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94
낙생회 장로 선발일이면 장존회에서는 몇몇 귀빈을 파견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낙생회를 인정하고 타락의 땅 대제를 존중한다는 뜻이었지만 사실은 가까이서 타락의 땅을 살피고 특정 부족을 돕기 위함이었다.
또한 낙생회에서는 초청 옥패를 따로 보내 장존회와 태고 성신 내의 강자들을 초대하기도 했는데 대제는 이 일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제가 암갈족과 운둔족의 호위 하에 대제성으로 향하고 있을 때, 태고 성신에서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팔각형의 도안이 새겨진 거대한 나침반 위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의 미간은 구겨져 있었다.
곁에는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
“운락 대사, 타락의 땅 대제는 내 분신을 죽였소. 이 일에 대해 장존회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보상이 있을 거라 하셨다.”
긴 머리의 여인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저 멀리 타락의 땅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제의 비호를 받다니⋯⋯ 그자 내가 한 번 봐야겠어. 어쩌면 조상님의 예언에서 언급된 그 사람일지도 몰라.’
같은 시각, 태고 성신의 다른 한쪽에서는 남색의 부드러운 빛이 퍼져 있었다. 이 빛 안에서는 뒷짐을 진 남몽도존이 조용히 걷고 있었고 뒤로는 이천매가 묵묵히 따랐다.
그보다 더 먼, 인적이 드문 어느 성역. 수련성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흉수가 날아가고 있었다. 타원형의 몸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촉수가 유유히 흔들렸다.
망월이었다.
녀석의 등에는 하얀 도포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얼굴 쪽은 검은색이라 꼭 음양의 도안이 얼굴에 새겨진 것 같았다.
그의 뒤로는 노예로 보이는 세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모두 한제와 관련이 있는 자들로 일목자 무동선, 그리고 이미 죽었어야 할 극현천이었다.
낙생회 장로 선발일을 하루 앞두고 한제는 암갈족, 운둔족과 더불어 대제성 밖에 이르렀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도 눈에 띄는 기이한 형태의 수련성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한 층의 허상으로 뒤덮인 대제성은 안개에 휩싸인 듯 흐릿해 보였다. 하지만 그 허상의 안개 속에서는 수시로 줄기줄기 거대한 균열이 나타나 모든 것을 삼켜댔다.
또한 그 안에는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회색의 얇은 선들도 있었는데 실체를 갖춘 존재가 아니라 자력(磁力)으로 인해 일어난 파문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한제는 허상의 안개 속에 엄청난 힘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그 힘은 수련자의 신통력을 와해시키고 법보를 파괴할 터였다.
사람이나 법보로 생겨난 게 아니라 하늘의 위력이자 능력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한제는 허상의 안개 너머에서 이를 한참동안 자세히 관찰했다.
이때 안개 밖에는 수많은 수련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각자 수십, 수백 명씩 무리를 이루어 여기저기서 친분이 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빽빽하게 모인 수련자들은 한제 일행이 접근해오자 신식을 펼쳐 암갈족과 운둔족을 훑었다. 허나 한제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허상의 안개를 살필 뿐이었다. 어차피 그들의 수준으로는 한제의 진정한 수준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곳은 평소 어떤 수련자도 뚫을 수 없는 강한 힘으로 둘러싸여 있지요. 오직 낙생회 장로 선발일에만 안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립니다. 저희는 늦지 않게 이곳에 도착했으니 아마 곧 통로가 열릴 겁니다.”
암갈족 족장이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대제성 밖의 수많은 수련자들를 훑어보았다. 그 수는 수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운둔족이 언제나 땅속에 처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암갈족을 노예로 삼았을 줄이야. 재미있군!”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가 불쑥 들려오는가 싶더니 1천 명에 달하는 어느 부족에서 남색 옷의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눈빛은 독사의 눈처럼 서늘했다. 미간의 뱀 낙인 덕분에 한층 더 음산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한제 일행을 죽 훑자 암갈족 족장이 싸늘한 얼굴로 상대를 마주보고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한제에게 설명했다.
“흥! 저자는 혼사족(魂蛇族) 대장로입니다. 지난번 장로 선발에 운둔족과 맞붙었는데 승부를 가르지 못해 둘 다 낙선했지요. 사실 그 전부터 두 부족은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반면 운둔족 족장은 혼사족 대장로의 말에도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운둔족이 탐랑을 초빙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라면 꽤나 유리하겠군. 한데 어째 탐랑 선배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혼사족 대장로의 말은 계속됐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멀리 퍼져 나갔다.
이곳에 모인 수만 명의 수련자들은 모두 낙생회 장로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이들로 말하자면 모두가 서로 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의 정보를 하나라도 더 파악할 수 있다면 유리할 터였다. 혼사족 장로의 말에 많은 수련자들의 이목이 운둔족에게 집중된 것은 그 때문이다.
탐랑의 이름은 타락의 땅에 널리 퍼진 상태였다. 그런 탐랑이 돕기로 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운둔족에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탐랑 도우가 운둔족을 돕는다는 소문을 들었네. 일찍이 탐랑 도우는 나에게도 도움을 준 적이 있어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지. 운둔자 탐랑 도우는 아직 안 온 것인가?”
