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00
이미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으로 변한 채 잔뜩 부어 있었던 사묵자의 왼쪽 뺨이 터져나가면서 피를 왈칵 토해냈고 저 멀리 처박혔다. 그가 토해낸 피에는 부러지거나 뽑힌 이가 몇 개 섞여 있었다.
“나를 업신여기다니!”
2대 주작은 살기 어린 눈빛을 번득였다. 만약 사묵자를 한제의 몫으로 남겨둘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단순히 뺨을 세 대 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단번에 목숨을 빼앗았을 터였다.
사묵자는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였으나 2대 주작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사묵자가 장존회 소속이라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주작족을 건드린 자는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수준이 높다 해도 그는 개의치 않았을 터였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1대 주작이 나섰을 테니까. 본래 주작족은 결속력이 강했다.
한제는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묵자를 사정없이 후려 패는 노인의 모습에서 청수나 5대 주작성황 같은 듬직함과 따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제는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몇 배나 더 잘해주었다. 예를 들어 사도환이나 청수, 주작성황, 둔천 등이 그런 대상이었다.
한편, 시합장에서 싸우고 있던 두 수련자는 전투를 멈춘 상태였다. 주위의 수련자 수만 명도 공손하게 서 있었다. 열 명 남짓한 대제의 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2대 주작은 사묵자로부터 시선을 거두고는 한제 곁으로 돌아왔다. 엉망이 된 사묵자나 창백한 얼굴의 운락에게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대제성에 와주다니, 참으로 기쁘군.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들도 몇 있지만 상관없지. 부디 이곳에서 우리 타락의 땅 세 번째 소제가 치를 시험의 참관인이 되어주게! 만약 시험에 통과한다면 이 녀석은 진정한 소제로 거듭날 터. 그리 되면 이 녀석의 적은 곧 나의 적이자 타락의 땅 전역의 적이 되는 셈이네.”
노인은 사방으로 포권을 한 뒤 한제를 잡아당기며 잘생긴 소년을 가리켰다.
“남몽도존은 알고 있는 모양이니 따로 소개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저기 복숭아를 먹고 있는 소년이 보이느냐? 어려 보이지만 실은 늙어도 한참 늙었지. 저자는 태고 5존의 한 명인 묘음도존이다!”
한제는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심신이 떨려왔다. 묘음도존이라는 이름에 담긴 무게 때문이다.
허나 상대에게서는 어떠한 수련의 흔적도 읽어낼 수가 없었기에 한제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포권을 할 뿐이었다.
묘음도존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기 입술에 바늘이 꽂혀 있는 늙은이도 알아둬야 한다. 저자는 태고 5존의 한 명은 아니지만 그에 뒤지지 않는 수준에 이른 태황상인이다. 독공으로 유명하지.”
노인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채 도마뱀의 등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황상인이라는 노인은 눈을 번득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입술은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체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참관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와 다시 한 번 싸우기 위해서다! 허나 네가 데리고 있는 그 녀석, 훌륭하군. 마음에 들어. 내 호신용품을 하나 선물하지!”
말을 마친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부러진 그의 검지 손톱이 한제를 향해 날아오다가 검은 빛에 휩싸인 채 코앞에 이르렀다.
2대 주작은 도발적인 말에 눈을 부릅떴다가 상대가 선물을 보내오자 피식 웃었다.
“독충 같은 자식, 꽤 관대하군. 받아둬라. 저자의 독이 들어 있으니 보통 물건은 아닐 게다!”
그는 말을 마치고는 아래쪽의 시합장을 향해 손을 뻗으며 낮게 외쳤다.
“낙생회 장로 선발 시합은 잠시 미뤄두고 소제의 시험을 시작한다!”
천둥과 같은 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진 순간, 드넓은 시합장에서는 펑, 펑 소리와 함께 흉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동시에 시합장에는 예의 그 거대한 거북이가 나타났다.
길이가 1천 리에 달하는 거북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사방으로 퍼져 나간 기운에 수만 명의 수련자들은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쿠오오오!”
고함을 내지른 거북이는 고개를 번쩍 들어 2대 주작을 응시했다.
