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99
노인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제를 빤히 보았다.
진지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긴 한제의 머릿속에서는 좀 전의 장면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노인의 손바닥은 일견 평범해 보였지만 호수의 수면을 진동시키면서 물방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물방울들은 서로 끝없이 충돌을 반복해 완전히 무너져 물안개가 됐다. 허나 이 단순해 보이는 기술에는 틀림없이 심오한 도리가 깃들어 있을 터였다. 노인의 반응만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제는 조용히 호수로 다가가 쪼그려 앉더니 오른손으로 수면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런 신통술도 발휘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데 손이 호수에 닿은 순간, 한제는 그 안에서 전해져 오는 반작용을 느낄 수 있었다.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매우 약한 힘이었다.
수면은 부드러웠지만 그 위에 손바닥을 대면 아주 경미한 막 같은 힘이 느껴졌다. 이전이었다면 이런 힘은 한제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을 것이나, 방금 전 호수 수면으로부터 반작용의 힘을 감지했기에 그의 두 눈은 흠칫 굳어졌다.
수면에서는 파문이 일어나 바깥쪽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한제의 마음에서도 파문이 일어나 확산됐다.
한제는 보통 수련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고신이었다. 고신족은 고유의 신통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육신도 더없이 강력했다. 주먹 하나로 하늘을 가를 수 있고 발길질 한 번으로 수련성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였다.
때문에 한제는 법보나 신통술에 의지하는 보통의 수련자보다 미세한 기운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물은 아주 약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강력해.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법이다. 바위에 떨어진 물방울은 더 작은 물방울들로 부서져 흩어지지만 떨어지는 순간에는 반작용의 힘을 발휘한다. 한 방울은 미미하지만 끊임없이 떨어지면 반복된 진동에 바위는 결국 뚫리기 마련이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고신의 육신이라 해도 꿰뚫릴 터.’
한제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벌떡 일어나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편, 노인의 신중한 표정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제가 스스로의 힘으로 비술의 가장자리에 접근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의 자질은 4대 주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형편없지만 세상에 대한 깨달음은 놀라운 수준에 이르렀군! 그 깨달음으로 천부적인 자질을 보완한다면 당시 4대 주작과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어! 과연 다섯 갈래의 본원을 가진 자답다.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
찬 숨을 들이마신 노인은 대견하다는 듯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술에 대해 설명하려 했다. 허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한제가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해.”
그 목소리에 흠칫 놀란 노인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물은 유연하고 부드럽다. 그런 물이 호수를 채울 정도로 모이면 자연스레 반작용의 힘도 생성되지. 내 손으로 전달한 힘이 강해질수록 반작용의 힘도 강해질 터. 주먹으로 수면을 강타하면 튕겨 나온 반작용의 힘은 내 주먹에 실린 힘보다 더 강할 거야!”
한제는 곁에 노인이 있다는 것도 잊은 듯 계속해서 혼잣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힘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면서 무서울 정도의 붕괴를 일으킨다. 선배님이 손바닥으로 수면을 눌렀을 때 셀 수 없이 많은 미세한 물방울이 끝없이 충돌하면서 물안개가 된 건 그 때문이야! 이는 물에서 안개로의 상태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천지개벽할 엄청난 힘이 담겨 있어! 바로 생령의 상태를 변환시키는 힘이야!”
한제의 눈은 점점 밝아졌고 머릿속은 맑아졌다.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노인이 호수를 가격했을 때의 기억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바로 이거야! 선배님이 내리치신 손바닥에는 그 도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수련성조차 파괴할 정도의 힘이라면 그 반작용을 되돌려 받겠지만 대신 힘이 전달된 순간 수련성은 무너져 내릴 거야. 허나 물은 다르다. 세상 어느 것보다 유연하고 탄력이 있지. 만약 바다를 대상으로 주먹을 휘둘렀을 때 튕겨 나오는 반작용이라면…?”
