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98
‘4대 주작은 지나치게 경박했고 내 신통술도 익히지 못했지. 허나 6대 주작인 이 녀석은 아주 냉정해 보이니 내 신통술을 익힐 수 있을 게야.’
계속해서 한제의 몸을 두드리던 노인의 얼굴이 순간 흠칫 놀란 듯 굳어졌다.
‘원신의 음양 중 양이 파괴되어 있어!’
노인은 다소 실망한 얼굴로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한제의 옆에 앉았다.
‘요즘 녀석들은 전부⋯⋯ 휴⋯⋯. 뛰어난 자제력과 온전한 원신의 음양을 가진 건 나뿐인가?’
잠시 고민하던 노인은 한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신의 양이 파괴됐으니 내 신통술을 익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허상의 화염을 얻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를 터. 정말 안타깝구나!’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은 채 좌선하고 있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한참이나 한제를 살피던 노인은 이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뭔가 이상하다! 이 녀석의 체내에⋯⋯ 이건?’
이내 노인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격앙된 얼굴로 오른손을 뻗어 한제의 정수리에 얹었다. 이는 한제에게 아무런 상해도 입히지 않았다. 그저 한 줄기 기이한 힘을 그의 체내에 주입했을 뿐이다.
노인은 이내 손을 거두었으나 두 눈만큼은 여전히 한제를 향해 있었다.
그때, 한제의 정수리에서 돌연 형태 없는 화염이 나타났다. 이 화염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방을 뒤덮으며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열기를 발산했다.
뒤이어 이 형태 없는 화염은 곧장 수축되더니 한 줄기 불씨가 됐다. 아주 미약했지만 다른 이들을 질식시킬 정도의 기운이 담긴 불씨. 바로 한제가 가진 화염의 본원이었다.
노인은 화염의 본원을 보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제의 정수리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콰쾅 소리가 울렸고 이내 한 줄기의 천둥번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천둥번개는 나타나자마자 하나의 문양이 됐다.
아홉 갈래의 얇은 천둥번개로 둘러싸인 이 문양에서는 사방을 뒤흔들 듯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고 구름과 바람이 몰아쳤다. 한제가 가진 두 번째 본원이었다.
‘대단한 녀석이로군. 주작을 몇 번이나 각성시켰으니 화염의 본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지만 천둥번개의 본원은… 이렇게 보고 있으려니 정말이지 놀랍군! 더구나 이미 완성되어 있어! 게다가 공의 문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러 있다! 대체 어떻게 수련을 했던 거지? 태고의 뇌룡이라도 삼켰단 말인가?’
노인은 찬 숨을 들이마시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데 바로 그때, 한제의 정수리 위에서 또 하나의 빛이 나타났고 노인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이거야! 내가 방금 이 녀석의 체내에서 본 건 바로 이거야!’
한제의 정수리는 반짝이다가 흑백으로 이루어진 빛을 한 줄기 쏘아 보냈다.
콰르릉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하늘에는 한 줄기 허상의 강이 나타났다. 생사의 윤회로 만들어진 황천이었다.
주위를 휩쓸던 강은 머리와 꼬리가 연결된 상태였고 혼탁해 보이는 내부에서는 생과 사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한제가 생사의 경지로 만들어낸 세 번째 본원이었다.
노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기쁜 기색이었다. 지난 수만 년간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격한 감정이었다.
“세 번째 본원이라니! 이럴 줄은 차마 몰랐군. 허어⋯⋯.”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한제의 정수리가 또다시 반짝이더니 이내 태극의 문양이 허상으로 나타나 튀어나온 것이다.
인과를 품은 이 태극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온 세상을 다 찢어버릴 듯했다. 하늘과 땅이 서로 뒤섞이면서 인과의 순환을 형성하려 하기도 했다.
주위에 다른 수련자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지간한 수련자라면 이 인과의 힘에 휘말려 헤어나지 못하고 파멸했을 테니까.
노인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헤 벌렸다.
‘또 있어? 네 갈래의 본원이라고? 이…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무려 네 개의 본원…? 이건 너무나⋯⋯.’
한데 그때, 노인의 눈동자가 졸아들었다. 한제의 정수리에서 또 한 번 빛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타난 빛은 기이했다. 존재하는 것 같기도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한 이 빛은 진실과 거짓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동시에 하나하나의 모호하고 흐릿한 화면들이 떠올랐는데 누구도 그 화면들의 진위를 또렷하게 구별할 수가 없을 듯했다.
한제의 머리 위로 떠오른 다섯 개의 서로 다른 본원을 멍하니 보고 있던 노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잠시 후, 다섯 개의 본원은 하나둘 한제의 체내로 돌아갔고 그제야 노인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정말 더는 없는 거겠지?’
노인은 질린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다섯 개의 본원이라⋯⋯. 젠장할, 이 녀석은 4대 주작보다 더 이상한 놈이로군! 세상에 어떻게 이런 괴물이 있단 말인가!”
노인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달빛이 짙어진 시각, 가벼운 바람이 불어와 호수를 에워싼 식물들을 흔들었다.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밤이 지나갔고 저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아침 해가 서서히 얼굴를 내밀었다.
대지를 가득 채웠던 어둠이 물러나면서 깊은 밤의 스산함도 곧 자취를 감추었다.