“창향(蒼香)을 피워라!”
2대 주작이 두 손을 휘둘렀다. 지금껏 가볍고 장난스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엄숙함과 위엄에 담긴 거침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그가 있는 이곳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칙이 되는 것만 같았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거북이의 등 위에는 굵기 1천 척, 길이 1만 척에 달하는 거대한 향 세 개가 솟아올랐다.
푸른색의 향들은 하늘을 꿰뚫을 듯해, 멀리서 보면 거대한 거북이는 향 세 개를 꽂아놓은 제단처럼 보였다.
“소제의 시험은 매우 간단하다. 너는 각각 천, 지, 인의 환계(幻界)를 뜻하는 향에 혼을 불어넣어 불을 붙어야 한다! 이 시험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따르지. 일단 향에 불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창향은 매우 거대하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순식간에 타버린다.”
2대 주작은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험이란 무릇 위험이 따르기 마련! 네가 향에 불을 붙이지 못한다면 차라리 괜찮다. 허나 향에 불이 붙었는데도 다 타버리기 전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네 혼은 그 안에 갇힌 채 불살라질 것이다. 내가 있는 한 네가 진정한 죽음을 맞는 일은 없겠지만 나를 실망시키지는 마라.”
한제는 집중해 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이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지금껏 두 명밖에 없다. 첫 번째는 나였다. 그리고 이후 또 한 사람이 성공했지. 그는 천부적인 자질이 매우 뛰어난 자로 첫 번째 향은 5초, 두 번째 향은 9초, 세 번째 향은 14초 만에 불을 붙였다. 나보다도 빨랐지. 어때, 도전해보겠느냐?”
노인은 형형한 눈으로 한제의 두 눈을 응시했다.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좋다. 너로부터 받을 세 번째 충격을 기대하마! 하하하!”
노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광풍이 불어닥쳐 한제를 휘감더니 곧장 첫 번째 향으로 이끌었다.
한편, 이 무렵 사묵자는 멀리서 악의를 숨긴 눈으로 한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부어올랐는데 이는 신통술로도 제거할 수 없었다. 2대 주작이 그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남겨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장존회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저 망할 녀석의 수준으로는 이 시험을 절대 통과할 수 없을 터!’
사묵자는 서늘하게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운락 대사의 표정도 어두웠다. 뭔가를 예측하려는 듯 소매에 감춘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살짝 먼 곳에 자리한 묘음도존을 훑었다.
구름 위에 누워 있던 묘음도존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녀석은 수도자가 말한 이한제가 틀림없군. 봉계의 주인이 죽지 않았다니, 수도자의 말은 사실이었어. 허나 신중해야 한다. 당시 내가 공격에 나섰던 것은 장존이 엄청난 이득을 보장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장존회가 어떤 보상을 약속하느냐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겠군.’
한편, 남몽도존은 침착한 얼굴로 거대한 향을 향해 달려드는 한제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짧은 시간에 섬뇌족을 멸하고 타락의 땅과 긴밀한 연까지 맺다니. 정말이지 저자를 얕봐도 한참 얕봤구나. 나야 태고 5존의 한 명으로서 태고 성신을 수호할 책임을 지고 있다지만 이 아이는…’
남몽도존은 복잡한 눈빛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장존회는 두렵지 않다. 장존이 나선다 해도 거절할 수 있어. 허나, 만약 그녀가 직접 온다면… 어찌 한단 말인가?’
아내를 떠올리자 남몽도존은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아내가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던 당시를 그는 한순간도 잊지 못했다.
그 무렵, 태황상인은 2대 주작과의 싸움 외에는 어떤 일에도 관심 없다는 듯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태운 도마뱀 역시 콧구멍으로 두 갈래의 하얀 김을 뿜어대며 눈을 감고 있었다.
한편, 주위의 수련자들은 거북이의 등 위 첫 번째 향을 향해 달려가는 한제를 바라보며 각자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흥! 운이 좋은 녀석이로군. 어쩌다 첫 번째 소제의 눈에 들었을지는 몰라도 시험을 통과할 수는 없을 게다.’