보라색 도포를 입은 어느 노인이 물었다. 노인은 안색이 약간 창백했지만 목소리만큼은 낭랑했다. 또한 그의 미간에는 호 형태의 문양 세 개로 이루어진, 물결 같은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탐랑 선배님은 일이 있어 떠나셨고 돌아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는 어떤 추측도 말라!”
운둔족 족장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 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낙생회의 열세 번째 장로
한편, 암갈족 족장은 좀 전에 질문을 던진 보라색 도포 노인의 정체를 한제에게 설명했다.
“오행수족(五行水族)의 한 지파인 천하족(川河族) 족장입니다. 현재 낙생회의 열세 번째 장로이기도 하지요!”
한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앞에서 노기 띤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감히 내 이름을 입에 올리느냐!”
천하족 족장이었다.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외치며 전광과 같은 눈으로 한제와 암갈족 족장을 노려보았다.
“겨우 암갈족 따위가 나를 보고도 뻣뻣하게 서 있다니! 당장 무릎을 꿇지 못할까!”
암갈족 족장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렇게 많은 수련자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는 말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이 소란에 모든 수련자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혼사족 대장로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암갈족,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싶다면 신중해야 할 것이다. 운둔족을 따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야. 하긴 온종일 땅속에만 처박혀 있던 전갈이 어찌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겠는가?”
“어허,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이냐? 어서 무릎을 꿇어라!”
낙생회의 열세 번째 장로는 한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암갈족 족장은 피식 웃었다. 운둔족 족장 역시 조소하며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한제는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낙생회의 열세 번째 장로는 눈을 번득였다. 상대가 저 무리의 우두머리임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지만 감히 자신에게 저리 무례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낙생회 장로 자리에 연임하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의 권위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허나 암갈족과 달리 운둔족은 약하지 않았고 심지어 탐랑이 그들을 돕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그들의 기세를 꺾는다면 자신의 힘을 충분히 알릴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운둔족과 암갈족 족장들의 비웃음에 어렴풋한 불안감을 느끼기는 했다.
‘저자는 탐랑이 보내온 자가 분명해. 탐랑은 분명 강자다. 허나 낙생회 장로인 내가 겁낼 이유는 없지!’
생각을 마친 노인은 차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이름은 오직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다. 네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주위의 여러 부족 사람들 중에도 한제를 탐랑이 보내온 자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넌 타락의 땅 사람이 아니구나. 얼른 무릎을 꿇어라! 네 주인이 탐랑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혼사족 대장로는 눈을 번득였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기뻤다.
“자격이라⋯⋯.”
그때, 한제가 웃었다.
“누가 감히 선배님 앞에서 자격을 논하는가!”
그 순간, 누군가의 낮은 고함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저 멀리서 쉭 하는 소리와 함께 1천여 개의 빛줄기가 돌진해왔다.
이들을 이끄는 것은 한 청년으로 그 양옆으로는 천쇠에 이른 노인 여러 명이 서 있었다. 이들은 엄청난 기세를 뿜어대며 눈 깜짝할 사이 다가와 한제 곁에 섰다.
청년은 한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포권을 했다.
“용갑족 족장, 선배님을 뵙습니다.”
그를 따라온 1천여 명의 용갑족 수련자 역시 공손하게 포권을 올렸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이 광경에 주위에 있던 수련자들의 표정이 변했다.
“용갑족! 아홉 번째 장로가 이끄는 용갑족 아닌가!”
“용갑족은 372개의 부족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족이지.”
“소문에 의하면 용갑족 족장이자 낙생회의 아홉 번째 장로는 몇 달 전 파직됐고 이에 용갑족에서는 새로운 족장이 선발됐다고 했는데!”
“한데 저자는 대체 누구기에 그런 용갑족의 인사를 받는 거지? 탐랑과는 무관한 자인가?”
한편, 천하족 족장은 긴장한 얼굴로 한제와 용갑족 수련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추측이 떠올랐고 그 순간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건 너무 앞서 나간 거야.’
그때, 대제성을 에워싸고 있던 허상의 안개가 돌연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그 안에서는 콰쾅 하는 먹먹한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허상의 안개 안으로 통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에서는 냉랭한 얼굴의 수련자 수십 명이 걸어 나왔다. 선두에 선 자는 용갑족 수련성에서 만났던 대제의 사자였는데 그는 나오자마자 다른 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곧장 한제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낙생회 열세 번째 장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대제의 사자는 1백 척 떨어진 곳에 서서 공손하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소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를 뒤따라 온 수련자들도 허리를 숙였다.
“소제 폐하를 뵙습니다!”
순간 적막이 흘렀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수백 개의 부족, 수만 명의 수련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얼굴로 한제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두 눈에는 충격과 불신의 빛이 짙게 어려 있었다.
몇 달 전, 대제는 각 부족에게 소제의 존재를 천명한 바 있었다. 허나 누구도 소제를 본 적이 없었다.
“소, 소제?”
혼사족 중년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심장이 터질 듯 쿵쾅댔고 입이 바싹 말라왔으며,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낙생회의 열세 번째 장로 역시 표정이 급변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는 심신이 진동했고 두 눈은 두려움으로 잠식되었다.
‘설마 내 추측이 맞을 줄이야! 아홉 번째 장로는 저자 때문에 벌을 받고 파직됐다. 그런 자를 상대로 내 힘을 뽐내려 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