한제를 바라보던 노인은 거의 경악하고 있었다. 다섯 개의 본원을 봤을 때 못지않은 충격이었다.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저 정도라니! 내 평생 저런 자는 본 적이 없다. 천부적 자질이 뛰어난 자들보다도 몇 배는 높은 이해력이야! 다섯 개의 본원도 결코 우연이나 행운으로 가지게 된 게 아니었구나!’
허나 노인은 고혼금의 존재를 파악한 한제가 4대 금제를 융합해 여섯 번째 본원인 허상의 본원까지 얻으려 하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선배님은 제게 반작용의 힘을 운용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려 한 거군요.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반작용을 이용할 때 위력은 배로 높아지고 심지어 물질의 형태까지 바꿀 수 있으니까요!”
한제의 눈이 기쁨으로 빛났다. 법보나 신통술을 주로 사용하는 보통의 수련자에게는 이런 힘의 운용 방식이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으나, 육탄전을 주로 하는 고신인 한제에게는 어지간한 신통술보다 유용했다. 이는 고신의 기억 속에도 없는 힘의 운용 방식이었다.
한제의 머릿속에는 자신보다 훨씬 수준이 높은 탁삼과의 싸움이 떠올랐다. 그때만 해도 그는 탁삼에 비하면 아이나 다름없이 나약하고 보잘것없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그는 그저 고신의 힘을 마구 휘두를 줄만 알았던 것이다.
한편,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구나. 그게 바로 내가 네게 전수해주려던 것이다.”
노인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사실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이 녀석에게 내 모든 것을 간파당할 수는 없지. 만약 이놈이 당시의 내가 이 기술을 깨우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내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이럴 줄 알았다면 백호성종이나 청룡성종의 비술을 알려줬을 텐데… 그들의 비술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에게 적용되는 것이니 연구에도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노인은 연이어 마른기침을 하더니 눈을 부릅뜨고 호통치듯 주제를 바꾸었다.
“좋다! 비술도 배웠으니 이제 시험을 보러 가거라. 시험을 마치고 나면 사묵자에게 네 힘을 똑똑히 보여줘라!”
말을 마친 그는 소매를 휘둘러 한제를 휘감은 채 허상의 화염이 되더니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허상의 화염에 휩싸인 한제는 그것을 자세히 살피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것이 허상의 화염인가! 전혀 뜨겁지 않으면서도 영혼이 불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구나!’
이들이 서북쪽 시합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두 명의 수련자가 장로의 지위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수만 명의 수련자들이 시합장의 사방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는데 개중에는 누구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자리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사묵자와 장존회의 운락 대사가 있는 곳이었다.
또한 그들로부터 비스듬히 떨어진 곳의 남색 빛에 휩싸인 두 부녀(父女) 주위도 텅 빈 상태였다.
구름 위에 드러누워 여유롭게 싸움을 구경하는 청의의 소년도 허공에 뜬 채 똬리를 튼 거대한 도마뱀의 등에서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가부좌를 튼 노인도 그런 수련자들이었다.
도마뱀 위의 노인은 얼굴이 온통 얽었고 두 귀에는 주먹만 한 검은색 귀걸이가 걸려 있었으며, 입술에는 붉은 봉인 바늘 네 개가 꽂혀 있었다.
이런 강자들이 동시에 급변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상공을 바라보았다.
“늙은이들이 떼로 왔군.”
그들이 고개를 든 순간, 2대 주작이 비웃듯 외쳤다. 그 순간, 그의 몸을 에워싸고 있던 허상의 화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노인의 뒤로 한제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중 사묵자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살기가 어려 있었다.
반면 남색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두 부녀 중 여인은 추억이 어린 듯 부드러운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구름 위에 드러누워 복숭아를 먹고 있던 잘생긴 소년의 눈빛은 기이하게 번득였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남색 빛으로 뒤덮인 부녀 앞에 이르렀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심경이 얽혔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남몽도존 선배님을 뵙습니다.”
한제의 공손한 포권에 남몽도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전에는 자네를 과소평가했네.”
한제가 남몽도존과 친분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2대 주작은 기이한 눈으로 부녀를 훑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그들로부터 시선을 거둔 그는 사묵자를 노려보며 외쳤다.