‘낙생회의 첫 번째 장로님은 다섯 번째 천쇠에 이르렀는데도 소제의 시험에 응할 엄두를 내지 못하셨다지. 저자가 통과하는 건 말도 안 돼.’
수만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한제는 첫 번째 향 옆에 착지했다. 거대한 향 옆에 서 있으려니 한제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
커다란 향에서는 짙은 향기가 흘러나왔는데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하는 향이었다.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오른손을 들어 거대한 향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제자리에 선 채 영혼을 향에 불어넣었다.
슬픔에 찬 영혼
시험의 첫 번째 관문은 천, 지, 인 중 인의 환계였다.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콸콸 흐르는 물소리였다. 뒤를 이어 번화한 도시의 소리가 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점점 또렷해지면서 결국 물소리를 압도했다.
푸른 하늘은 꼭 구름 모양의 무늬를 넣은 비단처럼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한제는 어느 다리 위에 서 있었다. 아래로는 강이 흘렀고 저 멀리 배 위에서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리의 양쪽은 번화한 거리와 이어져 있었다. 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그들의 모습은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허상 같아서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지금 밟고 있는 다리 역시 흐릿해 언제라도 흩어져 사라질 듯했다. 자신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이 허상인 셈이었다.
어느 일반인의 도시였다. 크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있었다. 길 양옆의 수많은 가게와 노점에서는 물건을 팔기 위한 호객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흐릿하고 모호해 그와는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이 첫 번째 관문인가?’
한제는 생각에 잠긴 채 몸을 돌려 다리에서 내려가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그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강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어느 큰 배 위에는 술잔을 든 청년이 앉아 있었다. 청년의 앞에서는 여러 명의 무희가 춤을 추었고 뒤로는 시종들이 서 있었다.
“무릇 세상은 만물의 객잔이고 세월은 영원히 흘러가는 나그네로다. 한바탕 꿈같은 삶, 쾌락을 누려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긴 웃음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사뭇 방자했다.
청년은 술잔을 기울였다. 한데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과 달리 청년만큼은 순식간에 또렷하게 보였다.
청년을 본 순간, 한제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 청년이 너무나도 낯익었기 때문이다.
방자한 시구를 읊으며 술을 마시는 청년의 모습은 한제와 똑같았다. 유일한 차이는 세월의 흔적뿐. 지금의 한제는 비록 청년처럼 보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2천여 년의 세월이 드러나지 않는 흔적을 남긴 상태였다.
반면 배 위에서 술을 마시는 청년에게서는 충만한 활력과 생기가 느껴졌다. 어느 모로 보나 겨우 서른 살이나 됐을 법한 일반인이었다.
한제는 멍하니 서서 가까이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았다. 배 위의 청년은 술잔을 내려놓고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훔쳐냈다.
“훌륭하십니다. 도련님의 시는 정말이지 범상치가 않군요. 소인이 듣기로는 한낱 인간으로서는 얻기 어려운 하늘에 대한 시 같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청년의 뒤에 시립해 중년의 종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헛소리! 이건 옛 조상들이 남기신 시야. 그렇게 말하니 꼭 내가 직접 만든 시처럼 들리는구나.”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부채로 종을 가리켰다. 시종은 청년의 면박에도 개의치 않는 듯 웃으며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 이제 남은 은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소성(蘇城)에서 배를 빌리는 데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드니까요. 벌써 나흘째입니다. 이제는 하루빨리 수도로⋯⋯.”
청년이 고개를 내젓자 다른 시종 하나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청년은 새로 채워진 술잔을 기울이더니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저 멀리 다리 위를 보더니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다리 위에서 묵묵히 내려다보던 한제와 청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청년은 표정이 급변하더니 몸을 바르르 떨었고 기이한 눈으로 술잔을 내려놓더니 벌떡 일어나 한제를 향해 포권을 했다.
“형님,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한잔하시겠습니까?”
그 무렵, 한제는 떨리던 심신을 안정시켰다. 그는 성큼 한 걸음 나서더니 가뿐하게 청년의 배에 올랐다.