밤새 좌선을 한 한제의 체내에서는 화염의 힘이 전보다 한층 강성해진 상태였다. 다만 아쉽게도 아직 주작의 네 번째 각성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낙생회 장로 선발 시합은 이른 새벽에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태양이 거의 머리 꼭대기에 이르렀을 무렵에야 용혈의 힘은 차차 흩어졌고 한제는 그제야 원상태를 회복하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후우우.”
한제는 탁한 숨을 훅 내뱉었다. 새카만 숨결은 형체를 갖춘 채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순간 땅은 강렬한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쩌적 소리와 함께 균열을 일으켰다.
눈을 뜬 한제는 맞은편의 노인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이한제가 4대 조상님을 뵙습니다.”
그 말에 노인은 피식 웃더니 대꾸했다.
“난 4대 주작이 아니다.”
흠칫 놀란 한제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그렇다면⋯⋯ 1대 주작이십니까?”
노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다. 나는 2대 주작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고 또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지. 아, 4대 주작도 이곳에 있기는 하다. 너는 내가 4대 주작 이후 두 번째로 본 우리 주작족 사람이고.”
“혹시… 조상님이 대제이십니까?”
“아니다. 너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소제다.”
한제가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며 2대 주작은 미소를 지었다.
“4대 주작 또한 소제다. 타락의 땅의 대제라… 다른 사람들은 그리 부르지만 우리 주작족에서 그를 칭하는 말은 하나 더 있다. 우리는 그분을 1대 주작이라 한다! 원고 선존 휘하 4대 장수 중 한 분이기도 하지!”
한제는 전율을 느끼며 바르르 떨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시험을 치르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 시험은 반드시 치러야 한다. 더욱이 네게는 어쩌면 허상의 화염으로 돌파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매우 어려울 것이나 지나치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서북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소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데 사묵자의 도전에 왜 응하지 않았지? 무릇 주작족이라면 전투에 두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시험을 마치면 곧장 그와 맞붙도록 해라.”
2대 주작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낙생회 장로 선발 시합은 애들 장난일 뿐이다. 이번에 초대된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들에게 새로운 소제가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게 더 중요하지. 넌 주작족의 사람이다. 네가 계내에서 왔건 어쨌건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네가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그 누구도 절대 너를 다치게 할 수 없다!”
태고 성신에서 홀로 죽을 고비를 넘겨온 한제로서는 노인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기억해라. 주작족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감히 건드릴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포악해져야만 이 혼돈의 땅에서도 오연히 설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이 네가 숨지 말고 네 힘을 보여줘야 하는 이유다. 사묵자 따위를 두려워하지 마라!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가 대수더냐?”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눈은 서늘하게 번득였다.
그런 한제를 본 노인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시험을 위해 용의 피를 마셔라. 너는 내 신통력을 배울 수는 없지만 대신 주작족의 비술 하나를 전수해주마! 너 또한 주작족 사람이니 가르쳐줘도 문제없겠지. 우리에게는 여태 비술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내가 말하는 비술이란 사실 먼 옛날, 조상님이 청룡과 현무, 백호로부터 빼앗아온 신통술이다! 그때부터 비술이라 칭했지!”
같은 사성종의 신통술을 빼앗았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노인의 모습에 한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셋 중 현무의 힘이 가장 강하다. 내 좀 전에 네 몸을 살펴보니 어째서인지 고신의 육신을 가지고 있던데 그렇다면 이 비술의 위력이 더욱 강력해질 터! 이것은 신통술이 아니라 힘을 운용하는 방법이다. 잘 보거라!”
말을 마친 노인은 호숫가로 다가가더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가 크게 휘둘렀다. 그의 손짓에 호수의 물은 진동하면서 움푹 꺼졌다.
힘을 깨닫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호수의 물이 파도치듯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는가 싶던 물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면서 수없이 많은 미세한 물방울로 부서졌고 이 물방울들은 서로 부딪혀 또다시 붕괴하기를 반복했다.
순식간에 물안개로 부서진 물이 허공을 채웠고 호수의 수위는 10척 정도 낮아졌다.
특이하거나 신기할 것 없는 광경이었다. 그저 호수의 물을 대량으로 끌어들여 물안개를 일으키는 것에 불과해 보이기도 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
노인은 한제의 속마음을 읽은 듯 물었다. 허나 그런 노인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호수를 응시하면서 노인이 손바닥으로 호수를 내리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 한제를 바라보는 노인은 흡족한 듯 웃으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는 한제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일지, 그가 이 비술의 실마리를 알아차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조상님으로부터 이 기술을 배웠을 당시, 내 생각만으로는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지. 그토록 자질이 뛰어난 4대 주작 또한 가장자리만 겨우 더듬었을 뿐, 스스로 깨달음을 얻지는 못해 조상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깨우침을 얻었지. 과연 우리 6대 주작 녀석은 어디까지 깨달을 수 있을까?’
노인은 기대에 부푼 한편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허나 이 녀석의 자질은 4대 주작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 수준에 이른 데는 분명 여러 기회와 행운도 따랐겠지. 어쩌면 4대 주작이 말했던 제자 덕분인지도… 그러지 않고서야 겨우 2천 년의 수련만으로 허상의 화염을 깨닫기 직전에 이르게 됐을 리가 없지. 조상님이라 해도 그 짧은 시간만으로는 부족했을 테니까.’
그러나 이내 한제의 몸에서 나타난 다섯 갈래의 본원을 떠올린 노인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어쩌면⋯⋯ 혹시 이 녀석이 그것을 꿰뚫어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