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95
그는 입이 바짝 말라왔고 머릿속은 뒤죽박죽 뒤엉켜 버렸다.
“소제 폐하, 오래 기다리시게 해 죄송합니다. 통로를 뚫는 데 시간이 필요한 터라 조금 늦었습니다.”
대제의 사자는 연거푸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말에 주위의 수련자들은 그제야 평소와는 다른 점을 알아차렸다. 본래대로라면 통로는 최소한 몇 시진 후에 열려야 했다. 즉, 소제라는 한제 때문에 통로가 평소보다 일찍 열린 것이다.
“이로써 세 번째 소제인가?”
“한데 이전의 두 소제보다 대제의 총애를 더 받는 모양이군. 그러니 통로를 더 일찍 열어줬겠지.”
“그나저나 열세 번째 장로가 큰 실수를 했군. 감히 소제를 건드리다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려나?”
“혼사족도 곤란해지기는 마찬가지지.”
사자의 두 마디가 큰 파도를 일으킨 상태였지만 정작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소제 폐하, 대제성으로 드시지요!”
대제의 사자는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었다.
한제는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자의 보필을 받으며 통로로 향했다.
이 광경에 열세 번째 장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가 좀 전의 일로 자신을 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제아무리 소제라 해도 낙생회의 장로 중 한 명인 자신을 멋대로 처벌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런 만남을 기회로 상대와 더 긴밀한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
‘인자한 자로군. 소제라고 해도 그다지 까다롭게 굴지는 않겠어.’
한데 그때, 한제가 돌연 우뚝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혼사족의 중년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중년 사내는 몸을 바르르 떨며 식은땀을 비처럼 흘렸다. 한제의 눈빛은 실체를 갖춘 예리한 칼날처럼 순식간에 심신을 관통했고 이에 중년 사내는 온몸을 뒤덮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앞뒤 사정을 모르던 대제의 사자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다소 어두운 얼굴로 외쳤다.
“저자를 잡아들여라!”
그러자 사자의 곁에 있던 한 사람이 혼사족 중년 사내에게 다가갔다.
혼사족 사내는 절망에 휩싸였고 그의 뒤에 서 있던 혼사족 수련자들 또한 두려움에 떨었다.
“죽임을 당할 정도의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니 살려주마. 대신 혼사족의 참가 자격을 박탈하겠다.”
한제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모든 이들의 귀에 똑똑히 꽂혔다.
중년 사내에게 다가가던 수련자는 그 목소리에 우뚝 멈춰서더니 곧장 다시 사자의 곁으로 돌아갔다.
한편, 혼사족 중년 사내는 전보다 더 큰 절망을 느꼈다. 사실 그에게는 죽음보다 한제가 내린 처벌이 더욱 치명적이었다. 죽음이야 자기 한 사람의 일이지만 참가 자격 박탈은 부족의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피해였다.
그렇다고 감히 거역할 수도 없었던 중년 사내는 피눈물을 머금은 채 한제에게 포권을 했다.
“소제 폐하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한제는 그를 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번에는 천하족 족장이자 낙생회 열세 번째 장로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열세 번째 장로는 얼굴빛이 더욱 창백해졌다.
“저자의 낙생회 장로 지위를 취소하겠다. 또한 암갈족 수련성에서 1백 년간 꿇어앉아 있게 하도록!”
한제는 오른손으로 열세 번째 장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제의 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제의 눈에서 번득이는 서늘한 빛을 보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족 역시 낙생회 장로 선발에 참가할 자격을 박탈한다!”
말을 마친 한제는 이번에는 운둔족 족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팔 하나를 부러뜨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라!”
그 말에 흠칫 놀란 운둔족 족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한제의 힘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천하족 족장이 한제를 건드리도록 의도했다. 다만 한제가 이를 눈치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더니 오른손의 두 손가락으로 곧장 왼쪽 어깨를 두드렸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팔의 경맥이 완전히 끊어졌다.
“죽을죄를 지은 저를 용서해주시다니, 소제 폐하의 은혜에 망극하옵니다.”
운둔족 족장은 창백한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그제야 한제는 다시 대제성으로 이어진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한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수만 명의 수련자들은 심신이 진동했다. 허나 그중에서도 한제의 말과 거동을 고깝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한제가 대제의 위엄만 믿고 설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흥! 소제라는 지위를 등에 엎고 기고만장하게 구는군!”
