 다시 태어나듯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지요. 단, 그런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이에 성공한 사람만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순수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지요.”
유금표는 한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그 옥패에 지나치게 의지한 탓에 도심이 약해지고 진전을 멈추지만 않았더라면 선배님도 저를 그렇게 쉽게 잡지는 못했을 겁니다! 허나 전화위복으로 선배님이 제 옥패를 파괴하신 덕에 의지할 곳을 잃은 저는 열반에 이를 기회를 맞게 된 셈이지요. 선배님의 저물공간에서 기만책의 세 번째 단계에 반 발짝 정도 들이게 됐습니다!”
유금표는 소매를 크게 휘두르더니 뒷짐을 진 채 오연히 서 있었다.
“흥미롭군.”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이국마저 유금표의 호통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평소와 달리 입을 다물었고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다가 존경의 눈빛마저 담아 포권을 했다.
“도우 덕에 이 허이국의 시야가 넓어졌네! 3천 개의 도 중 기만의 도가 있다니! 좋아, 아주 좋아! 나 역시 알고 싶군. 내가 추구하는 도가 그 3천 개에 포함되어 있는지 말이야!”
이 에 유금표의 표정도 밝아졌다. 다른 사람이 된 듯 이전과 같은 비굴함을 벗어던진 그는 허리를 숙였다.
“보잘것없는 기술일 뿐입니다. 그저 허 영감님이 저를 괴롭히던 것만 멈춰주신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유금표의 갑작스러운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허이국은 흠칫 놀라더니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한편, 한제는 기이한 눈으로 유금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말했다.
“기회를 주마. 잘 해낸다면 너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선물도 주겠다. 지금껏 네가 한 사람이나 종파 하나를 속여왔다면 이번에는 하나의 부족을 속이는 일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한제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유금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바르르 떨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습니다. 좀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 뿐이지요.”
“세 달의 시간이 있다. 너는 기만의 도의 두 번째 단계가 스스로를 속여야 하는 단계, 스스로 그 거짓을 믿게 하고 자신의 기억과 심신마저 속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게 기억을 하나 넣어주마.”
한제의 왼쪽 눈이 번득이더니 푸른 화염이 튀어나와 유금표를 휘감아 거대한 공을 이루었다. 화염 바깥에 있던 허이국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한제, 수준이 또 높아졌구나!’
★ ★ ★
어느덧 한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허이국은 동굴 밖으로 나가보려 했지만 매번 금제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수차례 시도한 후에야 허이국은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이국은 표정이 급변하더니 몸을 홱 돌려 동굴 안쪽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한 달 내내 타오르고 있던 거대한 남색 화염 공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우렁찬 소리와 함께 화염에서 불바다가 솟구쳐 오르더니 거대한 주작이 나타났다.
화염 속에서 춤을 추듯 노니는 주작의 울음소리가 우주를 가득 채웠다.
뒤이어 화염 공에서 한 사람의 인영이 드러났다. 그리고 흐릿했던 인영이 점차 또렷해지면서 허이국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그 인영은 어딘가 익숙했으나,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옷은 여전히 곳곳이 찢겨 엉망이었으나, 그에게서는 일대종사와 같은 위엄과 기세가 풍겼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풍기는 그 인영의 주인공은 유금표였다.
주작의 모습을 한 화염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눈빛은 서늘했고 표정에서는 위엄이 느껴졌다. 특히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에 허이국은 찬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유금표의 수준은 매우 강해졌다가 평범해지기를 반복했다. 허나 이런 변화 덕분에 그에게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남긴 기운이 느껴졌다. 보통의 수련자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최소한 수만 년을 살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이었다.
허이국은 상대가 정말 그 유금표가 맞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허이국이 막 입을 연 순간, 유금표의 냉랭한 눈길이 그를 힐끔 훑었다. 그 순간, 허이국은 머리가 저릿해지면서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난 주작성종의 6대 주작이다! 4대 주작을 찾아 이곳 태고 성신으로 왔다가 어느 진법에 의해 부상을 입고 치료 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