“뭘 그리 보는 게냐! 내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느냐? 나와 싸우고 싶다면 내 한 번 놀아주지!”
사묵자를 노려보며 오른손을 마구 휘두르는 그의 언행에서는 선배다운 품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 사묵자는 안색이 급변했다. 상대가 타락의 땅 첫 번째 소제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제가 거느린 이들 중 첫손에 꼽히는 그는 장존회에서 상대하기 쉽지 않은 존재로 분류됐다.
“높으신 선배님께 제가 어찌 감히 대적하겠습니까?”
사묵자는 얼른 포권을 하고는 두 눈에 어린 살기를 흩어버렸다.
“흥! 나한테 덤빌 배짱도 없으면서 감히 내 손자 같은 녀석을 건드렸단 말이냐? 넌 맞아도 싸다!”
노인은 사묵자가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 오른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의 손짓은 어떤 신통술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운락 대사는 곧장 옆쪽으로 몇 걸음 비켜섰다. 사묵자 역시 잔뜩 긴장한 채 낮게 기합을 넣고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온 하늘을 뒤흔들 듯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쾅!
두둔하는 노인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는 사묵자의 두 손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진 그는 온몸이 허상의 화염으로 휩싸인 채 타오르고 있었다.
뒤로 30척 정도 물러난 그를 덮친 화염이 세 번 번득였고 그때마다 사묵자의 체내는 더욱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동시에 그는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고 기겁한 눈으로 2대 주작에게 다급히 외쳤다.
“쿨럭! 높으신 선배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 수많은 도우 앞에서 공격하시다니, 이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사묵자의 눈에서 분노의 화염이 이글거렸다. 하지만 허상의 화염은 그 분노의 화염에 힘입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큭!”
사묵자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해냈다. 그때 운락 대사가 다급히 다가오더니 고운 손을 사묵자의 등에 얹고는 신통술을 발휘했다. 그러자 사묵자는 상태가 약간 나아졌으나, 여전히 창백했다.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너를 일방적으로 괴롭혔다 이 말이냐? 젠장할, 일방적인 괴롭힘이 무슨 뜻인 줄은 아는 게냐? 넌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로서 내 후손과도 같은 녀석을 압박하지 않았더냐! 한데 내게는 너를 괴롭히지 말라는 게냐? 싫다면 어쩔 것이냐!”
2대 주작은 한제에게 매우 친절했으나, 사실 그는 특유의 포악하고 거친 성격으로 유명했다.
노인은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동시에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사묵자 앞에 이르더니 뺨을 힘껏 후려쳤다.
철썩!
“크윽!”
사묵자는 신음과 함께 수십 척을 밀려났다. 그의 뺨은 눈 깜짝할 사이 부어올랐고 거무스름한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 본 운락 대사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노인의 앞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고정하십시오. 저희는 장존회⋯⋯.”
“닥쳐라! 한 마디라도 더 한다면 네 뺨도 후려쳐주마!”
2대 주작의 악에 받친 눈빛에 운락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묵자는 그제야 밀려나던 것을 겨우 멈췄으나, 눈에는 초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네가 뭔데 감히 내 손자 녀석을 욕하고 업신여기느냔 말이다!”
2대 주작은 버럭 호통을 치며 다시 한번 달려들어 이번에는 왼손으로 사묵자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소리와 함께 사묵자의 얼굴이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크악!”
신음과 함께 피를 뿜어낸 사묵자는 다급히 도망쳤다. 그의 눈에서 분노의 화염이 타오를수록 몸을 뒤덮은 채 타오르고 있는 허상의 화염과 합쳐져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이에 그는 분노마저 애써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내 손자를 욕하는 것은 나를 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2대 주작은 눈을 부릅뜬 채 사묵자에게 다가갔다.
“저는 그럴 의도가⋯⋯.”
사묵자는 떨리는 심신을 애써 억누르며 변명하려 했지만 노인은 들어줄 생각도 않고 손을 휘둘렀다.
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