“저자는 이번에 소제 시험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소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일세. 소제 시험은 매우 어렵다지? 지금껏 누구도 통과한 적은 없지 않은가. 물론 대제 폐하가 지명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저자가 대제 폐하의 지명을 받았다 해도 그 시험에 통과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한편, 대제의 사자와 함께 통로로 들어선 한제는 대제성을 에워싼 강력한 힘을 느꼈다. 하지만 그 힘도 통로에서만큼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에 한제는 신식을 펼쳐 주위를 살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데 1백 척 정도 나아갔을 때, 한제는 표정이 급변해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내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요란한 쉭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가 대제성 밖의 적막을 파괴하며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제의 사자 역시 표정이 변해 상황을 살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팔각형의 거대한 나침반 하나가 나타났다. 길이가 수천 척에 달하는 나침반은 눈부신 빛을 발산했고 주위에서는 대량의 문양이 번득이면서 강력한 기세를 더해주었다.
나침반은 눈 깜짝할 사이 대제성 앞에 이르렀다.
그 위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앞에 선 사람은 긴 머리를 어깨에 드리운 여인이었다. 검은 머리를 휘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두 눈은 휘영청 뜬 달과 같았고 모든 수련자를 홀릴 듯 기이한 빛이 흘렀다.
옆에는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어두운 얼굴의 그가 풍기는 두려울 정도의 위압감에 주위의 수련자들은 분분히 기겁하면서 물러났다.
또한 사내의 근처에서는 연기가 흐릿하게 맴돌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왜곡된 얼굴의 허상들이 비참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 얼굴은 못해도 수백만 개는 될 것 같았다.
“향불의 힘이다!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야!”
그 연기가 무엇인지 알아본 누군가가 화들짝 놀란 듯 외쳤다.
“운락이라 합니다. 장존회를 대표해 대제를 뵙고 낙생회 장로 선발에 참관하려 합니다.”
긴 머리의 여인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사묵자 대제를 뵙습니다!”
곁에 있던 중년 사내가 냉랭한 얼굴로 대제성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대제성으로 이어지는 통로 속의 한제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혼금(古魂禁)
한제 역시 사묵자를 향해 눈을 돌렸고 그 순간 온 세상을 파멸시킬 검광과 같은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망할 녀석!”
사묵자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입만 산 패자 아닌가! 겨우 그런 수준으로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한제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이놈! 감히 나랑 붙어보겠다는 것이냐?”
사묵자는 분신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한제를 보자 살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한제는 피식 웃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곳 대제성의 주위를 감싼 안개를 뚫는다면 다섯 번째 천쇠에 이른 수준으로 떨어지겠지. 그래도 나와 싸우고 싶다면 얼마든지 붙어주마!”
한제의 말에 사방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사묵자는 여전히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한제의 말대로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이 참으로 날카롭군. 혹시 이 운락에게 도우의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소?”
긴 머리의 여인은 미소를 띠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허나 한제는 그 미소에서 구역질이 날 정도의 가식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장존회 대사라… 수준이 아니라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지위를 물려받은 모양이지? 수련을 시작한 지 천 년도 안 된 젖비린내 나는 계집이 감히 나와 맞먹으려 하다니, 버릇이 없어도 한참 없군! 네 사부가 그리 가르치더냐?”
한제의 표정과 목소리는 싸늘했다.
흠칫 놀란 운락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곧 빠르게 회복됐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한제에게 허리까지 살짝 굽혔다.
“한 수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선배님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두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물어오는 운락에게 한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이용해 발휘할 수 있는 신통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상대는 장존회의 대사였다. 그리고 태고 성신은 신비롭고 예상이 불가한 곳이었다.
특히 운락은 한제가 숨어 있던 곳을 알아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상대를 마주하자 한제는 기억 아주 깊은 곳에 새겨진 천운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천운자는 지금껏 한제 자신을 가장 잘 꿰뚫어본 사람이자 가장 큰 두려움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수도자조차 천운자만큼 큰 두려움을 안기지는 못했다.
한제는 여전히 덤덤해 보였으나 내심 잔뜩 경계하며 답했다.
“허목이다!”
사실 한제는 별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이름을 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꺼림칙한 예감이 들었다.
눈을 번득이며 속으로 허목이라는 이름을 세 번 되뇐 운락의 미간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살짝 구겨졌다.
‘자신의 입으로 진짜 이름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명괴사술(名傀司術)을 쓸 수가 없는데⋯⋯.’
한제는 더 이상 운락과 사묵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돌려 통로 안으로 향했다. 대제의 사자가 얼른 뒤를 따랐다.
사실 한제가 천하족과 혼사족에게 그런 처벌을 내린 것은 몇 가지 시험을 해본 셈이었다. 타락의 땅에서 신적인 추앙을 받는 대제에 대해 한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런 대제가 자신을 어디까지 봐줄지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에 시험 삼아 천하족과 혼사족을 벌해본 것이다.
‘대제는 나의 행동을 하나도 제재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낙생회는 그에게 그다지 상관없는 조직인지도 모르겠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대제의 사자에게 불쑥 말했다.
“암갈족 족장은 여러모로 훌륭하니 낙생회 장로에 앉히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